상해~충칭 임시정부 로드
- 상해(1919.4) : 윤봉길 의사 폭탄 테러
- 항저우(1932.5) :임시 수도근처로 이동
- 전장(1935.11) :중일전쟁으로
- 창사(1937.11): 남목청 사건
- 광저우(1938.7) :기차 폭격
- 류저우(1938.10) :강따라 목선으로 이동
- 치장(1939.4): 충칭과 가까운 곳 정착
- 충칭(1940.9): 임시정부 전성기
* 상해 임시정부 13년동안 머묾(1919-1932)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유명해지면서 항일 동지인 중국 장제스의 지원 약속도 받지만 일제의 타깃이 된다. 그때 임시 정부는 항저우로 이동한다.
* 항저우(1932.5)
항저우에서 김구와 장제스가 만나 1933년 중국의 중앙 육군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고 독립 운동가들의 정치, 군사훈련을 도모했다.
* 전장(1937.11)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에서 중국 정부와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 난징 근처 전장으로 이동한다. 그때 중일 전쟁 발발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공격
1932년 상하이 침략하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난징 공격.
그러나 중국군은 결사 향전을 외치며 일본을 피해 서쪽으로 피난을 간다. 그리고 충칭을 임시수도로 삼는다.
이동 배경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해서 난징대학살이 일어난다. 죄 없는 민간인들 30만 명을 잔혹하게 학살한다. 누가 먼저 더 많이 목을 치느냐로 경쟁할 만큼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일본의 만행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피해 또다시 창사로 이동한다.
*창사(1937.11)
창사에서 또 위기가 찾아온다.
남목청 사건
김구 선생이 총을 맞은 사건이다. 임시정부는 여러 정당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3당 대표들이 합당을 합의하기 위해 모였는데 당원중 한 사람인 이운환이 회의 중에 난입하여 합당 반대하며 당 대표였던 김구 선생에게 총을 쏜다.
총알은 김구의 심장 옆에 맞았고 의사는 곧 죽을 거다라는 얘기를 하고 그냥 방치했는데 4시간이 지나도 살아있어서 그때서야 치료를 시작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후유증으로 그때부터 오른쪽 다리가 마비가 되어 지팡이를 짚고 걸으셨다. 이운환의 배후에는 일제가 있었다는 설이 있었다.
*광저우 (1938.7)
광저우 약 4개월 있었다. 창사에서 광저우까지 4흘간 이동할 때 100여 명 이상이 한 번에 움직여야 하니까 기차 한 칸을 빌려 이동하는데 이때 중일 전쟁 중인 일본의 공습이 있었다. 기차가 멈출 정도의 폭격 심했고 어쩔 수 없이 뛰쳐나와 사탕수수밭에 몸을 숨겼다. 비좁은 기차에 무더운 날씨에 몸을 숨기며 이동했다.
*류저우(1938.10)
류저우로 이동하기 위해 가장 빠른 이동 방법은 뱃길 (비포장 도로라서 더 오래 걸리는 자동차)이었다. 목선을 이용해 강물을 타고 이동했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기선이 앞에서 끌어줘야 움직일 수 있어서 기선을 빌려 구이핑까지 도착했다. 그러나 갑자기 기선이 도망을 가버렸다. 발이 묶였는데 어떻게든 이동을 해야 했으므로 사람들이 밧줄로 직접 배를 끌었고 그렇게 하루가 겨우 8킬로 갔다.
그렇게 겨우 류저우까지 강을 따라 이동했다. 먹을 게 없으니 배를 세울 때마다 정정화와 부인들이 어떻게 해서든 밥을 구해오고 선상 생활을 책임졌다.
* 치장(1939.4)
류저우를 떠나 치장까지 오게 된다. 바로 충칭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충칭은 물가가 너무 비쌌고 중일 전쟁으로 피란민들이 몰려왔던 임시수도였으므로 사람은 많고 집은 없어서 치장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와 임정 요원들이 1년 반을 머물던 거주지였던 치장은 교통의 요지이자 비옥한 땅이었다.
* 충칭(1940.9-19455, 5년간)
먼저 충칭에 들어간 김구 선생님이었다. 이곳 충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성기이자 마지막이었다.
무더웠을 중국 남부 여름날 임시정부 요원들은 버스 6대로 류저우에서 충칭을 이동한다. 어린아이들도 함께 불편한 환경 속에서 이동했는데 약 500kg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무게의 금속 활자를 싣고 약 8년간의 이동생활을 했다. 금속활자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켰던 지킨 이유는 금속활자들이 활자가 있어야 임시정부의 역사를 쓸 수 있고 조국 광복을 위해 기록물을 제작하기 위한 신문도 발행 역사책 제작에 중요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토교 한인촌>
충칭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갔으나 집값이 너무 비싸고 살기 힘들어 15km 떨어진 곳에 토교 한인촌에 살았다. 이곳은 현재 사유지이다.
여전히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모두가 가족처럼 지내며 마음만은 풍족했다. 텃밭에 여러 작물을 길러 함께 나눠먹기도 했다. 평화로웠기에 더욱 떠올랐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1919년 상해부터 1940년 충칭까지 임시정부가 활동해 온 27년 동안 하루도 편히 잘 수 없었던 독립투사들의 작은 천국 같았던 토교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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