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8화]
근 현대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 백범 김구 선생으로 여운형 선생과 더불어 죽음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김구 선생은 죽음이 벗과 같았다고 말할 정도였고 백범일지를 집필하게 된 계기도 서두를 보면 잘 드러나 있다.
<인.신 두 어린 아들에게>
......
내 나이는 벌써 쉰 셋이건마는
너희는 이제 열살 일곱 살 밖에 안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면 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써두려는 것이다.
-1929년 5월 3일 백범일지 서문 중
김구의 유서나 다름없는 <백범일지>는 상. 하권으로 이루어졌고 상권은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얘기하듯 써놓았다. 김구는 체격이 크고 우량아로 태어났는데 권낙연 여사가 산통을 일주일이나 했다고 한다. 또한 김구의 어린 시절 개구쟁이 모습이 솔직히 쓰여 있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선생은 가난한 평민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어느 날 갓을 쓰고 나간 집안 어른이 양반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왜 갓을 쓰면 안 되는지를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과거 급제하면 갓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과거 시험을 보러 시험장을 찾았는데 부정부패가 만연한 시험장을 보고 좌절한 김구는 관상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관상을 공부하게 되는데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로 관상을 공부하던 김구 선생은 충격을 받는다. 관상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상책의 한 구절에 다시 힘을 얻게 된다.
관상책 한 구절
좋은 얼굴은 좋은 몸만 못하고
좋은 몸은 좋은 마음만 못하다
이에 김구 선생은 마음씨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그후 최초의 종교 동학 민족종교에 입교한다.
페니실린 사건
충칭에서 지내던 시절인데 당시 많은 사람이 폐병을 앓았고 김구 첫째 아들 김인 여기 피할 수 없었던 폐렴을 앓고 있었는데 그를 살리기 위해 항생제 페니실린을 구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수급이 어렵고 비쌌던 항생제를 구하기 위해 김구에게 부탁을 했으나 김구는 독립운동하는 이들에게도 못 구해줬는데 내 아들에게 국고를 낭비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인은 그렇게 광복 다섯 달 전에 27세에 눈을 감는다.
치하포 사건
1895년 을미사변 일어난 후 황해도 치하포 나루터 주막에서 잠시 머물던 김구 선생은 일본인 쓰시다 발견하고 내가 저놈을 쳐서 원수를 갚아야겠다 하고 처단을 한다. 도망은커녕 필기구를 가져오라고 한다. 김구는 포고문을 붙이고 포고문 때문인지 3개월 후 잡히게 되고 5월에 해주옥에 갇히게 된다. 재판을 받기 위해 인천 재판장에서 살인죄로 피소된 김구가 일본 경찰을 꾸짖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조선 관리에게도 말한다.
지금 당신들은 국모상이라고 흰 갓을 쓰고 있는데 나라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흰 갓도 쓰지 아니한다는 구절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 하는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이 말을 들은 관료들의 대우가 그때부터 달라진다. 일반 시민과 다른 죄수들도 김구 선생을 존경하게 된 계기가 된다. 온 나라가 분노에 가득 찬 시기에 당시에 통쾌한 상황이었고 사형선고를 받은 김구 선생이었으나 당시 사형 집행에는 고종의 허가가 필요했는데 죄명이 국모 보수 '국모가 당한 만큼 되갚아야겠다'였고 이에 사형 집행을 간발의 차로 중지시킨다.
강화도 조약 때 태어나 광복까지 김구 선생이 행복했던 시절이 얼마나 됐을까? 한 2년 남짓이었을 것이다. 연경방 10호 백범일지에 이곳 생활 내용이 딱 한 줄로 나온다.
새로 태어난 아이(첫째 김신)를 축복하며 행복한 생활을 했던 곳이다.
<영경방 10호>
당시 상해 최고 빈민가였던 동네에 있던 <영경방 10호>는 1922-1926년까지 김구 선생 가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현재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2층의 식당 자리가 영경방 6~10호가 있던 공간이다. 김구 선생이 살던 시절 이곳은 상해에서 최고 빈민가였으나 현재는 제일 비싼 동네가 되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4년 김구 선생의 아내 최준례 여사가 아기 낳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결국 돌아가신다. 1년여 투병생활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어렵고 힘들었던 그 당시 아들 김신을 고아원에 보냈다가 다시 시어머니가 데리고 오고를 반복했다고 한다.
김구 로드
→상해 영경방 10호 (가족 집)
→피치 목사 집 피신 (윤봉길 의사 폭탄 의거로 인해)
→자싱 이동
→자싱 피난처 <매만가 76호>
1932년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전승기념행사 및 일왕 생일 축하연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로 일제에 큰 피해를 주게 되고 그 후로 1940년까지 8년 동안 이동하게 된다. 상해에서 신룽화역->자싱역의 이동이 8년간의 이동경로의 시작이 된다. 현재 신룽화역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상해남역이 생겼다.
윤봉길 의사에게 의거를 명령한 김구 선생은 그 시각 무엇을 했을까?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안창호 선생도 모르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안창호 선생님을 피신시키려 했다. 성공 실패 상관없이 일본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탄압할 텐데 가장 대부는 안창호 선생님이니 찾아갔으나 집에 없었다. 전달을 부탁하고 오늘 오전 10시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큰일이 일어날 것이니 라는 쪽지를 남긴 뒤 의거 결과를 기다리는데
술렁이는 사람들을 보고 정정화라는 요인에게 부탁해서 신문을 봤는데 한 중국인 청년이 폭탄을 던져 일본 주요 인사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는 내용의 오보여서 나중에 정정된다. 의거 성공을 확인 한 김구는 미국인 피치 목사의 집에 피신을 했다. 일본은 누가 배후인지 모르니 임정 요원을 마구잡이로 아무나 체포하기 시작한다. 동료들의 체포 소식에 자신이 명령자임을 말하겠다고 중국 신문사와 로이터 통신에게 제보하고 당당히 정체를 밝힌다.
이에 일제는 현상금을 걸었는 현재 한화 약 355억 원이었다.
안창호 선생님 체포된다. 또한 많은 임정요인들과 한인들이 검거되어 상해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YMCA 피치 목사의 근무지-> 피치 목사 자택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이 같이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니 김구 선생은 이동 동선을 달리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항저우, 김구와 일부 임정 요인들은 자싱으로 향한다.
김구 선생과 일행을 자신의 집에 숨겨줬으나 급기야 일본인들이 그곳까지 찾아온다. 자신은 운전기사인 척하고 자신의 아내와 김구를 백인으로 분장한 후 부부인 것처럼 위장시켜 위협을 무릅쓰고 도와줬다. 현상금의 유혹 앞에서도 꿋꿋이 소신을 지킨 분이다.
일본인들이 피치 목사 집까지 찾아오자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김구는 중국 정부에 도움을 청하고 중국 국민당 정부 주푸청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양아들 진동생의 자택이 있는 자싱으로 후원을 했다.
김구 선생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도움을 준 사람이 주푸청이다. 당시 김구 선생의 현상금만 약 355억이었고 이완용은 30억에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그 10배에 달했던 김구 선생의 현상금 유혹과 본인의 안전까지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김구 선생을 도와줬던 인물이다.
자싱 김구 피난처 <매만가 76호>
주푸청의 양아들 진동생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려고 폐공장에 은신해 있다가 매만가 76호로 옮겼다.
1935년 임시정부가 시련에 닥쳤던 시절 육지는 위험하니 배 위에서 국무회의를 개최를 하기도 했다.
여기도 밀정이 깔려서 새로운 은신처인 남쪽의 남북호로 거처를 옮긴다. 이번엔 주푸청의 며느리가 부인인 척 연기하며 산을 올랐다. 소풍 가는 것처럼 보이려고 산후조리도 못하고 구두 신고 땀 뻘뻘 흘려가며 올랐다고 한다. 용감함과 친절을 베풀며 온 가족이 김구를 지켜줬기에 아직도 대를 이어서 계속 감사함을 표하며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1920년은 임시정부의 암흑기로 너무 궁핍한 삶을 살다 보니 국내. 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보내준 동포들의 독립자금으로 윤봉길 의사 의거의 원동력이 되었고 임시정부가 다시 살아난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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