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성병원 옆에 생뚱맞게 오래된 건물이 있다. 이곳은 김구 선생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소이다.
서울 경교장
위치 : 지금의 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강북삼성병원(구 고려병원) 자리에 위치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의 숙소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다. 일제강점기 부호 최창학의 주택으로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23일~1949년 6월 26일 서거할 때까지 3년 7개월 동안 머물렀다.
경교장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반탁운동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는 등 해방 후 혼란한 정국을 수습했다. 백범 선생의 죽음 이후 외국 대사관전, 미군 시설,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1,2층과 지하실 전시관으로 복원해 놓았다.
김구 선생님이 서거하신 곳 경교장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며 소련군은 이미 들어와 있고 광복 한 달 만에 미군이 밀고 들어온다.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에 의해 한반도를 나눈다. 김구 선생님은 임시정부의 주석 자격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미 군정이 한반도나 국외에 있는 그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김구 선생이 귀국하면 임시정부 자체가 부정 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석의 직책을 내려놓고 철저히 개인 민간인 신분으로 국내로 들어왔다.
그렇게 3개월 만에 귀국 후 국내에서 머무를 장소가 필요해 그 당시 금광 개발로 돈을 벌었던 최창학이 개인 소유의 건물을 헌납하면서 김구 선생님이 머물게 된 곳이 경교장이다. 집 근처 다리 '경구교' 근처에 있는 건물이라고 해서 경교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바로 경교장이다. 1947년 7월 한달만 하더라 테러사건이 128건 사망자만 36명이었다. 그야말로 암살과 혼돈의 시대였다. 김구의 암살은 경교장에서 일어났다.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선생은 평소와 같이 창가에 앉아 있고 김구 선생님은 평상시에 드나들던 당시 32세의 현역 육군 군인 안두희에 4발의 총을 맞고 암살당한다.
전적으로 개인의 행동이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런 강한부정이 교사에 의한 청부살인으로 의심이 된다.
김구 선생님의 죽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이었다.
1949년 초부터 수차례 김구 암살 시도가 있었다. 안두휘는 김구에게 접근할 여러가지 방법을 찾았고 당시 군인은 정당에 가입할수 없었다. 김구가 이끄는 한국 독립당에 가입하기 위해 비밀당원증을 발급을 요청해 발급해줬고 김구를 따르겠다는 모습을 보이게 위해 포탄 화병을 선물하고 백범에게 윤봉길, 이봉창이 의거에 나 갈때 썼던 휘호를 받았다. 그런 사람이 김구를 죽인 것이다.
안두희는 워낙 북한을 싫어해서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에 가입해서 총무부장으로 활동했고 좌우합작세력을 적대시하며 통일정부 수립론자들을 박멸의 대상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안두희는 김구를 여러 번 암살시도를 했었다.
어느 날 김구의 집을 찾아갔고 기르고 있는 개가 사납게 짖어대는 바람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암살에 실패했고 두번째 시도는 충남공주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참석하려는 김구를 따라가 암살시도를 할 계획이었으나 강연이 취소되어 실패 수차례 김구 암살을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하게 된다. 계속 기회를 엿보던 안두희는 6번정도 김구와의 만남을 가졌고 김구를 또 찾아가게 되고 마침내 암살에 성공한다.
6월 26일 오전 11시 안두희는 경교장 근처의 자연장 다방에 들렀다. 차를 마시면서 준비해간 미제 42구경 권총을 정비하고 약 20분간 암살 계획을 정리하고 오전 11시 30분 경교장 1층 대기실에서 김구의 비서들을 만나고 원래 김구 선생은 일요일날 교회를 가는데 이 날 누가 김구 선생을 차를 빌려가서 집에 있었고 마침 찾아온 지인과 시간을 보내던 김구를 안두희는 태연하게 대기실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서들이 지하 식당으로 내려간 사이 안두희는 윗층으로 올라갔다.
안두희가 앉아있던 김구를 저격한다. 네발을 쐈는데 불행하게도 네 발 모두 정확하게 김구선생 급소에 맞았다. 그 후에 불과 5분도 되지 않아 헌병대가 왔고 그들이 한 첫 말은 경찰에게 맞고 있는 안두희를 보고 "누가 군인을 때려!" 였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동안 안두희에게 호텔급 편의를 제공했다. 술, 담배, 신문, 편지, 면회 허용 등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안두희에 대한 재판은 1948년 8월 4일~6일까지 삼심 재판이 아닌 단심으로 사흘 만에 끝이 났다. 또한 안두희의 증언만 남아 있고 수사, 기소, 재판에 대한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1948년 8월 6일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지만 불과 3달 뒤에 15년형으로 감형이 되었고 1950년 3월에는 10년형으로 감형받았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되어 형무소 수감자 중에서 15년 이상형을 받은 사람들은 한국정부가 처형을 했지만 그러나 이 과정에 안두희는 참모총장 지시로 형집행정지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바로 현역으로 복귀되었고 1951년 2월 남은 형기마저 면제되었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집행면제 이전에 이미 대위로 진급(1949년)이 되어있었다.
김구 선생의 죽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장으로 경교장에서 치렀는데 약 120만 명이 조문했다.
안두희는 제대후에도 군납품일을 하며 2000평이 넘는 대지를 하지고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일은 1949년 6월이었다. 그러나 첫번째 추도식은 11년 후 이승만 정권이 끝난 뒤에 치러졌다.
안두희는 왜 김구 선생님을 암살했나?
1993년에 국회 백범 암살 진상 조사소 위원회에 따르면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배후 세력이 있다'라고 기록했다.
김구를 죽인 이유는 백범 김구는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이지만 반공주의자이기도 해서 북한과의 사이가 좋지가 않았다. 그러나 1948년 UN이 남한만 총선거를 결정하자 북한으로 가서 남북협상을 시도하며 남한만 총선거를 막으려 했던 것이 우익 청년들에게 거센 반발을 부른다. 그들에게 친북한, 친공산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그러나 배후세력에 대해선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후에 안두휘를 응징하기 위해서 곽태영을 비롯해 권중희, 노성구 등 많은 이들이 납치 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 이후 수많은 사람의 타깃이 되었고 평생 숨어 살았고 끝내 피살되었다.
안두희의 죽음
민족의 지도자를 죽인 사람이 활보하며 잘먹고 사니 모든 국민의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어 수차례 테러를 당하게 된다. 그 중에 권중희라는 사람이 안두희를 여관방에 강금하고 박달나무로 때리고 고문했다. 그리고 배후에 대해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고문 때문에 말한것이라고 번복한다.
그 이후로도 1992년 한 해 동안 5~6번에 걸쳐 방송에 나와 증언했다 번복했다를 반복한다. 이후에 버스 운전기사인 박기서 씨가 안두희의 동거녀가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아파트 안으로 밀고 들어가 홍두깨로 머리를 가격해 살해했다.
그 후 박기서 씨를 위해 9200명의 국민들이 탄원서에 서명했고 이에 박기서 씨는 복역 1년 4개월 만에 3.1절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지하 전시실에는
암살 당시 입었던 옷이 재현되어 있다.
지금의 경교장은 복원된 후 시민들에게 개방이 되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장소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주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복원을 했다.
[선녀들 리턴즈 3회 /선마27회,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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