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전쟁
7년 전쟁이 길어지면서 막대한 돈이 소비되고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자국민들에게 세금을 걷는 것은 부담이 되자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에게 세금을 걷게 되고 예상치 못한 세금전쟁이 일어난다.
영국 설탕법(Sugar Act 1764)
영국은 식민지에 보급되는 설탕, 커피, 포도주 등에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하고 백설탕 100g 당 20만원 정도의 세금을 부과시키고 1765년 인지세법을 통과시키면서 식민지에서 발행하는 모든 출판물에 세금을 부과시킨다. 심지어 인지세 중 가장 비싼 것은 변호사 자격증에 세금을 부여했는데 요즘 가치로 약 400만원 이상이었다.
타운센드법
본국의 불합리한 행동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식민지인들은 세금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 운동이 발생한다. 이에 놀란 영국은 세법을 폐기하지만 여전히 돈이 필요했던 영국은 또 다른 세법을 통과시킨다. 그것이 타운센드법으로 일상생활 물품에 세금을 붙인 것이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스스로 선출한 대표자를 영국 의회에 보내지 못하는데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하자 영국과 식민지의 갈등이 고조되고 결국 식민지인들을 폭발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보스턴 차 사건의 배경
보스턴은 뉴 잉글랜드 식민지 정부에서 다방면으로 중심지 역할을 한 곳으로 미국 독립의 발상지라고 칭한다. 타운센드 법이 제정된 후 식민지에서는 지나친 과세에 대응하여 영국 제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이에 영국은 반발이 커질 것을 염려해 차를 제외한 다른 품목의 관세를 철회한다.
그러나 문제는 영국 본토에 있는 동인도 회사의 경영 부실 문제로 인해 저렴한 찻값에 차를 팔기 시작하면서 동인도 회사의 저렴한 찻값에 밀려 많은 회사가 파산하게 되고 상인들의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결국 영국 차 불매 운동이 일어나고 차를 실은 영국 배의 하선을 거부하게 되고 340개 정도의 차를 바다로 버렸던 식민지인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1773년 발생한 보스턴 차 사건으로 영국은 이에 차 강제법을 통과시키면서 보스턴 항구를 봉쇄한다.
1차대륙회의 개최
이것은 법적으로 보스턴을 다른 식민지로부터 고립시킨 것이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자신의 자유도 박탈당할수 있다고 생각해 강제법을 참을 수 없는 법이라고 부르고 1774년 9월 식민지 협의회를 통해 선출된 13개의 식민지 대표 55인을 소집한 제 1차 대륙회의를 개최한다.
건국의 아버지
이 회의의 대표자들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미국 독립 전쟁과 관련된 초기 다섯 명의 대통령들을 포함해 독립 선언에 참여한 정치인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들은 회의에 참석해 영국 의회는 식민지의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고 하며 영국 왕은 강제법을 철회해 달라 요청하지만 영국 의회는 더욱 강하게 대응해 보스턴을 포함한 전체를 반란세력으로 간주 다른 나라와의 무역도 전면 금지시킨다.
독립전쟁의 시작
심지어 이들의 주업인 북대서양 어업권도 박탈한다. 버티다 못한 식민지인들의 선택은 독립 전쟁을 선택하게 된다. 1774년 10월 미국 식민지인들은 전쟁 준비에 착수하고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콩코드에 집결해 급진 독립파들이 주도해 재산, 생명,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기로 약속한다.
미니트맨
그렇게 탄생한 것이 미니트맨 (=민병대)를 만든다. 영국군에 비해 경험이 부족한 민간인으로 조직된 미니트맨이다.
렉싱턴 & 콩코드 전투
이에 영국군은 이를 반란으로규정하고 약 700명의 영국군이 콩코드로 진격하게 되고 이것이 미국 독립전쟁의 서막을 여는 렉싱턴 & 콩코드 전투가 시작된다.
영국군의 목적지는 민병대의 화약 창고가 있는 콩코드로 약 40km 였다. 보스턴에서 출발한 영국군 700명은 의기양양하게 진군했지만 우연히 렉싱턴에서 충돌한 민병대원 약 77명 VS 영국군 700명이 전투를 하게 되고 독립전쟁의 포문을 여는 한 발의 총성으로 인해 전투가 시작되고 민병대원 약 8명이 사망하고 영국군이 승리한다.
이렇게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로 간다. 영국군에 전투 방식은 일렬로 서서 총을 쏘는 전투 방식이었고 민병대의 장점은 지형지물에 밝았다. 민병대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 숨어서 영국군을 기습했고 민병대의 게릴라전은 효과가 있었고 영국군은 전투를 이어 갈 이유가 없어져 보스턴으로 철수를 결정한다.
그러나 철수하는 중 영국군을 끈질기게 공격했던 민병대는 영국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다. 이 전투에서 민병대 사망자 약 49명 부상자는 약 39명이었고 영국군은 73명 부상자는 약 174명이었다.
제2차 대륙회의 개최
렉싱턴 & 콩코드 전투 이후 독립 의지가 더욱 차올랐고 앞으로 영국과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미국인들은 1775년 제 2차 대륙회의를 개최한다. 13개 주 대표들이 전쟁에 대비해 필라델피아에 모여 회의를 한다.
조지 워싱턴
이 회의에서 두 가지 안건이 논의되는데 체계적인 독립군 창설과 군대를 지휘할 총사령관을 선발했고 당시 선발되었던 사람이 바로 미국의 영웅 1달러에 세겨진 조지 워싱턴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지 워싱턴은 7년 전쟁 당시 영국대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에 영국군으로 참전했던 사람이다. 그 경험이 득이 되어 미국 독립군 총 사령관으로 선출되고 이후 초대 대통령까지 된 인물이다.
제 2차 대륙회의 이후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드디어 식민지들이 강제법 철회에 대한 답을 보낸다. 타협없는 강력한 대응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식민지인들은 독립전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토마스 페인의 <상식>
그러나 여전히 독립에 대한 의문을 가진 식민지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가 필요했고 이때 토마스 페인의 <상식> 의 저자가 1776년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의 핵심내용은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미국이라는 내용으로 이런 시대에 부응해서 완전한 미국 독립으로 가는 것이 상식이라는 내용이었다. 영국과 타협을 원하는 미국인들이 독립을 고민하고 있을 때 결정적인 논리를 제공한 책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 발표
상식이 발간되고 약 6개월 후인 1776년 7월 4일 미국에서 가장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공식 발표한다.
미국의 독립선언문 내용
미국 독립의 중요한 슬로건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그 중에 핵심은 자유였다. 독립선언문이 가장 중요한 문서인 이유는 13개의 주들이 각각 별도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독립을 선언하기 전에는 13개의 주가 하나의 나라라는 인식이 없던 상황이었다. 독립선언문을 쓰면서 새로운 국가 형태를 만들게 해준 의미 있는 독립선언문이었다.
독립선언문의 비밀
독립 선언문에 행 명 자유 행복의 추구 중 행복은 마지막 순간에 '재산 혹은 자산(property )'이라는 단어에서 수정되었다. 자신의 추구를 넣으면 하층민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어 포괄적인 의미로 행복으로 변경한 것이다. 그러나 내 재산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는 것이 실질적인 자유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독립선언문이 결국 1776년 7월 4일 발표되고 이념과 경제를 포괄했던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만들어졌다.
계속된 소모전투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영국왕의 엄포에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전쟁이 치열해질 것을 예상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군인 지원 모집을 확대하여 3개여단을 구축하게 된다. 영국에서는 1776년 8월 영국은 가장 강력한 함대를 이끌로 뉴욕을 공격한다. 군함 52척 수송선 427척 용병 7천명을 동원, 정예군이 무려 3만 3천명이었다.
이에 조지 워싱턴의 독립군은 쉽게 영국의 손에 들어갔다. 뉴욕을 시작으로 무섭게 진군하는 영국군에 독립군은 수많은 전투에서 난항을 겪는다. 독립전쟁 전체에 일어났던 전투의 횟수는 230번으로 소모전이 컸다.
새러토가 전투
전투가 계속 이어지면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펼쳐진다. 1777년 새러토가 전투이다. 미국 독립전쟁의 운명을 바꾼 전투이다. 뉴욕에서 출발한 영국군은 필라델피아 수도를 먼저 장악했고 몬트리올에 있던 영국군은 독립군에 막혀 합류가 불가했고 영국군의 주력부대는 알바니까지 오지 못하고 새러토가에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때 조지 워싱턴는 승부를 띄운다. 새러토가를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500여 명의 명사수 부대를 따로 창설해 새러토가는 숲 지대로 먼 거리에서 영국군 지휘관들을 저격했고 이에 영국군의 지휘 체계가 무너지게 되었다. 결국 독립군이 승리하게 되고 영국군은 약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독립군 무기
또한 독립군이 사용한 총도 승기를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군의 총은 분당 연사속도가 빨랐으나 유효 사거리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영국군의 총 유효 거리는 약 90M정도였고 독립군의 총 유효 거리는 약 180M에 정확도도 높았다. 영국군은 대열 중심의 전투에서 연사 속도가 중요했고 게릴라 전에 강했던 독립군은 유효거리와 정확도가 중요했다.
게릴라 전에 맞지 않았던 영국군의 총이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독립전쟁의 흐름은 완전히 독립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연합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이 폐하면 좋아할 나라는 프랑스였다. 당시 프랑스의 적은 영국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미국을 돕기로 결정하고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래서 독립군의 가장 중요한 우군이 된 프랑스였다. 프랑스가 미국에 투입한 지원 규모는 무료 약 13억 리브르로 현재 가치 약 7조 6300억 정도였다.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프랑스 대혁명의 직격탄을 맞는 계기가 된다. 대규모 지원을 바닥난 재정은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이어지고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결국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목숨을 잃게 된다.
->프랑스 혁명 원인과 전개 과정 (삼부회-테니스코트선언-바렌(느)사건-로베스피에르 최후)
세라투가 전투 이후 네덜란드와 스페인까지 독립군을 지원하게 되고 미국의 독립으로 이득을 볼거라 예상했기 때문에 자금을 대게 된다.
요크타운 전투
뉴욕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던 영국군은 남쪽의 버지니아로 타깃을 변경하게 되고 요크타운 전투 작전을 개시한다. 이에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전략은 영국의 눈길을 피해 은밀히 내려온 뒤 요크타운을 둘러싸고 진지를 구축했다. 또한 프랑스 해군은 혹시 모를 영국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렇게 요크타운에 갇혀 버린 영국군은 쉴틈 없이 몰아치는 연합군의 공격으로 인해 지원군을 기다리지 못하고 항복을 하게 된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평화협상을 타진한다. 1783년 9월 프랑스 파리에서 드디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강화조약 이 체결된다. 전 세계에 국가로 인정받게 된 미국이다. 후에 미국의 독립을 기념하며 프랑스는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했다.
미국의 탄생(메이플라워호 청교도인 13개주 정착 과정- 하버드,예일대, 추수감사절 유래) [벌거벗은 세계사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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