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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몽양 여운형 이야기 (업적, 암살, 여운형 죽음 의미)

by 365 ^^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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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역사가 왜 이렇게 진행되는지를 알려면 광복이후 그 시작점인 현대사를 알아야 한다. 광복 이후 3년은 혼돈의 시대였다. 해방직후 새로운 국가를 세울 기대에 부풀었지만 소련군과 미군이 주둔하며 정세가 복잡해졌고 집권 세력이 없던 무주공산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도권을 잡기 위한 갈등이 심화되었고 협력보다는 눈앞의 권력을 잡기 위해 라이벌을 제거했던 것이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독립운동가 여운형과 김구이다.  정치계 좌. 우익의 대표인물이다. 여운형은 2005년 2008년 이후 독립운동가로 서훈받으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몽양 여운형은 누구?

여운형은 좌중을 압도하는 명연설과 독보적인 매력으로 김구, 이승만의 유일한 적수로 해방정국이 낳은 정치계 슈퍼스타였다. 해방직후 선구회라는 단체에서 여론조사를 했다. 조선을 이끌어갈 가장 양심적 지도자로 여운형 선생이 1위를 차지했었다. 

 

당시 질문 중 생존 인물 중 가장 혁명적 지도자로도 여운형 선생으로 광복 후 최고의 지지를 받았던 지도자로써 1929년, 1942년 독립운동 중 서대문 형무소에 2차례나 수감됐던 인물이다.

 

 

서대문 형무소와 유관순 열사 이야기(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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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인 여운형

신문사활동과 함께 체육계 활동에도 매진하며 조선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킨 1세대 체육인이자 독립운동가 여운형이다. 

 

1934년 현대철봉운동법이라는 책에 실린 여운형의 모습(좌)  / 광복 후 조선 체육회(현 대한체육회)에 초대 회장을 맡은 여운형 (우)
여운형은 우리나라 1세대 야구선수였다. 1912년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운동부 부장으로 당시 국내 최초 야구단인 황성 YMCA 야구단을 이끈 주장 여운형  
영화 <YMCA 야구단>의 이호창 코치 주인공 실제 모델이 바로 여운형 

 

여운형 업적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파견

여운형 선생은 이른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한 독립운동의 1세대인물이다. 1914년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지속하다가 당시 1차세계대전 이후의 정세를 독립의 기회로 본 여운형은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한다. 이때 김규식이라는 독립운동가를 파리에 파견한다. 이유는 이때 1차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이때 식민지 독립문제가 논의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반도 실상을 알리기 위해 김규식 선생은 파견했던 인물이 여운형 선생이다. 

 

신한청년당 설립

여운형 선생이 신한청년당에서 했던 여러가지 일들이 1919년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191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여운형은 처음부터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다른 이들과 의견 차이가 발생하며 결국 임시 정부를 탈퇴하게 되고 김구 선생은 끝까지 광복까지 임시정부에 남아 활동했다.  

 

 

 

일본에서 독립연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이에 당황한 일본은 독립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여운형에게 공작을 시도한다. 1919년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동경에 간 여운형은 일본의 제국호텔에서 연설을 했다. 일본의 속셈은 여운형 선생의 입을 통해 조선이 해방이 아닌 자치운동을 유도하는 것이였는데 1920년대는 일본의 문화통치 시기로 겉으로는 달래면서 속으로는 민족분열 조장에 힘쓰던 일본이었다.

 

일본 제국호텔에서 독립연설
여운형의 독립연설은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이때 여운형 선생은 자치가 아닌 독립을 외쳤던 것이다. 여운형 선생은 적과도 소통을 했던 능력, 적을 설득해서 내편으로 만들려 노력, 적과도 소통을 하려했던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과의 소통 행동이 친일파라는 오해를 사고 만다. 미군정은 여운형의 일본과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관을 파견하는데 일본사람들이 하나같이 여운형을 조선에서 가장 휼륭한 독립운동가라고 언급한 것이다. 

 

 

↓여운형 선생의 해방 연설 및 광복후 3일간의 일 알아보기 

 

 

광복절 의미 (광복 3일 72시간 무슨 일이 있었나?)

'광복' 빛을 다시 찾다. 빛을 되찾은 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을 선언한 날로 일본은 항복 방송을 한다. 광복 3일 72시간의 기록 8월 15일 오전 일본의 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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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달변가에 당시 인기 1위의 정치인으로써 가장 유력한 지도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많은 이들에 의해 암살의 표적이 되었다. 좌우 양쪽 정치세력은 모두 적이었다. 당시 여운형은 중립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편으로 들어간다면 세력이 확장되는 것이었으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고 좌우 합작 운동을 시작하니 결국 좌우의 반대로 실패했다. 

 

좌우합작위원회 조직한 독립운동가 김규식, 여운형

 

좌우합작위원회 조직한 독립운동가 김규식, 여운형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주석 김규식 (Kim Kyu-sik, vice president of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양반 관리의 자제였던 김규식 선생은 아버지가 부산에서 이뤄진 일제의 불평등한 무역 행위에 이를 지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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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암살 시도

여운형에게 수많은 테러 위협들이 있었고 1947년 7월 한달에만 128건의 테러가 발생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테러를 당한 이가 바로 여운형 선생이었다. 

 

▷1945년 8월 괴한들에 의해 곤봉으로 피습

▷1945년 9월 서울 원사동에서 괴한들에게 밧줄로 묶였으나 행인이 구제

1946년 1월 친구집에서 괴한 5명 습격했으나 때마침 다른 곳에 있어서 위기 모면

▷1946년 4월 서울 반서동에서 괴한들에 포위 행인이 구출

▷1946년 5월 사주에 의한 수류탄 테러 시도 사전에 발각되 무사

▷1946년 7월 산에서 협박, 교살직전까지 갔으나 벼랑에서 낙하하여 도피 

▷1947년 3월 서울 계동 자택 침실이 폭파당했으나 외출 상태여서 무사   

 

▷1947년5월 여운형 테러 중 최초의 총격사건으로 자동차 후미에서 권총 발사했으나 무사 

 

약 1년 반 동안 벌어진 10여 차례의 암살시도가 있었으나 여운형 선생은 항상 의연한 태도로 가족들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킬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독립국가 수립을 위해 힘썼었다.

 

 

 암살 사건이 있던 그날 아침 여운형은 동지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김 선생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 하에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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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선생 죽음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15분경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울린 총성이 울린다. 여운형 선생도 이때가 굉장히 위험한 때라는 것을 직감했던것 같다.  그래서 당시 명륜동 지인의 집에 머물고 있었고 지인 집에서 친한 분과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당시 <독립신문> 주필과 차량에 동승했고 자동차는 혜화동 로타리를 향해 가는 도중 갑자기 파출소 옆에서 트럭이 튀어나와 차량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트럭으로 가로막힌 상태에서 암살범이 뒤에서 저격한다.

 

암살범이 쏜 총알이 복부와 심장을 관통해 결국 차 안에서 숨을 거둔 여운형 선생이다.

여운형 선생 암살 장소인 사건이 발생한 혜화동 로터리의 특징은 사람들이 많고 사회적 공포를 일으킬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를 택함으로써 대중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 당시 입었던 옷을 분석해 보면 선명하게 얼룩진 혈흔의 흑적으로 그날의 처참함을 알 수 있고
왼쪽 가슴ㄱ에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혈흔자국은 왼쪽 가슴의 심장을 조준 사격한것이다. 계획적이고 숙련된 저격의 흔적인 것이다. 

 

 

여운형 암살범

경호원은 암살범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동대문 경찰서의 경찰과 마주친 경호원은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범인을 놓쳐버리게 된다. 사건 당시 운전기사, 지인들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4일 후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였는데 경찰이 범인이 체포되었다고 발표한다. 범인의 정체는 19세의 소년 한지근이었다.  

 

경찰 조사로 밝혀진 한지근의 행적은 여운형 암살 사건 나기 18일 전에 평양에서 서울에 도착했고 18일간 훈련을 받고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주장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런데도 암살범 공판은 세번 재판하고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재판 결과 무기징역이었으나 19세 미성년자이므로 소년원행, 몇 년 뒤 6.25 전쟁이 터지며 사라져버린 한지근이다. 또한 당시 여운형 암살사건을 조사하던 전 주한 미군 대사가 조사 중 미군정 윗선에서 조사 중단을 지시했고  그렇게 조사 중단이 되었다. 그렇게 여운형 암살은 의문점 투정이었다.

 

여운형 장례식

여운형 선생의 장례식은 해방 후 처음올 인민장(지금의 국가장)이 열렸다. 당시 보도에 의하면 대략 60만명이 참석한 것으로 서울 시민은 다왔다고 보면 된다. 이때 운구는 한국 최초의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비롯한 체육인들이 담당했다. 

사진을 보면 여운형 선생의 관은 철로 제작되어 있고 관 안에는 방부제를 넣어 30년 동안 썩지 않게 했는데 이는 통일이 되면 정식 장례를 치르려는 뜻이었다.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손기정 선수의 설움 속에 그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던 일장기 말소 사건 뒤에는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이 있었다.

 

 

 

이때 정치계의 좌우익 인사가 전부 참석해 조문의 뜻을 표하는 글을 낭독했다. 당시 장례식에 참여했던 미군정 중위 레너드 버치의 조사(조의를 표하는 글)를 썻다. 그렇게 한장을 빼곡히 한국어를 영어로 표기한 대본을 만들어 낭독했다.

 

 

 

또 다른 미군정 인사 리처드 로빈슨은 본국으로 돌아가 <미국의 배반>이라는 책을 썼는데 서문에 여운형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기록했으며 그는 위대한 진보적 민주주의로 좌익과 우익의 전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기록했다.

 

그 만큼 여운형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여운형 선생 죽음 의미

중도좌파 여운형의 사망 후 가장 큰 문제는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사람이 없었다. 이 시점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되었던 시기로 여운형의 죽움으로 미.소 공동위원회는 완전히 결렬된다.  그리고 1947년 9월 17일 UN으로 한반도 문제가 이관되었다.  통일되면 미군정, 소련과 두루 잘 지내야 하는 인물이 필요했는데 여운형 단일 한사람이었고 그가 사망하니 대화를 통한 좌우 화합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여운형 선생의 사망이후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을 위해 분투했던 또 다른 지도자 김구선생이 활약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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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들 마스터 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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