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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서대문 형무소와 유관순 열사 이야기(28)

by 365 ^^ 2020. 8. 17.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8회]

 

오늘의 탐사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주제: 서대문 형무소 역사와 유관순 열사 

출연자: 설민석 

 

 

 

서대문 형무소 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식민지 근대 감옥 1905년 을사 늑약 체결 이후 일본의 감옥 제도가 전국에 도입되기 시작 
 
서대문 형무소는 경성감옥으로 시작해 서울 구치소로 사용돼었던 공간이다.

 

1908년 경성 감옥으로 신축

1912년 서대문 감옥
1923년 서대문 형무소로 변경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늘어나자 그들을 수감하기 위해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면서 처음보다 6배 이상 규모가 확대 된 형무소가 된다. 

 

당시 약 16,500여 평에 달했던 형무소 면적 
현재는 대부분 철거된 서대문 형무소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하기 위해 설립한 전국의 17개 형무소들 (소년 형무소 3개 포함)

 

독립 운동가의 감옥 생활 

 

독립 운동가의 신상조사

감옥이 들어오면 전신 노출된 상태에서 몸에 있는 작은 점 및 주량까지도 기록해 놨다. 

 

전신이 노출된 인상표, 주량까지 파악

 

신체 조사가 끝난 후에 지급되었던 수인복 한 벌로 사계절을 보내야 했던 수감자들은 겨울에는 살을 파고들었던 감옥의 추위를 이겨내야 했고 여름에는 참기 힘든 악취와 더위를 견뎌야 했다.

 

수인복

 

미결수 복장(청색)은 형 확정 이전의 대기자

기결수 복장(적색)은 형이 확정된 사람

병자는 흰색 수인복

 

틀밥(수감자의 밥을 푸던 틀)

수감자는 1~9등급으로 분류 독립운동가는 주로 4~5등급 이하였다. 숫자가 클수록 밥의 양이 작았다. 

 

바닥에 등급별 받침을 깔아 수감자 등급별로 밥의 양이 달랐다.

밥의 양보다 심각한 문제는 콩과 좁쌀로 된 조악한 밥으로 영양 불균형이 심각했었다. 고문받다가 사망한 사람도 많았으나 영양부족과 질병에 의한 사망자도 많았다.

 

수감자 스케줄 

아침 8:00~6시까지 노동에 동원 되었던 수감들이었으나 독립 운동가들은 그것도 제공되지 않았다. 독립 운동가들이 모일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독립운동가들은 하루종일 움직이지도 못하고 정자세로 하루종일 앉아만 있어야 했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의 [옥중에서 어머니께 쓴 편지]

 

 

용수 

 

수감자 이송 때 일반인에게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노출 시키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 씌웠던 용수 

2008년에 발굴된 용수
 

지하 감옥 

 

물 고문

물 고문으로 페에 물이 찬 채 고통스럽게 죽어간 독립운동가들

 

 

손톱찌르기 고문

 

고문 받다가 죽은 사람들은 시구문으로 내보냈다.

 

 

 

유관순 이야기 

 

 

17세 소녀 이야기  
  
1902년 12월 16일 천안 태생으로 8살이 되던 해 1910년 일제에 조국을 빼앗긴다. 자아가 형성되고 세상에 눈을 뜰 나이에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유관순이었다. 1916년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하게되고 유관순 열사는 신 학문을 공부하게 되는데 여성의 몸으로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밝힌 여성들이 너무 많았다. 유관순은 입버릇처럼 "난 잔다르크 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거야 " 라고 말했고 
 
이런 말을 수시로 했다고 한다. 

 

삼일 운동 전에도 유관순 열사는 미리 알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화학당 내 비밀결사 '이문회' 선배들을 통해 3.1 운동 계획을 감지하고 5인조 결사대를 조직하고 3월1일 만세 시위대에 합류해 목이 터져라 만세 시위를 했다.  
이화 학당 학생들과 함께 유관순 열사도 붙잡혀 갔는데 소식을 들은 이화 학당 선생님이 미성년자인데 당장 우리 학생들을 풀어줘라 외국인들의 강경한 요구에 학생들은 풀려났고 이화 학당은 휴교 상태가 된다.
많은 학생이 3.1 운동을 확대 시키기 위해 고향으로 향했는데 유관순 열사의 고향은 천안군 병천면이다. 병천은 우리말로 '아우내' 
 
4월1일 아우내 만세운동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기미 독립 선언서도 나눠주고 사람들을 설득해 4월1일에 만세운동을 하기로 약속하고 거사 전날, 서로 확인을 위해 마을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기로 하고 준비를 마친 유관순은 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는데 그 순간 동서남북에서 횃불이 올랐고 4.1일 만세 운동이 시작됐다.  
 
그러나 평화시위에 일본 군경들이 총을 쏘고 검을 휘두르며 무차별 탄압을 했다. 시위에 함께했던 유관순의 부모님 아버지는 평화적인 시위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 항거했고 일본 헌병의 총검에 죽임을 당한다. 이를 본 유관순의 어머니인 '이소제'가  다시 항거 하시다 어머니 마저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는데 유관순 열사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이 시위에서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한다.
 
유관순 열사는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공주 감옥에 수감된다. 그런데 공주 감옥에서 오빠 유우석을 만나게 된다. 

 

 

그때 유관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국을 위해 남은 인생을 조국 도립에 바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공주 교소도에서 실제 서대문 교도소로 이감된다. 
실제 유관순 열사가 있었던 감옥 방 8호 감방

 

 
8호 감방 독립 운동가 동지들 .
 
이들과 함께 유관순은 
 
1920년 옥중 만세운동을 벌인다.
 
제 2의 3.1운동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관순 열사에게 모진 고문을 하지만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던 유관순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설이다.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다.
 
원형 감옥 구조 
감시하기 편하게 방사형으로 설계된 구조

 

1919년 3.1운동으로 갑자기 수감자들이 늘어나 1920년대 초에 새로 지은 옥사이다. 

 

 

 

수감자 감시와 통제를 쉽게 하려고 원형 감옥 구조로 만들었다. 복도 천장에 채광창을 내어 수감자들이 잘 보이도록 했다. 

 

 

서대문 형무소 수감자들

 

안창호

→ 몽양 여운형 이야기 (업적, 암살, 여운형 죽음 의미)

몽양 여운형 투옥당시 모습

 

 

수형 기록카드 

 

수형 기록카드는 국가 유공자로서 서훈 받지 못한 분들을 찾게 해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201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다.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담긴 6200여 장의 수형기록카드 
  민족 저항실 /독립을 위해 힘쓴 애국지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곳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홈페이지 https://sphh.sscmc.or.kr/ 

 

관람 방법 

여름철(3월~10월): 09:30~18:00
겨울철(11월~2월): 09:30~17:00
입장 마감은 관람 종료 30분 전

(1월 1일, 설ㆍ추석 당일 휴관)

월요일 휴무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익일 휴관)

 

개인 관람 예약 https://sphh.sscmc.or.kr/reservation/visit.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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