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쩐의 전쟁
냉전 시대 이전 상황과 시작 (철의 장막, 마셜플랜, 베를린 봉쇄)
냉전 시대의 새로운 국면 전환
2. 스파이 전쟁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한다. 그전까지는 미국만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었으나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냉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분석하기로는 소련의 과학기술 수준과 여러가지 상황을 놓고 봤을 때 소련의 핵 개발이 십년을 넘게 걸릴 것이라고 예상을 했으나 4 년만에 핵 개발에 성공을 한다.
소련의 핵 개발 기간이 절반으로 단축된 것은 바로 스파이 때문이었다. 1940년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비밀리에 진행했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하튼 프로젝트로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이 모여 원자폭탄을 연구했고 당시 부통령도 모를 정도의 철저한 보안 속에 마침내 원자폭탄 개발에 미국이 성공한다.
이 시기는 수많은 스파이가 활약한던 시기이기도 하다. 미국,소련,유럽의 스파이들이 정보를 빼내기 위해 암투를 벌이면서 서로 체제간 불신으로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시기였다. 스파이들이 실제로 사용하던 물품이 경매에 등장했는데 마치 007 영화에나 나올법한 담뱃갑 안에 설치된 초소형 카메라, 도청 장치가 들어 있는 재떨이 등의 물품이 실제로 스파이 활동에 사용되었다.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물건들
냉전의 반대말 열전
냉전의 반대말은 열전 뜨거운 전쟁이라는 뜻으로 제 1,2차 세계대전처럼 직접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열전이다. 그러나 냉전은 전쟁 없는 무한 대립의 상태로 미국과 소련 유럽 입장에서 보면 냉전일지 모르지만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3. 대리 전쟁
한국전쟁
냉전 시대 최초의 열전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하늘에서는 전투기들이 폭격을 하고 지상에서는 소련이 북한에 제공한 242 대의 탱크들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전면 침공했다. 이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북한의 남침 은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하는 것이니 우리는 이 도전에 전면 대응해야 한다는 발표하며 16개국의 유엔군이 참전하고 결국 한반도 분단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전쟁이 끝나게 되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한반도에서 그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게 되며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고 중국의 국공내전, 아랍 이스라엘 전쟁등에 미국과 소련이 전쟁에 계속 개입하면서 전쟁이 커지게 되고 두 나라의 이념 차이에 따른 대결이 전세계에 영향을 미쳐 곳곳에서 열전이 일어나고 전쟁의 비극은 점점 확산되어 갔다.
4. 핵 개발 전쟁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
이렇게 두 나라의 계속된 대립으로 다시 한번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극심한 불안감과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소련이 핵 실험에 성공한지 반년도 되지 않아 1951년 1월 31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핵무기보다 훨씬 강력한 수소폭탄을 개발할 것이라는 내용이었고 2년 뒤에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보다 700배 더 강한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수소폭탄의 위력
태평양 작은 섬에서 실험을 진행하였고 수소 폭탄을 떨어뜨린 뒤 섬이 어떻게 변화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구멍이 생겼고 한개의 섬이 날아갈정도로 어마어마했던 위력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소련의 건식 수소폭탄 개발
이 소식을 들은 소련도 이에 질세라 1년뒤 1953년 8월 12일 세계 최초 실용화가 가능한 건식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미국의 건식 수소폭탄 캐슬 브라보
이에 미국이 개발한 건식 수소폭탄 캐슬 브라보이다. 이 폭탄의 위력은 미국의 핵 실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약 15Mt으로 히로시마 폭탄의 약 1000배의 위력이다. 히로시마 폭탄 1000발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과 비슷한 위력인 것이다.
엄청난 폭발로 비밀이었던 실험 의도와 달리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폭발 후 폭발 반경 약 160km 내에 있는 사람들이 피폭 증세를 보였고 지구 반대편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2019년 기준 캐슬 브라보를 포함한 핵 실험 후 60년이 지났지만 핵 실험이 벌어졌던 마셜제도는 후쿠시마보다 약 1000배가 넘는 방사능이 분포하고 있다. 핵 실험이 끝났지만 그 고통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5. 우주 전쟁
소련 인류 역사상 최초 인공위성 개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공위성에서 보내는 소리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고 전 세계 라디오에 스푸트니크 1호의 신호음이 울려퍼지면서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다는 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인공위성은 거의 동일한 로켓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폭탄을 떨어뜨리려면 폭탄을 싣고 날아올라서 장거리를 비행해서 폭탄을 떨어뜨려야 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장거리 폭격기가 없어도 폭탄을 날릴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된 소련이었던 것이다.
우주 발사체 기술을 핵무기에 적용한다면 공군력의 우위는 아무 소용이 없어진 것이다. 한 순간에 뒤바뀐 미국과 소련의 우위였다. 이에 엄청난 위기감을 갖게 된 미국이었다. 소련은 멈추지 않고 스푸트니크 1호에 이어 2호 발사에도 성공한다.
후에 소련은 생명체의 우주생존력과 적응 여부를 조사하면서 사람을 우주에 쏘아 올렸을때 안전을 확보할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 우주로 동물하나를 태워 올려보낸다.
온순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선택된 유기견이었던 라이카는 모스크바 항공 의학 연구소에서 우주견 훈련을 받는다. 몇 개월의 훈련 끝에 우주선에 실리고 1957년 11월 3일 우주로 올라가게 된다. 당시 우주기술은 편도만 가능했기때문에 우주에 올라간 몇 시간 뒤 온도 조절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와 뜨거운 열기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어간 라이카였다.
이 실험을 통해 지구 생명체가 지구 궤도에 진입하는 과정과 무중력 상태에서 얼마만큼 견딜 수 있나를 확인하게 되었다.
미국 NASA
소련의 우주 개발에 조급해진 미국은 우위를 되찾기 위해 ‘NASA’ 를 만들고 소련의 인공위성에 자극받은 미국 또한 우주 개발에 매진한다.
미국은 우주 개발에 박차를 가해 통신 위성을 개발한다. 1958년 1월 31일 익스플로어 1호 발사를 계기로 세계는 더 치열한 위성 개발 경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인류 최초 인간을 달에 보낸 아폴로 11호
미국이 완벽한 우위를 위해 인류 최초로 달에 사람을 착륙시킨다. 시행착오를 거치고 드디어 1969년 7월 20일 세계 최초아폴로 11호에 태워 인간을 달에 보낸다. 마침내 소련을 제치고 첫 번째로 인간을 달에 보낸 미국이었다.
우주를 장악하고 점령해야 상대방 나라에 무시무시한 핵무기공격이 가능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미사일로 공격받을 수 있다는 공포로 전 세계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소련의 황제 폭탄 차르봄바 위력
인류 전체의 멸망을 초래할 만한 또 다른 사건 1961년 10월 30일 오전 11시 33분 소련의 노바야제믈랴 제도 북극과 가까운 곳에서 수소폭탄 차르봄바가 폭발한다. 소련의 이 수소폭탄은 핀란드까지 위력이 미친다. 핵실험 장소였던 노바야제믈랴 섬과 핀란드의 거리는 1000km 떨어졌는데 핀란드의 건물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만약 서울 한복판에 이 폭탄이 떨어진다면 서울은 녹아 없어질 것이고 엄청난 열기 때문에 반경 약 100km 세종시에 사는 사람들까지 피부가 다 벗겨지는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위력이다. 한반도 최북단에서 차르봄바가 터지면 최남단에서도 버섯구름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히로시마 폭격 이후 16년 만에 차르봄바가 개발된 거면 엄청난 성장 속도를 보이고 있다. 차르봄바의 위력은 실험을 한 소련조차 경악했다고 한다. 지구가 흔들릴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다보니 이런식으로 핵 개발전쟁을 이어가다보면 인류 멸망 대위기도 올수 있다는 공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내용
3차 세계대전 위기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쿠바미사일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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