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명대학교 교수 류한수 18회]
냉전시대(The Cold War) 란?
소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의 전신 국가로 알려진 소련은 1922년에 결성 후 1991년 해체된 후 사라진 국가로 2차 세계대전 이후~1991년까지 미국과 함께 냉전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이다. 미국과 소련의 패권 경쟁을 냉전이라고 부른다. 미국과 소련은 상당히 달랐다. 미국은 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였고 소련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체제로 약 40여년간의 냉전 구도를 이어갔다.
냉전 시대 이전 상황
미국과 소련이 처음부터 대립하고 불신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은 우방관계, 혈맹 관계였다. 제2 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미국, 영국, 소련) 과 독일은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소련은 독일의 히틀러를 상대로 연합국에 속해 있던 국가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은 서로 침공하지 않겠다는 독소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을 비밀리에 협약을 맺은 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본격적으로 제 2차세계대전이 시작된다. 1941년까지 유럽을 거의 장악한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다. 전쟁 초반 소련은 독일에 연전연패한다. 이때 미국이 소련을 지원하다. 공공의 적 히틀러를 상태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전략적 제휴를 하며 연합을 한 것이다.
이 당시 소련 스탈린의 가장 큰 목표는 생존이었다. 더 많은 물자지원과 더 많은 군수품지원을 위해 소련은 노력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독일에 폭격을 실시한 소련은 결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한다. 독일이 패망이 가까워오자 미국과 소련 사이에 긴장감이 다시 찾아온다.
냉전 갈등의 씨앗이 된 폴란드 문제
연합국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고 그 이후에 점령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가지게된다. 그로너 폴란드 문제로 인해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다.
* 얄타회담 (1945.2.4~11일)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영.소의 수뇌들이 모여 독일 패전 이후 사후처리에 대한 회담을 진행.
이때 영국은 이미 폴란드와 동맹관계에 있었고 소련의 입장에서는 폴란드는 서방과 소련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항상 러시아로 침공하는 서방의 세력들은 폴란드를 거쳐서 소련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지리적인 이유로 소련은 폴란드를 소련의 영향권 안에 둬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폴란드 처리 문제를 두고 영국과 소련은 기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의 해결방안으로 폴란드 국민의 뜻에 맡기기로 하고 폴란드 국민들의 국민투표를 제안하면서 얄타회담에서 폴란드에 자유선거를 통한 정권 수립에 합의 하지만 종전 후 이때 이미 폴란드를 소련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선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에 영국의 강한 반발로 소련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소련의 배후 조종으로 폴란드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고 이를 계기로 연합국의 관계는 긴장 상태로 접어든다.
냉전의 시작
냉전 시대 문을 연 연합국 새로운 지도자들의 등장
얄타회담 후 베를린 옆에 포츠담이라는 곳에서 세나라 대표가 다시 한번 모이는 포츠담 회담(1945년 7월 26일)이 열린다. 그러나 얄타회담과 포츠담 회담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스탈린만 참여 영국과 미국은 수뇌부가 바뀐 것이다. 영국의 경우 종전 직전 총선거에서 처칠을 누르고 당선된 애틀리 총리와 미국의 경우 루스벨트 사망 후 대통령을 승계한 미국의 트루먼으로 불과 5개월 사이에 연합국의 새로운 지도자들의 등장으로 냉전 시대의 문이 열린다.
소련의 스탈린은 오랜 기간 봐온 루스벨트와 처칠의 익숙한 반면 현재의 전혀 새로운 인물들과 어떻게 협상을 해야 되는지 고민이 되기 시작하였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반면 현재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소련에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영국의 애틀리 총리 또한 스탈린의 대해서 상당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고 연합국의 지도자가 바뀐 이후에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포츠담 회담에서 세부적인 독일분할 점령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소련을 견제하고 싶었던 영국이 프랑스를 끼워서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으로 독일은 분할 점령한다.
체제간 영역 대립 (철의 장막 뜻)
당시 소련이 가지고 있던 공포심은 제2 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물적 피해와 극심한 인명 피해로 인해 이런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게 서방과 소련 사이의 국가들에 친소련 정부를 수립하여 그 나라들을(동유럽)을 완충지로 삼아 자국을 보호하려고 했다.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철의 장막 연설
이렇게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하의 동유럽 국가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소련의 행동에 불안해진 미국 영국 프랑스는 소련의 세력 확장에 대한 불안감 표현한 연설을 한다.
영국의 전 총리 윈스턴 처칠의 연설(1946.3.5)
” 발트해의 폴란드 슈체친에서 아드리아해의 이탈리아 트리에스테까지 철의 장막이 대륙을 건너 드리워졌습니다. 이른바 소련의 세력권에 있습니다. “
이때부터 소련의 통제가 시작되었으며 점점 물적 교류가 끊어지고 국가간의 교류까지 끊어지게 된다.
1. 쩐의 전쟁
트루만 독트린 선언(1947.3)
그래서 터키 그리스 등 방공 정부에 힘을 키우기 위해 미국은 4억 달러의 기금을 들여 반공 정부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원조한다. 미국과 소련은 점점 기싸움이 강해지게 된다 . 자국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어마어마한 금전적 투자가 이뤄지게 된다.
**마셜 플랜
1947년 6월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유럽 대규모 경제 원조 계획인 4년에 걸쳐 약 130억 달러(현재 가치 약 100조) 원조하는 마셜 플랜을 실시한다.
제2 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유럽 국가들은 수천만의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었고 먹고 살기 힘들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먹고 살기 힘들면 공산주의 세력의 힘이 커지기 때문에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유럽의 경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셜 플랜은 유럽의 경제를 재건해 민주주의 국가들이 안정적인 환경을 이루는 것이 취지였다. 1952년 무렵, 마셜플랜이 끝날 무렵에는 미국의 원조를 받은 대부분의 서유럽국가의 경제가 되살아 났다.
몰로토프 플랜
미국이 주변국들에게 인정받고 영역을 넓혀 가니까 이에 위기감을 느낀 소련이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당시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연대를 맺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기술, 물자도 제공하고 설비를 교환하면서 1949년 1월부터 몰로토프 플랜을 실행한다.
그래서 몰로토프 플랜으로 유럽 국가들이 미국에 종속되는 것을 막는 한면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등 여러 나라와 긴밀한 무역 관계로 하나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렇게 미국과 소련과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1950년대 유럽체제 분할지도
미국, 소련 각각 군사동맹기구 조직
이렇게 유럽 대륙이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가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미국과 소련이 각각 군사동맹기구까지 조직하고 만들게 된다.
미국을 중심으로한 군사동맹 기구 ‘ NATO 나토’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 ,반면에 소련도 가만있지 않고 나토와 대항할 수 있는 군사동맹 기구를 만드는데 소련의 군사 기구 본부가 위치한 곳이 폴란드 바르샤바였기 때문에 ‘바르샤바 조약기구’ 를 만든다. 냉전시대에는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소련 베를린 봉쇄
또 한 가지가 베를린 문제가 상당히 중요지는데 역사적으로도 동독보다 서독이 좀 더 발전한 지역으로 동독과 서독이 원래 경제적 격차가 있었는데 공장의 폐쇄로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되었다. 서유럽 경제 위기를 극복해가는 서독을 보면서 또다시 소련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서방 연합국과 서베를린의 연결을 끊어야 독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소련은 베를린을 봉쇄하기 시작한다.
스탈린이 미국에 대한 불신감을 키우고 동독지역을 확실히 소련의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한 계획으로 베를린을 완전히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식량 등 각종 물자를 막아 버린 것이다. 이로써 서베를린은 완벽하게 고립이 되었고 서베를린 지역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먹을 거리를 걱정하게 되었다.
서베를린 육로가 막혀 있으니 항공편을 선택한다. 서베를린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물자를 미국 수송기로 서베를린에 물자를 공급하기 시작한다. 이 작전으로 서베를린 시민들은 미국과 서방 연합국의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봉쇄 기간만 약 1년이 넘었다. 서베를린 인구수가 약 200만 명이였기때문에 수송기가 이동 한 횟수만 20만 번이었다.
이렇게 봉쇄기간 동안 약 230만 톤의 식량과 연료 기타 물품을 제공했고 결국 소련의 스탈린은 포기하면서 1949년 5월 베를린 봉쇄를 해제하면서 미국의 대규모 공수 작전도 막을 내린다. 이로서 소련은 아무런 성과 없이 세계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베를린 장벽 건설
1961년까지 서독으로 망명한 동독 인구가 동독 전체 인구의 약 20%에 육박할 만큼 소련 체제를 견디지 못한 동독 주민들이 탈출하는 현상이 계속되자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약 40km의 장벽을 세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베를린 장벽이다. 동 서베를린 경계에는 외국인만 지나갈 수 있는 검문소 인 체크 포인트 찰리가 세워졌다. 이곳에는 무장한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고 장벽을 넘어서는 사람들에게 위협 사격, 사살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가 목숨을 잃었고 현재 이런 베를린 장벽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아직도 베를린 곳곳에는 추모공간이 존재한다,
베를린 봉쇄에 실패하면서 소련은 한발짝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냉전 분위기를 한순간에 역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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