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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꼬꼬무

김상옥 종로 경찰서 폭파 사건 /순국선열의 날 유래

by 365 ^^ 2021. 11. 19.

김상옥 의사

종로 경찰서 폭파 사건 

 

종로경찰서는 어떤 곳

 

1923년 1월 12일 종로 경찰서에 폭탄이 터졌다. 이곳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했던 곳으로 한번 끌려가면 산 송장이 되어 나오는 곳이었다. 고문기술자들이 독립 운동가들에게 온갖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운동가만 고문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종로경찰서 모습당시 종로경찰서 모습
당시 종로경찰서 모습

종로서의 순사가 시장 상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이유는 물건 값을 깍아주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울거나 떼를 쓰면 어른들은 이런 말을 했었다. "일본 순사가 잡아간다!"  말만 문화 통치였지 고문 문화가 꽃피던 시절이었고 종로 경찰서 폭파 사건은 1920년대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당시 종로경찰서 폭파현장 사진
당시 종로경찰서 폭파현장 사진

 

종로 경찰서 폭파 축소 은폐

이때 종로경찰 폭파사건을 일본은 축소은폐하려 했고 경찰 측 인명 피해는 없고 조선인만 다쳤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매일신보 사원 장희용 등 10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신문기사도 이틀 뒤에 보도되었다. 


일본 경찰은 확실한 증거물이나 누가 폭탄을 던진지를 알지 못했다. 이에 폭탄 투척 사건의 배후로 불령선인을 지목하고 대대적으로 탑문 수사를 벌인다. 

*불령선인= 일본어로 후테이센진=후테이 고집 센, 반항적인 의 뜻으로 일본에 반항하는 조선인으로 독립운동가를 의미한다. 

 

일제는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전쟁에 참여했던 헌병 군인을 경찰로 돌렸고 문화통치기간에 일본 경찰서가 2배 이상 늘어났으며 예산을 늘려 밀정을 심는 데 사용했는데 당시 이름이 확인된 밀정수만 895명이었고 실제로는 수만 명으로 추정된다. 일본군 100명보다 밀정 한 명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고문 기술자중에 '미와 와사부르'가 악명이 높았는데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청산리 전투 김좌진, 도마 안중근, 만해 한용운, 시인 윤동주 등등 독립운동가 중에는 '미와'를 거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미와 와사부르 고문기술자
미와 와사부르 고문기술자

그는 밀정 관리에 탁월했고 밀정을 통해 불령 선인의 모친 한 명이 수상하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 모친의 아들은 김상옥이었다.

 

김상옥 열사



김상옥 사업가로 성장
김상옥은 3년 전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고 했던 인물로 일본 경찰이 눈을 불을 켜고 찾아다녔으나 그를 찾지 못했다. 또한 김상옥은 당시 조선 최고의 총잡이로 명중률이 높았던 독립 운동가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김상옥 의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4세부터 대장간 일을 시작으로 형제들과 영덕 철물점으로 성장했고 여러 명의 직원을 둘만큼 철물점 사업이 번창하고 있었다.



비밀 신문 발간
그러나 1919년 3.1 운동 때 일본 경찰의 장검에 찔려 죽어가던 사람들의 끔찍하고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김상옥은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한다. 김상옥은 낮에는 사업가로 밤에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 해외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는 비밀 신문을 만들었고 같이 신문을 만든 동지들은 전부 대학교를 나온 엘리트 지식인들이었다. 비록 초등학교 2학년만 마친 김상옥이지만 이들을 규합하고 지휘했으며 자금도 지원했다.

 

김상옥 열사가 발간했던 혁신공보 비밀신문
김상옥 열사가 발간했던 혁신공보 비밀신문

 

종로경찰서 연행

그러나 이들의 모임은 밀정의 눈에 띄게 되었고 김상옥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된 후 40일 동안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김상옥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지만 온몸에 피고름이 흐를 정도로 몸이 망가졌었다. 그래서 김상옥은 평화적인 방법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암살단 조직

만주에 있는 무장독립단체 북로군정서와 접선했고  독립군자금 5천원(당시 조선인 경관 월급이 28월 80전으로 약 172개월치 )을 지원하고 무기를 지원받고 국내에서 암살단이란 조직을 만들었다. 목표는 단 하나 조선총독부 우두머리 총독 제거였다.  그래서 대장간 지하에 비밀 무기고를 만들고 암살 훈련을 시작한다.

 

김상옥 의사는 당시 34세였다.



동대문 홍길동
암살을 위해 매일 북한산에 올라 사격훈련을 했다.  몇달 후에 10발 중 9발을 명중하는 명사수로 성장한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국회의원이 경성을 방문할 때 일본 총독이 마중을 나온다는 정보였다. 일본은 며칠 전부터 기마경찰 무장경관을 경성 곳곳에 배치했고 서울역부터 조선호텔까지 모든 조선인은 통행금지시켰다. 그래도 불안했던 일본은 예비 검속을 실시한다. 예비 검속이란 미리 사전에 검거해서 구속한다는 뜻으로 위험인물이라 예상되는 모든 인물을 모두 잡아들인 것이다. 

거사 하루 전날 불령선인 1000여명의 예비 검속을 실시했고 김상옥도 명단에 있었다. 아침부터 순사들이 들이닥쳤고 김상옥은 2층을 통해 빠져나와 지붕 위를 날아서 도망쳤다. 이때 생긴 별명이 동대문 홍길동이다.

 

영화 <암살>의 하정우 배우(하와이안 피스톨) /영화 <밀정>의 박희순 배우 역 모두 김상옥을 실제 모델로 그린 영화

 

김상옥 집을 수색하던 중 총독 암살계획을 알게 된 일본 경찰들은 김상옥의 가족과 지인을 잡아들여 고문을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초를 겪은 사람은 24살의 여성 동지였던 장규동이었다. 아무리 때려도 말을 하지 않자 거꾸로 매달아 고문, 그래도 말을 뜯지 않자 성고문까지 했다. 그리고 암살단 단원들도 하나, 둘 검거가 되었다. 그리고 김상옥이 없는 가운데 재판이 열렸고 그들은 중형을 선고받고 김상옥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김상옥없이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선고

 

의열단 가입

그 시각 김상옥은 중국 상해에 있었다. 거기서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해 폭탄제조 지원을 받고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을 만나서 다시 거사를 치를 준비를 한다. 그리고 상해를 떠나기 직전에 사진을 남긴다.   

 

사진 속에 손을 뒷짐을 지고 사진을 찍은 이유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이 손이 너무 부끄러워 내놓지 못하겠다고 했다.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김원봉 업적과 활동들

무장 투쟁론자 김원봉 때는 3.1 운동 이후 외교 독립론이 힘을 얻고 그 결과 외교독립론자 임시정부의 김구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생각이 다른 독립운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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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경찰서 폭파 이유

1922년 11월 상해를 출발한 김상옥은 비단장수로 위장을 해서 소형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보름 만에 경성에 도착한다.  그리고 상해에서 보내주기로 한 대형 폭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폭탄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소형 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폭탄은 불발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테스트하기 위해 김상옥이 택한 것이 바로 종로 경찰서였다.

 

성동격서 라는 말이 있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친다. 는 뜻

종로서가 시끄러워지면 주위가 시끄러워진 틈을 타서 남대문역에서 총독을 처단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폭탄을 던지고 거사 5일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김상옥의 남산 도주
그러나 수사망에 생각보다 너무 빨리 좁혀왔고 김상옥의 신원과 김상옥이 숨어 있던 후암동의 여동생 은신처가 노출이 된 것이다.  김상옥을 찾아온 일본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형사 셋이 김상옥의 총에 맞고 쓰러졌고 이 틈을 타서 김상옥은 남산으로 도망갔다. 

 

삼판통 김상옥 여동생의 집
삼판통 총격적인 벌어졌던 김상옥 여동생의 집

 

이에 일본 경찰은 남산을 포위했고 동시에 여동생 부부를 경찰서로 연행했다.  김상옥의 매제 고봉근은 김상옥 의사의 탈출을 위해 일경 6명과 격투를 벌이다 붙잡혀갔고 그곳에서 코에 고춧가루를 넣고 고문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김상옥 여동생의 남편이자 김상옥 매제는 김상옥의사의 탈출을 도왔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도 줄줄이 연행되었다. 이때가 1월로 김상옥은 도망칠 때 버선발로 도망을 쳤고 신발도 신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발은 동상에 걸린 상태로 피가 나고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김상옥 열사 VS 1000명의 일본경찰
그는 포위망을 뚫고 경성 시내의 동지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 집을 지켜보던 밀정에 의해 효제동 동지의 집은 노출이 된다. 이때 김상옥 열사 1명을 잡기 위해 1000여 명의 경찰이 동원된다. 4중으로 주택을 포위한다. 1진은 권총 무장 형사들, 2진 장총부대, 3진 기마경찰, 4진 군 헌병대까지 6가구를 1000여명의 일본군이 포위했다. 1000명의 일본 경찰이 동원된 건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였다. 

 

최후의 총격전
그리고 방문을 여는 순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상옥은 방안의 다른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고 경찰들과 총격전이 벌어진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본 경찰은 마당의 변소로 모여들었고 거기서도 한참을 총격전이 벌어지다 조용해진다. 경찰은 변소 앞에서 다가갔고 바로 그때 변소 안에서 한 발의 총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형사가 변소 안을 조용히 다가가 들여 다 보는 순간 김상옥과 눈이 마주쳤고 놀란 경찰들이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적막이 들린다. 

 

김상옥 열사의 죽음

그러나 아무도 다가가지 못한다. 그래서 경찰서의 어머니를 데려와서 변소 문을 열게 했다. 어머니는 문을 여시고는 그대로 주저앉으셨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양손에 총을 쥐고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은 이미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이 모습을 어머님이 보게 되었다. 몸에는 총탄 11발을 맞았고 머리에 한 발을 맞았다.  마지막 총성은 자신을 향해 쏜 것이었다.

 

김상옥 의사의 최후를 묘사한 신문

 

남은 가족들의 고통
그러나 김상옥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일본 경찰은 남은 가족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김상옥의 어머니는 무기와 폭탄을 숨겨주며 아들의 의거를 도왔고 김상옥의 동생 김춘원은 형을 대신해 철물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형 대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는데 툭하면 경찰서로 불러갔다.  

 

김상옥의 어머니와 동생 김춘원
김상옥의 어머니와 동생 김춘원

그리고 집도 모두 뺏기고 온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김상옥의 아내는 당시 29살이었고 병원 사택에서 먹고살면서 홀로 아들, 딸을 키웠지만 아들 태웅은 20대에 병으로 요절했고 딸은 심각한 대인 기피증을 앓다가 사망했다. 독립운동가의 남겨진 가족들의 처참한 삶이 너무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김상옥의 가족들
김상옥의 가족들

 

독립운동가의 흔적 찾기
독립 운동가는 자신의 행적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지만 마지막 거사 죽음 직전에서는 단정하게 사진의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그들이 사진을 남긴 이유는 그래도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 뜨겁게 살다 갔다는 것을 지금의 이 자유가 수많은 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것을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 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종로 5가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 정류장/ 이곳이 김상옥 의사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장소 
김상옥 의사가 마지막 자결한 장소로 현재는 이곳에는 김상옥을 기억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김상옥 의사의 묘는 현재 현충원에 있고 혜화역 1번 출구 마로니에 공원에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김상옥 의사가 출생했던 곳이 이근처이기 때문이다. 

 

순국선열의 날 유래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또한 이 날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기도 하다. 이날 김상옥 열사와 같은 우리나라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과 선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던 날이다. 순국선열들을 기억하며 기리며 그들이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도록 잊지 않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을사늑약과 같은 날로 지정했다. 

 

 

을사늑약(=을사조약) 뜻, 을사늑약이 무효인 이유

 

을사늑약(=을사조약) 뜻, 을사늑약이 무효인 이유

일본은 임진왜란(1592년)때부터 한반도를 지속적인 침략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1875년 운오효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1905년 마침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겠다는 을사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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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꼬꼬무 5회/ KBS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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