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4월 26일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하룻밤 사이에 72명이 죽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 이른바 우순경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국내 최단시간 최다 살인사건이었다. 이 끔찍한 살인사건의 범인은 당시 27살의 우범곤이었다. 약 8시간 동안 90여 명이 넘는 사상사를 낸 살인자는 다름 아닌 마을 지사에서 근무하던 경찰관이었다.
우범곤은 어떤 사람이었나?
언론을 통해 알려진 우범곤의 고향은 경남 부산시 초량동으로 어릴때 학업에 흥미가 없고 무단결석이 많았고 성적도 좋지 않았던 학생이어서 주변 친구들에게 무시를 받았다. 성격도 포악해서 따돌림을 받았고 고3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집안에 어려워지면서 성격도 급격하게 삐뚤어졌다고 한다. 공업전문학교를 장기결석으로 2년에 중퇴를 하게 되었다.
우범곤의 황금기는 해병대에 입대해서 총을 잘 쏘았기 때문에 특등사수가 되었고 그 동안 당했던 설움을 일시에 보상받는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군대생활이 이어져 경찰로 입직까지 됐고 청와대 경비단에 발탁이 되었다. 그러나 술로 인한 주사가 심하고 난폭한 성격이 문제가 되어 적성검사에서 부적격자로 판정되어 청와대 근무 8개월 만에 의령경찰서 궁류지서로 좌천된다.
우순경 총기 난사 진행과정
1982년 4월 26일 우범곤은 저녁근무를 위해 낮잠을 자고 있었다. 당시 동거녀(25세)가 우범곤의 가슴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자 벌떡 일어나 심하게 화를 내며 그날 저녁 근무가 있었는데 우범곤은 만취 상태로 동거녀를 찾아와 무차별 폭행을 가한 후 무기로 달려가 카빈총 2자루, 수류탄 7개, 실탄 180발를 탈취한다.
토곡리(4명)
그리고 길을 가다가 만난 26세의 행인에게 총을 쏴 죽인다. 그 후 궁류 우체국으로 향한다. 그곳에 있던 전화교환원 2명을 살해,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 살해해서 그 지역의 통신을 끊겨버린다.
압곡리 (6명)
집주인을 포함 주민 5명을 살해한 뒤 동거녀도 죽인다. 압곡리에서만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운계리(18명)
압곡리에서 1시간정도 떨어진 운계리로 걸어서 이동한다. 운계리 마을 입구의 가게에 들러 음료를 사서 마신 후 지나가던 중학생을 불러 마시던 음료를 권한다. 그리고 우범곤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학생을 살해하고는 장터길을 따라 올라가며 간첩이 나타났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온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를 한 후 불 켜진 집에 들어가 닦치는 데로 총을 쐈다.
운계리 시장통에서 1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우범곤과 친한 사람은 물론 신생아부터 노인까지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도 희생되었다.
평촌리 (24명)
그리고는 다시 평촌리로 태연하게 걸어가 장례를 치르고 있던 상가집에 들어가 조의금 3천 원을 건네고 술상을 받았다. 우범곤의 총을 본 주민 한 사람이 뭐냐고 묻자 간첩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고 말했고 그 말을 믿었던 주민들이었다. 농담을 던졌던 주민 한 씨, 마을 이장을 연달아 쏘고 그 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문상객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시작했다. 결국 부상 20명 사망자 24명이 발생했고 이날 상주였던 분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다 어머니와 아들, 딸까지 모두 잃었다.
우범곤의 마지막 살인 장소
새벽 3시 40분경 서씨 일가족을 한방으로 몰아넣었고 대량 살인범의 경우 경찰에 순순히 잡히는 것보다는 스스로가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범곤도 그러했다. 우범곤은 방에서 수류탄을 터트려 일가족을 포함 자신은 자살은 했다.
4개의 마을을 다니며 친분이 있건 없건 무차별 살인을 저질렀던 우범곤은 범행 직후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했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범행 동기는 미궁 속에 묻혀버렸다. 20살도 안 된 아이들이 16명 그중에 10살 이하는 6명 심지어 생후 1개월 된 아기도 있었다. 다음 날 마을은 처참했다. 길, 마당, 집안 곳곳에 핏자국이 있었고 주민들은 모두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처참하고 참혹 모습 그 자체였다.
우순경 사건 기네스북 오름
우순경 사건은 2011년 노르웨 테러 사건 전까지 한 사람이 최단시간 최다 살인을 한 것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던 사건이다.
2011년 노르웨이 테러 사건(현재 기네스 기록)
노르웨이 오슬로와 근교 우퇴위아 섬에서 노르웨이인 아네루스 베링 브레이크가 가짜 경찰로 위장해 폭탄과 총기 난사로 77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
우범곤은 심리 그는 사이코패스였을까?
우범곤은 살인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액티브 슈터(Activ Shooter)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총기를 사용하는 범죄자인 일시적인 분노의 표출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서 주변의 사람을 닥치는 대로 살해한 케이스로 추정하고 있다. 살인 자체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경우인 사이코패스와는 다르다.
연쇄살인과 연속살인의 차이점
연쇄살인은 3곳 이상의 장소에서 3건 이상의 살인을 한 경우이고 연속살인(대량살인)은 짧은 시간 동안 비슷한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살해한 것이다.
2007년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한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과 2010년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59명이 사망한 미국 역대 최악의 라스베이거스 콘서트장 총기 난사 사건도 대량살인에 해당한다.
대량 살인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대부분 평소에 봤을때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에 굉장히 둔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교감을 나누지 않는 외톨이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과 내면적으로는 좌절과 분노, 남에 대한 원망과 사회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다.
사건 발생 8시간 동안 경찰은 무엇을 했나?
당시 지서장 경사 허씨와 차석 경장 김 씨는 22시 10분경 각자 카빈 소총을 소지하고 잠시 동정을 살핀 후 범인의 진행 반대 방향으로 가서 은신하다가 범인 수색, 주민 대피, 경보 및 사태 진압을 하지 않고 직무유기를 했다.
궁류면에서 의령경찰서로 첫 신고 접수 시간은 사건 발생 밤 10시 30분경이었다. 궁류 우체국의 교환원(전은숙씨 당시 23세) 은 숨지기 직전 이장집의 행정 전화와 의령 우체국 간의 코드를 연결했기 때문에 신고가 가능했지만 경찰서장은 밤이라 어두워서 출동을 할 수 없다고 하고 신고자를 쫓아냈다고 한다.
총소리가 잠잠해 지자 그제서야 경찰은 평촌리로 진입을 시도했다. 우범곤이 가져간 탄환은 144 발이었고 회수된 탄환은 단 9 발이었다. 우범곤은 135발의 탄환을 사용하며 1.6발에 한 명씩 치명상을 입혔던 것이다. 135발의 총을 쏘는 동안 경찰은 단 한 발도 총알을 쏘지 않았다.
우순경 사건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당시는 또한 언론 통제가 되던 시기로 우순경은 청와대 경비단 소속일때 근무 부적함 판정을 받고 궁류 지서로 발령된 것을 밝히지 않도록 했고 불과 이틀 만에 위로금과 장례비를 지급했고 책임자 징계도 속전속결로 진행 전두환 대통령이 사건 5일 만에 사건 현장을 방문했다. 197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하고 대통령에 취임했기 때문에 여론이 좋을 리가 없었는데 그해 4월 바로 우순경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사건 발생한 지 얼마 안 돼서 이 사건에 대한 기사들은 사라졌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 정책들 알아보기
사망자 집계가 모두 다른 이유
이 사건은 자료마다 사망자의 숫자가 다르다. 최종 집계된 사망자는 56명이었고 대법원 판결문에는 55명 사살, 경상남도에서 편찬한 연표에는 62명되어 있다. 언론에 보도된 것도 처음은 56명이었다가 10년쯤 전부터 갑자기 62명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언론 포함 사망자 숫자를 62명으로 말하고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 등 관계부처에 정보 공개를 청구했고 돌아온 답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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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궁류 총기사건 관련 사망자 수가 56명으로 기재 되어 있으며 사건 이후 부상 정도가 심하여 사망에 이른 경우 등 추가 사망자의 정보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후속 조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큰 피해를 남긴 사건사고는 기억하기 위해 백서를 발간하는데 이 사건의 백서는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위령비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매년 집집마다 따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22년 4월 26일은 40주기이다.
[출처 6회/채널A뉴스]
꼬꼬무 7회 이두홍 사건 암수살인(=암수범죄) 이었던 신순임 살인 자백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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