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훼리호 침몰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 40분에 위도항을 떠난 여객선은 기상악화로 40분 늦게 출항했다. 바람이 거세지고 파도가 높아지자 회항하기 위해 배를 돌렸으나 4m 높이의 파도가 배 옆을 때리고 한번 기우뚱하고 또 2번 기우뚱 마지막 세 번째 90도로 뒤집힌다. 오전 10시 382명을 태운 부안 격포항으로 향하던 110톤급 여객선 서해 패리호가 침몰했다.
배가 침몰하면서 위도 주민과 관광객 292명이 희생되었다. 사고 조사 결과 207명의 정원에서 초과된 승객을 태우고 최대 초속 14M의 돌풍이 예고되는 악천후에 운항을 강행하면서 이 같은 참사가 발생했다. 초기 대응이 늦은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당시 교통부 장관을 포함 40여 명의 공무원이 문책을 받았던 사건이다.
침몰 사고 발생 과정
위도는 고슴도치를 닮았다고 하여 고슴도치 위 자의 위도였다. 위도는 낚시로 유명한 섬이었고 10월이 낚시의 피크 시즌으로 낚시군들이 많이 몰리는 시기였다.
기상악화 풍랑주위보 발령
그러나 기상악화로 좋지 않은 날씨에 10월 10일 풍랑주의보가 떨어지고 위도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나가야 했다. 그때 하루에 한 번 운행하는 서해훼리호 여객선이 들어왔고 사람들은 이 여객선에 급하게 승선한다. 여객선에 탑승하고 보니 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낚싯배도 못 뜨는 상황에서 낚시꾼 포함 모든 관광객이 몰린 상황이었다. 선실이며 갑판까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앉을자리도 없어 갑판이며 선실이며 사람들이 안팎으로 바글바글했다.
침몰 직전 상황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서해훼리호는 10월 10일 9시 40분에 위도를 떠났다. 기상악화로 인해 파도가 갑판 위로 밀려들면 10월의 차가운 파도를 피하기 위해 갑판에 있던 승객들은 배의 한쪽으로 몰려들어 배가 기우뚱 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서해 훼리호 침몰 순간
그 순간 배의 시동이 꺼진다. 바다에 떠있던 로프가 프로펠러를 휘감아 엔진이 꺼진 것이다. 서해 훼리호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추진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때 배가 거대한 파도에 맞아버리면서 배가 확 기울었는데 배가 복원이 되지 않는다. 그 순간 들리는 소리 " 사람이 날아간다"
배가 기울어지면서 선상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다에 빠져버린 것이다. 난간을 잡았던 사람만 아직 배 위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1분도 안 돼서 순식간에 선체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침몰 후
어느새 가라앉은 배는 보이지 않고 이때 가장 가까운 해경의 거리는 1시간 거리에 있었다. 낚시꾼들이 들고 온 아이스박스에 사람들이 매달려 있고 주변에는 시체들이 떠다니기 시작한다. 10월의 바다는 춥고 구조대는 오지 않는 상황. 어느 틈엔가 주변에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낚싯배 종국호 출동
같은 시각 사고 현장 가까이에 있던 종국호의 선장 이종국 씨는 12명의 낚시꾼과 근처에서 낚시 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여객선 침몰 소식을 듣자 모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고 현장 도착 시간은 사고 발생 20분 후였다. 현장에 도착하고 보고 현장은 너무 참혹했다.
배는 흔적도 없고 그야말로 시신의 바다였다. 생존자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바로 그때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살려주세요" 그때부터 사투가 시작되었다. 여럿이 붙어도 축 늘어지고 힘이 빠진 사람 하나를 건져 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며 첫 번째 사람이 구조되고 한 사람 한 사람 구조를 계속 이어갔다. 중국 호가 구조한 사람만 총 44명이었다. 작은 낚싯배에는 더 이상 인원을 태울 수 없었다.
남은 생존자들을 더 이상 태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때 여기저기서 작은 어선들이 줄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려 46척이었다. 하나 같이 작은 고깃배들이었다. 이 날 어선이 구조한 사람이 70명이었다.
마지막 생존자 박병길 씨
그러나 해경은 이 시각까지도 도착하지 못했다. 고깃배가 위도에 마지막 생존자 박병길 씨를 내려주었고 병길 씨는 자신의 아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 이때 누군가 말을 했다. "저기 여인숙에 웬 아주머니가 혼자 울고 있더만 남편 죽고 혼자 살았다는 거야" 병길씨는 그 집을 향해 뛰어갔고 그곳에는 아내가 있었다. 그들은 부둥껴앉고 울었다.
서해 훼리호 참사 무엇이 문제였나?
탑승자 명단 확인 안 됨
서해 훼리호 침몰 참사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 참사였다. 희생자 중에는 직장 동료와 단체여행을 간 사람이 많았고 전주의 어느 동사무소는 직원 9명이 동시에 사망해서 업무가 마비되었고 일가족 33명이 같이 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고의 진짜 황당한 것은 생사는 고사하고 누가 탔는지도 확인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정확한 탑승 여부도 모른 채 군산 공설 운동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의 질문은 모두 같았다. 우리 남편이, 부인이, 부모님이, 아들이 배에 탔는지 제발 좀 확인해 주세요.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 그게 저희도 잘 모릅니다."였다. 탑승객 명단이 없었던 것이다.
탑승자 명단 확인 안 된 이유
일반적인 승선 과정은 인적 사항 기재 후 신분증 확인과 승선 시 신분증을 재확인하는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기본적인 신원 확보 절차가 이루어지는데 당시 위도에는 매표소도 없었다. 배 안에서 표를 팔았던 것이다.
그 표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사고를 당하니 누가 탔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실종자 가족들이 병원, 군청, 경찰서로 동분서주하면서 직접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는 데마다 사망자 명단, 생존자 명단 다 달랐다. 심지어 몇 명이 탔는지도 몰랐다. 승선 인원을 파악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객선 회사는 140명이 탑승했다고 했고 경찰에서는 200명 탑승했다고 말한다. 결국 방법은 시신 인양을 해봐야 탑승인원과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선체 수색 시작
다음날부터 해군, 해경, 어선까지 총동원되어 시신을 찾기 시작했다. 서해훼리호는 수심 14m 아래에 선체 1/3이 뻘에 잠겨 있는 상황이었고 잠수 요원이 객실부터 진입을 시도, 도끼로 유리창을 부수고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를 통해 들어가 시신을 찾았다. 선체 안은 암흑이었고 몸을 움직이면 물 먼지가 날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더듬어서 작업을 했다.
첫날 수습된 시신은 총 14구 시신 한 구 수습될 때마다 실종자 가족들이 몰려들어 자신의 가족인이 얼굴을 확인했다.
최악의 오보 사건
선장이 살아있다. ~
이런 아수라장 같은 상황에 서해훼리호 선장이 살아있다는 제보가 들려온다.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 승객을 버리고 제일 먼저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장만이 아니라 승무원 7명 전원 탈출해서 제일 먼저 구조 어선을 타고 위도로 들어갔다는 내용이었다.
선장 지명수배
이에 곧바로 선장 관련 보도가 쏟아지고 검찰도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위도에서 나가는 모든 배를 검문, 검색, 선장 집, 이웃집 가택도 수색을 했고 전경 3개 중대가 동원되어 위도를 수색하며 위도를 원천 봉쇄했다. 그러나 선장은 잡히지 않았다. 이에 선장의 친. 인척까지 모두 조사했으나 선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에 선장, 승무원을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렸고 전국에서 제보가 쏟아졌고 심지어 선장의 중국 밀항설까지 들려왔다.
이때 자신이 선장이라는 전화가 걸려왔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방송국에서 모두 털어놓고 자수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방송국으로 수사대를 급파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약속한 시간에 선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선장 가족 설득
이제 남은 방법은 가족을 설득해 선장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된 가운데 선장이 도망 다닌다는 것으로 온갖 비난이 쏟아졌고 선장 가족들은 집 밖으로 나올 수도 없었다. 사고에 대한 충격과 분노는 선장, 선원 가족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그 사이에 시신은 계속 인양되고 있었다. 서해훼리호의 승객 정원은 207명인데 사고 발생 나흘째 확인된 사망자만 138명이었다. 그리고 생존자 70명을 합하면 208명으로 이미 정원을 넘어섰는데 아직도 시신을 못 찾은 가족들이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선장과 선원 시신 수습
이날도 잠수요원 신성균 상사는 물속으로 들어가 시신 3구를 끌어올렸다. 이들은 선장 A 씨, 기관장 B 씨, 갑판장 C 씨로 무성한 소문과 달리 모두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조타실 안의 통신실이었다. 이곳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탈출 가능한 곳이었다. 이 말은 이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선장의 부인은 실신했고 딸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최악의 오보는 당시에 위도 파출소에 새로 발령을 받아온 직원이 있었는데 그 직원이 선장과 너무 닮아서 착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기자가 팩트체크, 사실 확인도 없이 그냥 기사를 쓴 것이다. 그리고 다른 신문 방송들은 이것을 받아쓰기했고 이것에 검찰까지 나서서 수사를 시작하면서 생존설은 썰이 아니라 사실이 된 것이다. 속보 경쟁, 특종 경쟁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는 언론과 TV매체로만 소식을 접하던 시절로 여기 보도되면 모든 것이 사실이 되었던 시절이다.
서해훼리호 침몰 원인
이런 선장 생존설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사이 서해훼리호는 왜 침몰했는지를 놓치고 있었다. 사고 발생 일주일 만에 선체를 인양하기 시작했다. 배를 끌어올리고 보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시신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정원 초과
생존자 포함 208명의 탑승객에 새로 발견된 시신만 154 구였다. 그렇다면 배에 탄 사람은 총 362명이라는 것이다. 정원이 207명인 여객선에 승무원 14명 총 221명+154명은 = 375명
위도로 가는 여객노선을 낙도 보조항로라고 부르는데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섬으로 손님이 없어 주로 적자인 노선이다. 그래도 운항은 해야 하기 때문에 선박회사는 손해를 보면서 운행을 하고 이 손해를 정부가 메워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5년 전부터 위도로 가는 노선의 사정이 달라졌다. 낚시로 유명해진 위도는 온갖 관광객, 낚시꾼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하루 탑승객 평균이 199명이었다.
주민 민원 무시
낚시 철에는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주말마다 정원을 초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는 하루 한번 서해훼리호만 운항했다. 이에 주민들은 불안했고 배를 증편해달라고 항만청에 건의를 수십 번 했으나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렇다면 비용이 얼마나 드는 것인가?
과적
또한 그날 서해훼리호에는 멸치액젓 통이 600통이 실려 있었다. 원래 화물은 배 아래 화물칸이 실어야 했으나 배가 도착하면 내리기 편하게 하기 위해 이날은 갑판 위에 고정도 시키지 않은 채 실었던 것이다. 그렇게 6톤이나 과적이 된 상태였다. 사람도 정원초과에 화물도 과적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실종자 수습
임영복 씨는 당시119 구조 대원이었고 외할머니 탈상을 위해 부모님 포함 일가족 33명이 위도로 왔다가 모두 사망했다. 임영복씨는 유족이면서 구급차로 시신 이송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자신의 아버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임봉석 씨 한 명의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사고 23일째 되던 날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다. 사고 현장에서 30km 떨어진 곳이었다. 시신은 이미 많이 훼손되어 시계, 반지 등 액세서리를 보고 확인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
이날의 생존자들은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고 기쁜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생각에 죄책감으로 미안해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 200명 이상 해양 여객선 참사는 20년마다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20년마다 참사가 반복되지만 사고 원인도 똑같다. 점검 및 관리 감독만 잘해도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고 역사 속 실수를 배우지 않기 위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은 설마 설마 하는 안일한 생각이 이 같은 참사를 반복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서해훼리호 위령탑
위도의 한 귀퉁이에는 서해훼리호 참사 위령탑이 있다. 그리고 그 뒷면에 292개의 사망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들 한 명 한 명의 간절한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쉽게 잊고 반복되는 사고를 막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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