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투쟁론자 김원봉
때는 3.1 운동 이후 외교 독립론이 힘을 얻고 그 결과 외교독립론자 임시정부의 김구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생각이 다른 독립운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직 무장투쟁을 통해서만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무장 투쟁론자들이 있었고 그 중심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 일제 강점기 현상금 1위로 현 시세로 하면 약 320억 원이었다. 김원봉은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이다.
김원봉의 어린 시절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서당에서 한학 공부하다가 11세 때 밀양 국립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3세쯤 되었을 때 한일합병이 되니 분노한 어린 김원봉은 학교에서 일왕 생일 축하 행사가 열릴 때 행사에 쓰일 일장기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전교생을 동원해서 찾았는데 화장실 똥통에 처박혀 있었고 그 범인이 바로 김원봉과 윤세주로 훗날 의열단 멤버가 된다.
그리곤 둘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동화 학당에 입학한다. 거기서 인생의 사부를 만나는데 바로 전홍표 교장선생님이다. 전홍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결기만 있던 김원봉은 무술을 배우고 단련, 병법서까지 익히면서 중학교 때 이미 무예의 고수가 되어 있었다.
청소년기
17세쯤 중국행 결정하고 무전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공부를 결심하여 독일어를 배우려고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고 독일의 동맹국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연합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영프로 연합국에 일본이 참여한다.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일본이 적대적 관계라 그에 따른 대일 투쟁노선을 준비했던 김원봉이었다.
독일어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독일이 패전하면서 국제 정세가 바뀐다. 앞으로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 어떤 언어를 배워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제 세계는 영국과 미국의 시대다 라고 판단하고 영어 공부를 결심하고 난징으로 떠났다. 이렇게 용의주도하고 세계정세를 읽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
◎ 의열단 조직 (1919년 3.1 운동 직후 조직)
그때 고국에서 들려온 3.1 운동 소식으로 귀국하고 3.1운동을 보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독립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때마침 서간도에 신흥 무관학교라는 군관 학교가 설립된 것을 알고 특급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곳에서 각종 군사기술을 습득하고 다양한 병법을 배우게되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모인 단체가 바로 의열단( 의로운 일을 맹렬히 추진하는 단체) 을 조직한다.
의열단은 1919년 3.1운동 직후에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결성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극비의 무장독립운동을 했던 단체로 신출귀몰해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조직이다.
김원봉 현상금
상해 프랑스 공무국 경무처 정보 문서에 보면 당시 일본이 김원봉을 체포하기 위해 중국인에게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살해하는 대가로 600달러를 받았다'고 했다. 현재 가치로 360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 조선혁명 간부학교 설립(1932년)
독자적 활동의 한계를 느낀 김원봉은 조직적인 투쟁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군대를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926년에 중국 황포 군관학교에 입교를 한다.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으며 중국 정부와도 인연을 쌓아나간다. 그렇게 중국의 지원을 받아 1932년 조선혁명 간부학교를 세우고 3년간 125명의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한다. 그중의 한 사람이 이육사 선생이다.
◎ 조선의용대 창설(1938년)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한중 연합전선 구축과 한인 무장 단체 창립을 위해 사회주의자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중국 국민당 정부 장제스와 손을 잡고 중국 관내에서 최초의 한인 부대인 조선 의용대를 1938년 결성한다.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선 조선 의용대를 설립한 것이다.
◎ 한국광복군 합류(1942년)
조선의용대는 포로 심문, 암호해독, 선전활동을 하다가 독자적인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충칭에 있던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일부세력은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한다.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부 부장 임명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을 역임한다. 이로써 김원봉은 의열단을 지휘하는 의거 활동에서 한국광복군의 부사령관으로 독립전쟁을 이끄는 모습으로 바뀐다.
광복 이후 활동
사상과 관계없이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광복과 동시에 조선은 38도선을 중심으로 북은 소련 남은 미국의 두 개의 체제로 나뉜다. 입장이 애매해진 김원봉이였으나 김구와 함께 남쪽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친일파 출신 경찰 노덕술이 김원봉을 공산주의의 우두머리로 몰아 체포한 후 고문을 한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서 남북 협상을 하러 김구와 함께 평양으로 간 김원봉은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북에 남기로 한다.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는?
6.25 전쟁 때 인민군 간부를 한 탓에 월북 이후 김원봉의 행적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수십 년 세월 동안 무장독립투쟁의 혁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다. 그러나 6.26 전쟁 이후에 1958년에 김일성에게 숙청당한다.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
박차정은 결혼 전 독립을 위한 항일운동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에도 앞장선 신여성이다. 당시 의열단의 둘째 오빠 박주호의 부름에 1930년에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합류하면서 김원봉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조선혁명 간부학교 개설에 앞장섰고 그 당시 드물었던 유일한 여성 교관으로 역임했으며 경제, 사회, 역사 등 이론뿐만 아니라 기관총, 폭탄 제조, 실탄 사격을 가르쳤으며 무장투쟁의 최선봉에 나섰던 인물이 박차정이다.
김원봉과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을 하지만 1939년 중국 장시성 전투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고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5년 뒤 1944년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광복 후 박차정의 유골을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 안장하고 북으로 올라간다.
[선녀들 리턴즈 25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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