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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연해주 독립운동 역사/ 구한촌 신한촌 기념비

by 365 ^^ 2021.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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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오게 되었나?

 

19세기 중반엔 연해주는 청나라 땅이었다. 1860년대 (제2차 아편전쟁) 영국,프랑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고 이에 발빠르게 러시아가 중재에 나서게 된다. 그때 러시아가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가져간다.

 

청나라땅->러시아땅 

당시 쇄국정책을 펼치던 흥선대원군은 충격을 받아 서양과의 교류를 경계했는데 국경선이 맞닿아서 있는 러시아 연해주와의 왕래를 금지시킨다. 그러나 척박한 함경도에 계속되는 기근과 내 땅이 없었던 농민들은 전염병 등으로 살수가 없었고 러시아 입장에서는 없던 땅이 생겼지만 변방의 땅 관리가 어려워 조선사람이 이주하면 땅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니 많은 조선사람들이 러시아행을 택했다.

 

그렇게 생존을 위해 러시아행을 택한 백성들을 조선에서는 반대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갔는데 그들을 반기는 건 살을 에는 추위와 척박한 땅과 러시아 정부의 무관심이었다. 살기 위해 넘은 선이고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된 러시아내 한인사회가 형성된다. 그 첫 정착지 지신허 마을이다. 우여곡절 끝에 최초의 한인 마을을 만든 13가구의 농민들이 정착한 곳이다. 

 

러시아 지신허마을

 

<구한촌>: 개척리

신한촌 이전의 초기 한인 마을로 13 가구가 500호 이상으로 늘어난다. 땅을 개척해 부를 쌓아가면서 러시아인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개척을 했다.

 

개척리

 

그러다가 1905년 을사늑약의 비보 소식에 러시아 개척리(=구한촌) 동포들이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 중에 344호 건물이 러시아 최초 한글신문 발행하여 국내.외 독립운동간 소식통 역할을 한 해조신문사 자리였고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 처단하기 위해 논의하던 대동공보 신문사 자리도 개척리에 있다.

 

 

망국의 소식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 이후 1년 뒤 러시아의 콜레라 창궐을 이유로 한인 거주지를 강제 이주시킨다. 나라도 잃고 삶의 터전도 잃고 신한촌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신한촌>: 신개척리

신한촌 지역은 산비탈에 위치해 있어서 집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 집에 여러 사람이 모여 살았고 많으면 20명이 동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주된 한인들은 국권피탈 이후 사실상 신한촌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신한촌으로 이동

 

지금도 많은 한국인이 찾는 연해주 신한촌 기념비이다. 기념비 같은데 어떤 무늬도 글씨도 없다.

 

연해주 신한촌 기념비
세 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남한, 북한, 해외동포들을 의미하는 민족 전체를 상징한다.
작은 돌들 8개는 조선 8도를 의미
신한촌 기념비 내용1
신한촌 기념비 내용2

 

처음에 러시아는 이주민 우대정책을 펼쳤다. 자신의 땅을 개척해주는 한인을 우대하니 연해주지역이 당시 러시아인보다 한인들이 더 많을 정도였으나 일본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일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러시아는 한인들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세력이 거슬렸던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는 한인들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연해주의 한인들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왜 나라가 잘 살아야 되는지. 왜 힘이 있어야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연해주에서 활동한 1세대 독립운동가들

이상설, 최재형,이동휘 

 

 

권업회 조직

연해주에는 수많은 독립단체들이 있었다. 그 중에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초대 회장에 최재형, 부회장에 홍범도가 이끈 권업회는 권업 신문을 발간 민족정신을 고양시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동의회를 만든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무덤은 어디에 ㅠㅠ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3,14회 중] 연해주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아버지 최재형 선생 임시정부의 김구가 있다면 연해주의 최재형 선생님이 있다. 어린 시절 1860년 8월 15일에 태어난 최재형 선

jangane.tistory.com

권업신문

 

독립운동의 아버지 이상설

 

헤이그특사 이상설 선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내려온다. 일본의 죄를 성토하고 원한을 밝힌다는 의미의 '성명회' 조직를 조직한다.

 

이상설 등 성명회 조직

 

최초의 첫 독립선언서

 

그리고 이들은 첫 독립선언서를 만든다. 선언서만 6장, 서명록이 112장으로 우리 민족의 첫 독립선언서가 먼 이국땅에서만 5만여명 중 8,624명이 서명을 했고 이후 3.1 독립선언서, 6.10만세 운동 선언서의 모델이 된 것이다.

 

 

독립운동의 발상지

연해주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만들어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 설립)보다 5년 먼저 1914년 제일 처음 만들어진 최초의 망명 정부 대한광복군 정부도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연해주 독립운동의 1세대 이상설, 최재형 선생이 있는데 1893년 연추 한인마을의 지금의 읍장,면장에 해당하는 직책 '도헌'으로 선임되었는데 러시아 최초 한국인 '도헌'이었고 최재형 선생에게 예복을 수여했다. 또 다른 10살 정도 아래 이상설도 1917년 돌아가시면서 삼일운동 이후에는 최재형, 이상설 선생도 없었다. 그래서 그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이어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이다.

 

무장투쟁론 이동휘

 

 

이동휘 국무총리의 집무실이 있던 터

 

 

외교독립론: 이승만 친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무장투쟁론: 이동휘 친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실력양성론: 안창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대부 

 

 

 

모두가 다른 투쟁방식이지만 하나의 독립으로 뭉친 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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