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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콜롬버스(=콜럼버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과정, 의미

by 365 ^^ 2021.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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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내용)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이 인도항로 개척 이유

 

콜롬버스(=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를 떠나려 했던 이유

 

1492년 여름 안달루시아 팔로스항에서 세계를 뒤바꿔 놓은 콜롬버스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콜롬버스는 서쪽 항로에 확신을 가지고 황금의 땅 아시아에 도달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출발했고 항해 약 36일째 되는 날 육지가 나타난다. 콜럼버스는 아무도 가지 않은 서쪽으로 항해를 떠난 이유는 당시 15세기 말 유럽국가들은 아시아의 비단과 향신료가 큰 인기가 있었고  때문에 유럽인들은 아시아로 가는 항로 개척에 몰두하고 있었다.  

 

 

동서양의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 향신료가 들어왔는데 이 실크로드가 폐쇄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1453년 술탄 메메트 2세가 이끌던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지금의 이스탄불) 점령하면서 지금의 육상 교역로가 막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스페인과 포루투칼이 해상 교역로 바닷길 개척에 나서게 된다.  콜롬버스도 그 중에 한 인물이었다.  

 

 

 

유럽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환상

 

존  맨더빌이 쓴 < 맨더빌  여행기>  

 이 여행기를 보면 유럽인들은 아시아의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존   맨더빌은 유럽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상상과 편견 과정을 섞어서 쓴 가짜 여행기였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가 17 년 동안 원나라의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귀국한 뒤 <세계 불가사의> 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책이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했던 동방견문록이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중요한 것을 표시한 마크이다. 이 책에는 일본은 지붕이 온통 순금으로 덮여 있고 중국은 강력한 쿠빌라이 칸이 지배하는 선진국이다. 라고 적혀있다.

 

콜롬버스의 항해 경비 투자자 찾기

 

포루투갈 거절 

콜롬버스는 아시아로 가기 위해 막대한 항해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왕실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에게 후원을 위한 투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결과는 거절이었다. 포루투갈에서 투자를 거절당하자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간다. 1486년 6월 스페인 가톨린 군주를 만나게 된다.  

 

콜롬버스는 두 군주 앞에서 열정적으로 자신의 항해 계획을 설명한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적인 어려움에 부딪혀 선뜻 결정하지는 못했다. 또한 콜롬버스의 지나친 요구도 거절의 한 요소였는데 선박과 필요한 물품 지원 요청을 했고 자신의 자녀 또한 귀족이 될 수 있는 세습 귀족의 지위를 요구했고 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재판할 수 있는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제독의 지위도 요구했으며 발견한 땅에서 얻은 10/1 의 몫을 요구했다.  

 

스페인 가톨릭 군주들 /아라곤의 왕(페르난도 2세)/카스티야의 여왕(이사벨1세)-오늘날 마드리드를 포함한 지역의 상속자

 

 

스페인 왕실 후원 

그러나 스페인은 선뜻 무시하지도 못했다. 당시 경쟁국 포루투칼은 이미 엔히크라는 사람이 서부 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 했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를 원했던 스페인은 다른 방향은 서쪽으로 항로 개척을 하겠다는 콜롬버스의 제안이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1492년 8월 여름 스페인 왕실의 이사벨 영와의 후원을 받아 산타마리아, 핀타, 니냐 3척의 배가 대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이사벨 여왕은 콜롬버스가 제시한 산타페 협약을 모두 받아들이고 후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사벨 여왕은 당시 콜럼버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조건을 모두 들어줬지만 나중에 이 계약 조건을 두고 대대로 자손대에 이르러 스페인 왕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고 이 소송은 18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 ㅋ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의 산타페 계약 내용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의 산타페 계약 내용

☞ 스페인 이사벨 여왕은 누가인가?

 

 

 

항해의 목표

  • 아시아의 황금의 섬을 찾는 것 
  • 아시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  
  • 중국의 대칸에게 전할 스페인 국왕의 친서도 준비 

선장 콜럼버스의 기함 산타마리아의 복원 이미지, 폭 6.5~8.5 미터 길이 23.7미터 그렇게 크지 않은 배였다. 딱 테니스 코트 크기로 여수의 거북선 크기보다 조금 작다

 

 

 

고난의 항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항해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 배들은 위생 시설이 좋지 못했다 화장실도 없었고 오물로 인한 악취가 심했으며 오랜 항해로 신선한 음식이나 과일을 먹기 조차도 쉽지 않았고 이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한 달간의 항해를 이어가던 선원들은 폭동 직전의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에 콜럼버스는 항해 거리를 약간 줄여서 선원들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또한 선원들에게 아시아의 도착하면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를 강조하면서 선원들을 격려했다. 

 

 

 

 

 

신대륙 발견

카나리아 제도를 떠나 항해 36 일 후 눈앞에 그토록 기다리던 육지가 나타난다. 콜럼버스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 땅의 이름을 ‘산살바도르’ 라고 지었다.  산살바도르 는 성스러운 구세주 라는 의미로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바하마 제도의 일부이다.  콜럼버스가 본 새로운 땅에 모습은 너무나 푸르고 아름다웠다.  콜롬버스는 이 아름다운 곳을 아시아 대륙이라고 생각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아시아로 착각한 이유

이 지도는 이탈리아 천문학자 파올로 달 포초 토스카넬리의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중국과 일본은 있으나 아메리카 대륙은 없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이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콜롬보스는 이곳이 인도라고 철석같이 믿게 되고 이 곳을 서인도 제국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것은 유럽인의 관점으로 유럽의 관점에서 본 방향으로 정해진 용어이다.  

 

 

 

콜롬버스와 원주민의 첫만남

 

원주민들과 콜럼버스의 첫 만남을 담은 그림이다.

 

콜롬보스의 귀항

금을 찾아 헤메던 콜롬버스는 그 지역의 특산 알로에 1000kg을 획득하고 바닷속의 진주를 찾고 나무를 보고 선박용 판자를 공급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금과 향신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항해 중 2척을 잃고 3척 중 가장 작은 ‘니냐’ 호 만으로 귀항하게 된다.   

 

한 척의 배로 함께 돌아갈 수 없었던 선원들을 이스파뇰라 섬의 한 마을에 (지금의 아이티) 라 나비다드에 요새를 만들고 이곳에 선원 39명을 남기고 귀항하게 된다.   

 

명예와 부를 얻은 콜롬버스

귀항길에서 콜롬버스는 왕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과장을 섞어서 편지를 쓴다. 그리고 여왕을 만나 자신의 탐험에 대해 얘기하며 자신이 데려온 원주민 6명과 앵무새 등을 보여주니 여왕은 콜롬버스를 우리의 대양 제독, 인디아스의 부왕이자 통치자로 치켜 불러줬다. 콜롬버스 인생의 황금기였다. 

 

콜롬버스는 여왕에게 원주민과 녹색 앵무새를 하사

 

 

콜롬버스 2차 항해 

6개월 뒤에 1493년 콜롬버스는 9월 25일에 스페인 카디스 항에서 2번째 항햬를 떠난다. 

 

스페인 카디스 항 1495년 9월 25일 2차 항해 출발지

 

 2차 항해에서는 승선한 인원만 1200명 이상이었고 17척의 배로 항해를 떠났고 정착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밀, 채소와 과일 종자까지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남기고 간 선원들을 찾아 이스파뇰라 섬에 도착했을 때 선원 3구의 시신을 보게된다. 섬을 돌아보다가 남기고 간 선원 거의 대부분의 시체를 확인한 콜롬버스는 원주민 족장을 통해 스페인들이 금과 원주민 여인에 대한 탐욕이 너무 강해서 주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실제 무슨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콜롬버스의 식민 도시 건설

이 사건 이후 콜롬버스는 원주민을 가혹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원주민을 동원해 새로운 정착 식민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고 도시 이름은 '이사벨 여왕'의 이름을 딴 '이사벨라 '라고 지었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 탓에 정착하기 쉽지 않았던 이사벨라를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했고 그곳에 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였다. 이후 이곳은 식민 도시의 표본이 된다.  

 

 

정착 식민도시 건설

 

스페인 이주민이 정착하면서 원주민들을 노예로 팔기 시작한다. 식민지 사업이 잘된다는 과시용 사업보고서와 함께 군주들에게 약 550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보내게 된다.  

 

콜럼버스가 원주민을 노예로 보낸 이유는 원주민에게 비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에 하나가 원주민의 식인 풍습이였다.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사람을 죽이고 먹어 치우는 것이다. 순수한 원주민 도 있지만 굉장히 거칠고 식인 풍습을 유지하는 원주민도 있다는 기록이었다.   

 

또한 보고서에 금이 나온다고 과장해 보냈기 때문에 1494년 3월 실제로 약 500 명과 금을 찾으러 쿠바의 남부 해안을 따라 자메이카 까지 탐사했으나 그래도 금과 은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콜럼버스는 원주민을 더욱 잔혹하게 다루기 시작한다. 할당된 임무를 마치지 못한 원주민들에게 손목을 자르는 등의 가혹한 처벌을 행했던 콜롬버스였다.  이런 원주민을 잔인하게 다루는 내용은 스페인 신부 바르톨로 메 데 라스 카사스 의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 썻고 이 보고서에는 이런 잔혹한 수많은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콜롬버스는 이렇게 노예 상인으로  원주민 세계의 파괴자였던 것이다. 이런점 때문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찬양하는 것은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를 찬양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워드 처칠은 말했다.  

 

 

 

 

 

콜롬버스 3차 항해 

2차 항해도 금과 향신료를 얻지는 못했고 스페인의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되던 콜럼버스는 3차 항햬에는 후원이 줄어 선원 226명과 선박 8척으로 줄어든 규모로 향해를 떠났다. 원정대 참여자를 모으기도 힘들었다.  콜럼버스는 3차 항해 때는 반드시 금을 찾아야 된다는 일념으로 항해 루트도 다른 곳인 이전보다 더 남쪽인 카부베르데 섬까지 내려가서 대양 횡단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적도에 더 가까운 지역에 금이 더 많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차 항햬도 온두라스 지역 등 카리브해 주변만 돌다가 성과 없이 끝이 났다.  

 

 

콜럼버스는 금 발견 실패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식민지 반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원주민 학대 혐의까지 있어서 죄수처럼 사슬에 묶여 스페인으로 압송되게 된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고 탐험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한다. 

 

 

 

콜롬버스 4차 항해

결국 이사벨 여왕은 4차 항해를 지원해준다. 1502년 인생의 마지막 기회 콜롬버스의 4차 항해가 시작된다.  어렵게 자금을 융통해 4척의 배를 마련했고 135명의 선원을 태워 출발했지만 허무하게 끝나버린 4차 항해로 귀환을 하게 된다.  

 

4차 항해를 마치고 돌왔으나 자신을 후원했던 이사벨 여왕이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이사벨 여왕의 죽음으로 유일한 후원자를 잃은 콜럼버스는 2년 뒤 1506년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콜롬버스였다.  

 

 

아메리카 이름의 유래

‘아메리카’ 라는 명칭과 콜럼버스는 직접적 연관성은 없다.  '아메리카 '라는 명칭은 ‘아메리고 베스푸치’ 라는 이탈리아 상인에게서 나온 명칭이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 왕실의 후원으로 대양을 횡단한 했던 사람이다. 그는 콜롬버스가 다녀온 이곳이 아시아가 아닐 수도 있다 는 기록을 한다.  그의 열린 생각 때문에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이다. 반면에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이 땅을 ‘인도’ 라고 믿었다.  그래서 발견한 곳을 인디아라고 불렀고 이곳 사람들을 인디언으로 표현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이탈리아 상인, 탐험가) 는 이곳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사람으로 먼저갔던 콜롬버스의 이름이 아닌 신대륙임을 인식했던 아메리고의 이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붙였다.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발견을 인식 했다는 공로를 인정 받은 것이다.

 

 

콜롬버스가 그토록 찾고 싶어했던 인도 항로는 후에 바스코 다가마에 의해 발견된다. 

 

 

콜롬버스 교환 

콜롬버스의 항해는 금을 찾는 목표에는 실패했지만 세계를 뒤바꿔 놓았다고 볼수 있다. 2번째 항해 때 사탕수수 묘목을 이스파뇰라 섬에서 들여와 섬 주변에 사탕수수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은 부를 축척하게 되고 콜롬버스를 통해 두 세계간의 접촉과 왕래가 많아진 것이다.  콜럼버스의 교환은 좋은 것만 교환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치명적이지만 의도치 않았던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도 교환이 된 것이다.  

 

 

2차 항해에 실려온 8마리 돼지들이 신대륙에 적응하면서 오늘날 인디아스에 있는 모든 돼지로 번식 했는데 그 수는 무한하다. 현재도 바하마섬에 돼지들이 많아 신혼여행지로 돼지 섬이라 불리며 많이 찾는 명소이다. 

 

 

 

콜럼버스에 대한 기록들

콜럼버스에 대한 기록은 이탈리아 제노바의 있는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0대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정착 지도제작 및 항해술을 습득했다. 그 후에 스페인의 귀화한 뒤 대양 횡단 탐험을 떠났다는 기록이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콜럼버스의 항해 40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를 개최했다. 기념 행사 중 하나가 콤럼버스의 초상화 전시였는데 71점의 초상화가 그 모습이 모두 제각각이였다. 그 이유는 콜럼버스는 생전에 초상화를 그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콜럼버스에 초상화는 콜럼버스가 죽은 이후에 상상과 추정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콜롬버스의 죽음 

 

콜롬버스는 ''내가 죽거든 신대륙에 묻어 달라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 '' 고 유언했다.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가 맺은 약속이 산타페 협약으로 콜럼버스에게 식민지 총독을 보장하고 그곳에서 취득한 귀금속의 1/10을 준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콜롬버스는 3번의 항해 후 귀금속, 향료가 아닌 담배, 감자등만 가져오고 금을 가져오지 않자 여왕의 신뢰를 잃고 여왕이 죽고 콜롬버스는 총독의 지위도 박탈된 채 사망한다.   

 

콜롬버스가 죽을때 자신을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쪽: 콜럼버스가 총독으로 있었던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속한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쪽)

 

처음엔 노후를 보낸 스페인 북부에 묻혔다가 콜럼버스의 유언에 따라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갔다가 다시 쿠바로 한번 더 이장한다. 그러나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1898년 독립하게 되고 콜럼버스의 묘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지금의 세비야 성당이 최종 정착 무덤이되었다. 

 

콜롬버스가 어디서 죽음을 맞이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다.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세비야 대성당의 콜럼버스의 납골묘가 있다. 관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중세 스페인을 구성하던 네개 왕국의 왕들을 의미한다. (레온의 왕 앞 우, 카스티야의 여왕 앞 좌, 나바라의 왕 뒤 우, 아라곤의 왕 )

 

 

->세비야 대성당 보기 

 

 

콜롬버스는 유럽의 개척정신과 도전을 대표하는 영웅이자 미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도 있고 그를 기념하는 경축일까지 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대항해 시대를 연 영웅이지만 또한 신대륙의 대학살자로 불리며 극단적인 두 가지 평가를 받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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