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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스페인 통일을 이룬 이사벨 1세 여왕

by 365 ^^ 202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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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카스티야 왕국, 여왕 이사벨 1세

(재위 1474~1504)

 

이사벨 여왕(1451년 출생)은 1469년 15세기 조선 성종(연산군 아버지) 과 동시대에 살았던 여왕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였는데 이복 오빠 엔리케(배다른 오빠)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왕권에 위협인 이사벨 가족을 시골로 유배시킨다. 실성한 어머니를 돌보며 천민과 같은 가난 속에 살았던 유년기를 보냈지만 이사벨은 성격이 좋아 절망 속에서도 강인하게 잘 살아간다. 

 

그라나다는 이슬람 세력권임. 

 

시간이 흘러 결혼 적령기가 되자 (이사벨을 정치적 도구로서) 엔리케 국왕은 신랑 후보로 프랑스나 포르투갈왕에게 시집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벨은 영토확장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아라곤의 왕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고 그에게 청혼 서신을 보낸다. 이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도 바로 승낙을 한다.

 

 

그러나 포르투갈을 생각했던 오빠 엔리케 국왕은 격분하게 되고 결혼을 반대하자 카스티야 왕국에서 탈출해 바야돌리드 지역으로 피신한다. 그 소식을 듣고 페르난도 아라곤의 왕이 상인으로 변장해 카스티야에 잠입한다. 그 후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1469년 극적으로 결혼을 한다. 

 

 

스페인 통일

국왕의 허가 없이 부부가 됐지만 5년 후 엔리케 국왕이 병으로 사망한 후 이사벨1세는 카스티야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렇게 두 나라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은 스페인으로 합병하고 공동으로 통치하면서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국왕부부이다.

 

이사벨 여왕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스페인을 결속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화폐주조권과 세금징수권을 되찾는데 성공

 

 

이사벨 여왕의 종교박해

 

이사벨 여왕부부는 가톨릭 이외의 모든 종교는 사악한 이교도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그래서 콜롬버스도 영향을 받아 원주민에게 엄청난 박해를 했으며 카스티야에 머물던 유대인과 아랍인에게 개종을 명령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종교재판소'를 열어 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마녀재판처럼 죽이고 이 종교재판소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이사벨 여왕의 숙원 중 한가지도 자신의 나라를 가톨릭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였고 그렇게 그라나다에 있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스페인에게 중요했던 1492년 

 

레콩키스타 완성 (스페인 재정복) 

무하메드에 의해 7세기 초 창시된 이슬람은 급속도로 아랍으로 퍼지게 되고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한 후 순식간에 남유럽 스페인까지 지배를 당했는데 이슬람과 싸우기 위해 국토회복 운동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 벌이고 마지막 남은 이슬람 점령지 동남부 '그라나다'만 남게 된다.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로 출정하고 8개월이 넘는 격전 끝에 그라나다를 정복하고 궁전을 포위하게 된다.

 

 그라나다 함락 후 알람브라 궁 열쇠를 넘겨 받는 백마탄 이사벨 1세 여왕/ 레콩키스타 ( Reconquista ) 재정복이라는 스페인어 (=국토회복전쟁 711~1492) 에스파냐 카톨릭교  VS 이슬람교 전쟁

 

이슬람 보압딜왕이 항복하며 자신들이 세웠던 궁전 열쇠를 넘기면서 궁전만 파괴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고 그 궁전이 바로 '알람브라 궁전'이다. 

 

 

알람브라 칙령 (1492년 3월)

이슬람세력을 몰아내고 스페인에 남아있던 유대인을 개종을 종용, 원치 않을 경우 재산을 놓고 4개월 이내 떠나라고 한다. 당시 유대인은 다수가 금융, 상공업,유통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7만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추방하니 스페인 경제는 침체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 후원

 

이사벨라와 남편 페르난도는 안에서는 스페인 통일, 밖으로는 이슬람 세력을 정벌한 년도가 1492년으로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가 된다. 숙원 사업들을 해치운 이사벨 1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찾아온 콜롬버스가 서쪽으로 계속 가다오면 인도를 만날 것이라고 주장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동쪽은 이슬람 세력이 지배해서 인도, 중국의 육상 교통로를 막아놨기 때문에 배를 타고 인도행 새 무역로를 개척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이사벨은 대서양의 해상권을 장악할 생각으로 콜롬버스를 믿고 후원을 한다. 그리하여 1492년 콜롬버스가 인도를 찾아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그라나다 중심가 광장에 이사벨 여왕과 콜롬버스 산타페 협약을 기념하는 동상

 

콜롬버스는 서쪽으로 항해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이에 거대한 신대륙 아메리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콜롬버스는 자신이 도착한 곳을 인도로 착각, 서쪽에 있는 인도 '서인도제도'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당연히 향신료 등은 없었고 그 대신 2차 원정에서 원주민의 금을 탈취 그렇게 원주민과 자원들을 싣고 스페인으로 당당하게 귀환한다. 

 

콜롬버스가 바르셀로나로 와서 이사벨 여왕을 만나서 금과 노예를 바치는 그 장면

->콜롬버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과정, 의미

 

 

이사벨 여왕의 죽음

이후 1504년 이사벨 여왕은 5명의 자녀(딸 4, 아들 1)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 이사벨 여왕은 당차고 대담한 여성이었고 역대 왕중 누구도 하지 못한 스페인을 통일한다. 남편조차 반대했던 콜롬버스의 신대륙 항해를 후원했던 여왕으로 후대의 역사를 크게 바꿔놓았던 인물이다. 또한 이슬람을 몰아내고 국토를 회복하며 재정복을 이룩한다. 이런 업적들을 그녀는 자랑스러워했고 그녀는 그라나다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에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의 무덤이 있는 곳 
 딸 후안나, 사위 필리페 1세, 외손자까지 왕실가족 모두가 묻힌 곳이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이다. 

 

이사벨 여왕의 자녀들은? 

이사벨 여왕의 포루투갈로 시집간 큰딸 이사벨은  일찍 죽고 , 딸 후안나(광녀 후안나로 알려짐), 아들 후안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시집, 장가를 간다. 그러나 후안은 얼마 뒤에 사망하고 후안나의 남편 필리페 1세도 죽자 후안나는 남편의 관을 끌고 다닐 만큼 사랑했다고 해서 광녀 후안나로 불렸고 이들 사이에 아들 칼 5세(독일)=카를로스 1세(스페인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이룩한 왕), 막내딸 캐서린은 영국으로 시집가 헨리 8세와 결혼한 비운의 여자로 딸이 블러드 메리 1세 (피의 메리)이다.  

 

이사벨의 자녀들은 모두 이사벨 여왕의  영향을 받아  광적인 가톨릭 신앙을 이어받아 칼 5세때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딸들로 가톨릭 수호를 위해  엄청난 탄압을 한다. 

 

[출처 선녀들 14, 걸어서 세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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