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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이 인도항로 개척 이유

by 365 ^^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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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라는 말은 일본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래는 Age of discovery (발견의 시대)라 일컬으며 유럽의 관점에서 불렀던 말이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신 항로 개척이라고 사용한다. 신 항로 개척 시대는 상당히 중요했던 시대였다. 변방이었던 유럽이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시기였고 반면 아시아 등은 고난의 역사 시작이었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이 통합되는 세계화가 시작되는 대항해 시대였다. 

 

 

또한 유럽의 천연두가 아메리카로 전파되는 질병의 세계화, 질병의 전파와 더불어 유럽인들의 학살에 의해 아메리카 인구가 줄었고 농업 생산량이 줄어든다. 그로 인해 전 지구의 이산화탄소 함유량이 감소되는데 현재 남극 빙하 층에도 당시의 흔적이 존재한다.  아메리카 인구 감소의 나비 효과가 지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 위치

대항해 시대의 포문을 연 포르투갈은 유럽의 서남부 가장 끝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스페인,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만나는 천혜의 풍광과 향기로운 와인이 일품인 나라이다. 그러나 13세기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약소국이었고 그런 포르투갈이 15세기 초 대서양과 인도양을 가로질러 인도로 향했다. 

 

 

대항해 시대 배경 

15세기 유럽인들의 주식은 빵, 감자와 함께 고기였다.  당시 고기의 조리법은 단순해서 이런 밋밋한 고기에 맛을 한층 올려줬던 것이 후추였다. 그리고 이 후추의 최대 생산지가 인도였다. 후추를 얻기 위해 바다를 건너 인도로 향했다.

 

 

유럽에서 후추의 가치

2021년 후추 한줌의 가격은 4000원 정도이다. 그러나 당시 후추이 가격은 사파이어 반지 2개 정도의 가격이었다. 15세기 후추 1kg의 가격은 인도에서 금화 3두카토에서 중간 유통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면 가격이 20배가 올라 68두카토였다.  이것이 유럽 무역 거점 베네치아로 가면 150두카토로 오른다. 거기서 포르투갈로 건너오면 원가의 약 150배인 400~450두카토 치솟는다. (1 두카토는 금 한돈 가격으로 25만원 정도 후추 1kg 현재 가격으로 약 1억원) 

 

 

초기에는 맛과 희소성 때문에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각광을 받았던 후추는 귀금속만큼이나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실이나 귀족들의 연회에서 후추가 가득 묻은 음식이나 후추를 가득 쌓아 놓고 파티를 했다. 그 문화가 이어져 후추가 과시되던 문화로 유럽 레스토랑 테이블에는 소금과 후추를 놓았고 자신의 레스토랑이 고급이라는 점을 알렸다.

 

 15세기 유럽에서 힘. 부의 상징이었던 후추 /후추는 식재료 뿐만 아니라 약, 방향제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재력이나 귀중품 등을 과시하는 행위의 수단으로 후추가 사용되었다.

포르투갈이 후추를 찾아 나선 이유 

그러나 비싼 후추 가격이 더 폭등하면서 유럽 전체가 페닉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슬람 오스만제국이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까지 장악하면서 무역로를 장악하게 되고 후추의 무역로에 높은 통행세를 요구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후추 가격의 폭등으로 인해 바다를 건너 직접 인도행을 결심한다. 

 

후추는 인도와 같이 아열대의 기름진 농토에서 잘 자란다. 포르투갈은 후추 재배에 부적합한 척박한 땅으로 당시 15세기 인구 100만명의 약소국이었다. 내륙으로 진출하고 싶었으나 스페인 카스티야 공국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뚫고 후추를 찾아 부강한 나라가 되길 원했다. 

 

711~1249년까지 포르투갈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로 이슬람과의 투쟁 과정에서 기독교적 신앙심이 높아졌다.  또한 당시 기독교 적인 전설에는 동방에는 전설의 기독교 왕국이 있다고 믿었고 이 세력과 합쳐 이슬람 세력을 물리쳐 보고 싶다는 종교적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정치, 종교 등 다양한 이유가 얽히며 포르투갈이 바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인도항로 개척 준비

보자도르 곶은 아프리카 서사하라 인근 북위 26도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무서운 바다 항해의 한계점으로 알려져 있던 곳이다. 이곳 너머에는 물이 끓어오르고 괴물이 산다고 믿고 있었다. 보자도르 곶 너머는 모르는 세계였던 것이다. 이런 뱃사람의 심리적 마지노선 미지의 검은 바다를 포르투갈이 뛰어 넘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15세기 엔히크의 카라벨 연구

대항해 시대의 33명의 인물이 새겨진 발견 기념비는 포르투갈 리스본에 위치해 있다. 1419년 포르투갈 남부 사그레스에 항해 전문가들을 집결시켜 보다 멀리 보다 안전하게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항해 기술을 연구했다. 

 

당시 유럽인들의 배는 사각돛으로 돛의 방향을 바꾸기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삼각돛은 먼 바다로 안전하게 항해가 가능했다. 돛대가 하나로 방향 전환에 유리해서 정면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삼각돛에 의해 바람이 휘고 비스듬히 전진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역풍에도 돛의 방향을 바꾸며 지그재그모양으로 항해가 가능했던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보자도르곶에서 남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코리올리의 효과로 바람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휘게 된다.  이것을 무역풍이라고 하는데 포르투갈이 있는 위도 38도에선 동쪽-> 서쪽 이동이 어렵다. 그러나 초기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해를 통해 바다의 바람을 알게 됐고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전수되어 다음 항해와 콜럼버스의 항해도 가능해졌다. 

 

코리올리의 효과란? 

지구의 자전때문에 지표면에서 운동하는 물체가 북반구에선 오른쪽으로 남반구에선 왼쪽으로 향하게 되는 현상 

 

위치 파악 도구 

이들은 카말을 사용해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했는데 아랫면은 수평선에 윗면은 북극성에 맞췄다. 북극성의 고도가 높다면 판자를 가까이해야만 하고 북극성의 고도가 낮다면 판자를 멀리 해야만 했기 때문에 나무판이 몇 번째 매듭에서 수평선과 북극성에 맞춰지는지를 계산해서 위도를 알아냈다.  매듭은 지구본의 위도선으로 인식하면 된다. 0칸이면 북극 10칸이면 적도, 하지만 경도를 몰랐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 파악은 불가능했다. 경도계는 18세기 중반에야 발명되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유난히 똑똑하거나 특출했던 것은 아니고 아랍의 지배를 받아서 아랍 문화권의 지식과 기술인 카라벨, 카말등도 아랍의 지배하에 전수되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도전을 통해 미지의 섬을 발견하면서 바다에 대한 용기를 얻게 된 포르투갈은 1434년 열 다섯번째 시도만에 보자도르곶 항해에 성공한다.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곶

1460년 엔히크 왕자는 사망한다. 이후에도 계속된 도전과 노력으로 1488년 인도를 찾아 항해 중이었던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 대륙을 따라 남하하던 중 거센 풍랑과 만나게 된다. 13일 간의 표류 끝에 기적처럼 육지를 발견한다. 이는 포르투갈을 떠난지 반 년만의 쾌거였다. 디아스는 발견한 땅을 조국의 영토로 삼는다. 미지의 대서양에 도전한지 70년만에 인도로 가는 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위치한 희망곶(Cape of Good Hope) 도착에 성공한다. 

 

 

13일간의 표류로 고생했던 디아스는 발견 당시엔 이곳을 폭풍의 곶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후추를 찾아 동쪽으로 더 가고 싶었으나 반년 가까이 이어진 항해로 지친 선원들의 반대로 항해를 멈추게 된다.  

 

항해 중단

당시 선원들은 괴혈병에 노출이 되어 있었다. 이 병은 비타민C 결핍으로 생기는 병으로 대항해 시대 오랜 항해로 인해 피로, 열악한 여건에서 발생하는 병이다. 또한 휴식없이 장기 항해로 인한 스트레스로 면역력 저하로 이어져 발병 위험성이 높아졌다. 괴혈병은 비타민 C가 농축된 레몬, 라임 등 과일 섭취로 예방이 가능한데 당시는 괴혈병의 실체도 밝혀지지 못해 많은 이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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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가 항해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고 스페인이 먼저 인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으나 실제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아메리카 서인도제도 산살바도르섬의 작은 섬이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의 인도항로 경쟁에 뒤쳐진다는 생각에 조급해졌고 이에 교황은 아프리카 서쪽의 카보베르데 제도를 기준으로 해서 1494년 서쪽 약 1500KM 떨어진 곳을 기준으로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의 영역임을 알리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인해 동쪽에 브라질은 포르투갈 식민지가 된다. 그래서 남미 중 유일하게 아직도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이다. 

 

바스코 다가마 인도 항로 개척

1497년 7월 8일 바스코 다 가마는 170여명의 선원을 태운 세척의 범선이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항해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1498년 5월 출항 11개월 만에 드디어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다. 미지의 바다에 도전한 80여년의 여정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 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는 엔리케의 도전부터 80여년 만에 인도에 도착한 것이다.

 

인도에서 교역 실패

캘리컷에 도착한 바스코 다가마는 포르투갈 왕이 하사한 보물 상자를 들고 캘리컷 왕을 만나 교역을 원했다.  포루투갈의 선물은 당시 유럽의 옷감은 양모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모직물로 외투, 모자, 설탕, 세숫대야등이 였는데 따뜻한 나라에 외투와 모자는 맞지 않았다. 당시 아시아는 면화, 비단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들은 금을 원했다. 아시아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 없었던 당시 유럽은 오랜기간 동안 큰 골칫거리가 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남미 , 아프리카에서 금.은을 수탈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교역을 시작했다.  당시 캘리컷 교역을 장악했던 사람은 아랍 상인들이였다. 그들은 바스코 다가마 일행을 해적정도로 생각하며 반감이 컸다. 

 

인도에서 되돌아 온 후 상황

빈약한 교역품과 더불어 아랍상인의 훼방으로 무역협정체결은 실패하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170여명의 선원 중 1/3만 생존할 정도로 힘든 여정이었다. 

 

바스코 다가마 일행이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소량의 향신료와 보석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이 원정비용의 60배로 뛰었다.  이것은 직접 원산지에서 가져올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것이었다.  이렇게 막대한 부를 가져올 수 있다면 도전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이후 인도 항로 개척으로 향신료 무역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른 유럽의 여러나라들이 앞다투어 뛰어드는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었다. 

 

[3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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