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유럽인들은 중국에서 건너 온 달콤한 차 맛에 빠져있었다. 1668년 교황 클레멘트 9세가 스웨덴 여왕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서 연회장을 설탕 조각상으로 가득 채운 후 연회 마지막 날에는 설탕 조각상을 깨뜨려 나눠 먹었다. 그래서 당시 귀족들의 이가 새까맣게 썩었다.
설탕 원료는 아프리카의 단풍나무, 야자나무, 수수, 포도 등에서도 얻었지만 주로 사탕수수(sugar cane)에서 추출했다.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사탕수수는 지중해 일부지역으로 전해지고 유럽인들은 사탕수수를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 등으로 이식했다. 많은 양의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른바 플랜테이션 농장이 등장한다.
이곳에서 아프리카 노예를 노동력으로 쓰면서 노예 무역이 활발해진다. 이렇게 생산된 설탕,커피, 담배, 은 등으로 유럽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삼각 무역이 형성된다.
아프리카 내에도 노예 제도는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 아프리카 풍토병 때문에 유럽인들의 내륙 출입이 불가능해서 서아프리카 해안에 팩토리를 짓고 아프리카 내부의 노예상들과 거래를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노예를 매매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항해 시대로 접어들면서 노예를 훨씬 더 무자비한 폭력과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면서 한 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노예화하는 비극적인 일이 시작되었다.
노예 선박 브룩스 호 실체
흑인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가는 과정은 너무나 참혹했다. 짧게는 2개월 길게는 6개월 이상 걸리는 기나긴 항해였다.
노예선의 자리 배치
어린이와 여성, 남성에 따라 할당된 공간이 정해져 있었다.
당시 노예선들은 보통 100~300톤의 소형 선박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물건처럼 선체 가장 아래에 실렸다.
세로가 183 cm 가로가 43cm 여자 아이의 경우는 세로 122, 가로 36cm 의 좁은 공간에 갇혀있어야 했다.
노예들이 자리한 배 아래 쪽은 산소가 부족해 촛불도 저절로 꺼질 정도였다. 하루에 1~2번 옥수수죽을 먹고 용변도 누운 채로 해결했다. 이질, 티푸스, 홍역, 천연두 등 질병 확산은 당연했고 항해 중 사망률 평균 14.5% 최대 33%에 달했다.
이런 사안의 심각성을 노예상들로 인지를 하고 있어서 흑인 노예의 사망, 실종으로 인한 손실을 보상해주는 보험이 생겨났다.
1781년 영국 리버풀 출항, 자메이카로 향하던 종(ZONG) 호는 노예를 싣고 항해를 하던 중 항로를 착각해서 자메이카를 지나쳐 버리게 된다. 이에 보급품과 물이 바닥나고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하면서 선장과 선원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예 133명을 산 채로 바다에 던져버린다.
당시 배에서 노예가 사망하면 선주의 책임을 물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가 실종되면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목숨을 건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더 끔직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가장 많이 동원 된 남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농장이었는데 낮에는 4M가 넘는 사탕수수를 베고 밤에는 사탕수수 압착기로 즙을 짜냈다. 그 후에는 60가 넘는 솥에 짜낸 즙을 넣어 끓이고 설탕 결정을 만들어 내야 했다.
하루 18시간이 넘는 밤낮없는 고된 노동과 폭력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영국이 운반한 노예수는 연간 4만 7천명정도 150년 동안 340만 명을 데려온다. 영국의 리버풀은 노예 무역으로 성공한 도시이고 대서양과 가까웠던 작은 어촌이 지방 도시로 성장한다.
버밍엄, 셰필드, 맨체스터는 노예무역을 통한 수출품인 총, 면직물, 렌즈, 칼등을 아프리카로 수출해 이익을 얻으며 활기를 띄기 시작하고 산업혁명의 모태가 되는 도시로 성장한다.
서인도 제도의 야만 1791년 제임스 길레이 작으로 석탄을 태우듯 사람을 갈아넣어 만들어낸 부 라는 의미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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