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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전태일 열사 분신 노동운동 신호탄(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남긴 것)

by 365 ^^ 2021. 12. 16.

1960년대가 4.19로 시작되었다면 1970년대는 경부고속도로와 전태일 사건이 문을 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제성장의 상징과 한강의 기적을 이끈 노동자의 삶을 상징하는 전태일은 스스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을 했던 나이가 22살이었다. 분신을 하면서까지 알리고자 했던 메세지는 무엇이었을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는 1996년 "A Single Spark"(하나의 작은불씨)으로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도 진출했는데  너무나 적절히 번역된 영화 타이틀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노동운동의 신호탄이였고 한국 노동운동의 많은 사건들을 모두 모은것 만큼의 의미가 있다고 볼수 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분신장면


1995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년 개봉)에서 전태일 역으로 최연소(20살) 춘사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홍경인 배우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전태일 열사


1962년 시작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마침내 1971년 10억 달러 수출액을 달성하며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게 되지만 고속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어둠이 있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게 일했던 이들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 일기장

평화시장 
전태일이 일했던 동대문 평화시장은 동대문 의류 시장의 원조로써 1962년 개장을 했다. 6.25 전쟁 이후 실향민들이 청계천 변에 판자촌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그곳에서 미군 군복과 담요등을 옷으로 개조해서 팔기 시작했고 1958년 대대적인 청계천 복개 공사 시작으로 판자촌을 철거한 후 그 부지에 상인들이 정부에서 땅을 받아 설립한 시장이 평화시장이었다. 건물 2,3층에서 옷을 제작하면 1층에서 판매하는 구조로 500여 개 업체에 노동자만 무려 2만여 명에 달했다.

 

1960년대 평화시장 모습
전태일 열사 평화시장 앞 분신 장소
당시 평화시장 봉제공장 모습

평화시장에서는 전국으로 공급되는 의류의 70%를 생산했다. 경제 성장의 희망이었던 이곳에는 지옥같은 다락방과 2만여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성장 제일주의에 가려진 근대화 바람의 그늘에 가려진 평화시장이었다. 

열악한 작업환경
1964년 봄 서울 평화시장에 견습공(=시다)으로 취직한 전태일은 당시 평화시장의 작업장은 좁고 어두운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일명 벌집 공장(=닭장)이라 불렸던 다락방이었다. 칸막이를 설치해 만든 2층 다락방을 만들고 실제 작업장은 8평정도 되었고 3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1평당 4명의 사람이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좁고 답답한 것 외에도 창문이 없어서 대낮에도 햋볕이 전혀 들지 않는 환경이었다.

 

조명은 백열등 한두개 뿐이었다.
벌집공장=닭장이라 불리던 공장내부
더욱 심각한 것은 작업 중 발생하는 먼지였다. 작업장에는 환풍기조차없어서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왔고 작업을 하다가 도시락을 먹으면 밥 위로 까만 먼지가 잔뜩 내려앉았다.

잠깐 일하는 것도 힘든 이곳을 아침 8시~밤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의 엄청난 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점심시간은 고작 30분이었고 화장실 사용을 줄이기 위해 공장주들은 음료 섭취 및 국물 섭취를 금지시켰다. 1964년 견습공으로 일한 후 받은 일당은 50원이었다. 당시 커피 한잔 가격이 30원, 설렁탕 한 그릇 값은 60원이었다. 전태일 일기를 보면 당시 하루 하숙비는 120원이었다. 

 

 

또한 노동자 중 절반 이상은 12~17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무거운 원단을 지고 다락방을 오르락 내리락 했으며 손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고된 노동을 했다. 쪽가위를 사용하느라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실밥을 뜯어야 했던 소녀들이다. 심지어 사업주들은 노동자에게 잠을 쫒는 각성제를 투여하거나 주사를 맞추기까지 했다. 

 

전태일 일기장에 쓴 노동의 고통

 

형편없는 노동환경으로 미싱사 90%가 신경통, 소화불량, 폐병등에 걸려 있었지만 그마져도 회사에서 해고될까봐 알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1970년대 노동환경 만들어진 이유 

당시 수출 주력 상품은 가발,의류였고 이것은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노동자의 저임을 유지시켜 상품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저곡가정책을 실시 이로 인해 농촌이 붕괴되어 농민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이들이 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이었다. 

노동력이 많아지기 때문에 임금은 낮게 유지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평화시장의 임금제는 월급제, 고정급이 아닌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도급제였다. 

반면에 경영자들은 평화시장 주식회사를 만들어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 전체적으로 저임금제도를 유지시키고 있었다. 당시의 구조에서 노동자 개인의 환경 및 노동조건 개선 활동은 불가능했다. 견습공들이 일당 50원 받을때 업주들은 점심값으로 200원을 사용했다. 고속성장의 성과는 2만여명이 넘는 노동자를 착취한 결과였던 것이다. 

 

 

전태일의 밑바닥 삶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라 7살에 무작정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대구에서 봉제업을 하다가 몇번 실패하고 서울에 올라와 여기저기 봉재공장을 다녔으나 수입이 마땅치 않았다. 어머니는 연천교 밑에서 노숙을하며 동냥으로 삶을 이어갔다. 1960년에 아버지 전상수씨가 사기를 당하면서 가족은 큰 천막촌으로 쫓겨났다. 

 

전태일 가족사진 2남2녀  오른쪽 아버지 전상수, 어머니 이소선에게 안긴 동생 전태삼, 그 옆에 전태일

이때부터 전태일은 가족의 생계를 떠맡았고 그의 나이 13살이였다. 전태일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했기 때문에 거리로 나서야 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들어가기 전(1965년)까지 우산장수,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닦치는데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고 이런 힘들었던 경험에 비추어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한 전태일이었다.

 

전태일의 성품
이들은 퇴근을 못하고 그곳에서 옷감을 덮고 잠들기도 부지기수였다. 전태일은 자신의 차비로 산 풀빵을 견습공들(=시다들)에게 주고 본인 자신은 돈이 없어 동대문-도봉산 자신의 집까지 약 12km를 3시간정도 걸어서 퇴근하다가 통금시간에 걸려 자주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과 함께 일하던 어린 견습공들을 식당에 데려가 본인은 안 먹고 견습공들만 사줬다. 

 

자신의 차비로 산 풀빵을 어린 견습공들에게 준 전태일

 

전태일의 꿈 
어린 견습공들을 돕기 위해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작은 기업은 공장장이 재단사 겸직이 가능했고 1964년 견습공으로 일하다 2년 만에 미싱사가 된다. 당시 미싱사 월급은 7000원이었다. 그러나 재단사가 되려면 재단 보조(1966년)부터 시작해야 했고 보조의 월급은 3000원이였는데도 재단사가 되기 위해 미상사 월급을 포기했다. 재단사의 권한은 노동자들의 채용, 해고가 가능했고 공장의 매출에 큰 영향을 주기때문에 공장주도 함부로 할수없었다. 



1960년대 말에도 근로기준법이 존재? 
1953년 한국전쟁 중 근로기준법이 제정된다. 부산으로 피난간 부산 임시국회에서 제정이 되었는데 선진국의 노동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제정되었다. 요즘의 노동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노동법이었으나 이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근로기준법(1953.8.9.시행) 

제 42조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에 8시간 1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단 당사자의 합의에 의하여 1주일에 60시간을 한도로 근로할 수 있다. 

제 45조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휴일을 주어야 한다. 

제 56조 여자와 18세 미만자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의 사이에 근로시키지 못하며 또 휴일근로에 종사시키지 못한다. 

 

전태일 근로 기준법 알게 되다.
1967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노동법 관련 책을 구입하지만 그 책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읽을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만 다녔던 전태일은 3년 동안 독학으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바보회 결성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이해한 후 1969년 재단사를 모아서 '바보회'를 결성한다. 법이 있는데 그것을몰랐다고 해서 바보회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바보회의 첫 사업은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환기장치, 조명시설, 화장실 개수까지 직접 발품을 팔아 조사를 실시했고 이 결과를 가지고 노동청의 근로 감독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러 간다. 


그러나 무심한 근로감독관의 태도에 실망하게 된다. 사업주 뒤에 있는 거대한 조직을 알게 된 전태일이었다. 사업주와 근로감독관의 결탁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태일은 해고된다.

 

전태일이 노동청에 제출했던 자료

전태일은 태일피복이라는 사업을 위한 시장조사부터 제품구상까지  타업체 대비 3배 높은 임금을 책정한 것은 물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구상한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업자금 3000만원을 구할 수 없어 꿈이 좌절된다. 

 

전태일의 결단서와 삼동회 결성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은 분신 3개월 전 결단을 내린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라고 마지막 일기장에 결단서를 썼는고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바보회를 해체하고 평화,동화, 통일 3개 시장 재단사들의 새로 만든 단체이다.  이후에 전태일은 평화시장 실태를 알리고자 노동청장에게 진정서를 넣고 적극적으로 이를 언론사에 제보하면서 드디어 언론에 평화시장의 실태를 알리는 언론이 보도가 된다.

 

당시 경향신문에 실렸던 평화시장 노동환경 실태 기사

당시 1970년 경향신문에 실린 평화시장의 실태 신문기사이다. 1971년 대선을 앞둔 시기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때였고 그 기사가 나온 2주 뒤에 노동청 국정감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근로환경 개선을 약속한 노동청이었다.

 

근로조건 개선진정서 제출

 

그러나 국정감사 끝나자마자 노동청과 사업주는 말을 바꾸며 근로환경개선이 힘들다고 태도를 바꿨다. 그 후 2번 더 시위를 했으나 중부경찰서의 방해로 끝이난다.

 

 

 

전태일 분신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근로기준법에 대한 배신감에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에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했다. 구호를 제창 후 근로기준법을 태울 계획이었으나 그 시간에 동료들은 잡혀가고 모였던 소수의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구타를 당한다.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린 시위였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던 전태일은 건물을 내려왔고 이때 전태일은 품었던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자신을 분신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분신 장면 "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 소리치며 고통에 몸부림 치면서도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전태일 마지막 유언
병원에 누워있는 전태일은 온몸이 녹아내려 숨을 쉴수 조차없는 상태였고 그 와중에 어머니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노동자들은 암흑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서 그 깜깜한 하늘에 작은 구멍을 하나 뚫은 거예요, 어머니가 남은 평생 동안 그 구멍 조금만 넓혀주세요, 어머니 꼭 약속해주세요, 혼자 하지 마시고요 노동자들, 대학생들과 같이해주세요 " 

 

아들의 마지막 모습에 차마 대답할수 없었던 어머니였다. 꼭 약속해주세요.. '꼭'이라고 말할적 마다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나왔고 이에 어머니는 '꼭 그렇게 하마'라고 대답했다. 아들의 유언에 따라 전태일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유언을 따라 노동쟁의 현상 민주화투쟁현장 등 평생 투쟁현장에 항상 계셨다. 

 

전태일 어머니 고 이소선/ 전태일이 죽고 난 이후 노동청 관계자들은 빠른 수습을 위해 돈을 가져왔다. 그러나 어머니와 가족들은 끝내 그 돈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전태일이 죽은 14일 후 평화시장 2층에 청계피복노조 조합이 생겼다.
전태일 어머니는 2011년 전태일 아들곁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는 절대 죽지말고 싸워야 합니다. 노동자에게 꼭 이말을 당부했다.

 

당시 전태일 열사의 분신 자살은 지식인들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종교계 뿐만 아니라 사회가 외면해 온 노동현실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켜 그의 죽음 이틀 뒤부터 대학가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단식농성, 집회등이 이어졌다.

 

전태일 14주기 추도행사 84년 11월 연세대

 

18살에 오빠를 떠나보낸 여동생 전순옥은 영국에서 공부한 후 노동학 박사가 되어 귀국 후 조영래 변호사가 남긴 전태일 평전을 10년에 걸쳐 영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한편 지금도 창신동 일대의 열악한 영세 작업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참여성 노동복지터를 오픈했다.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 박사
전태일 평전을 영문판으로 번역한 전순옥 박사

 

전태일 열사 서거 50년이 지난 지금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 희생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전태일 무덤이 있는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모역 

[출처 : 꼬꼬무/ 역사저널 그날/kbs 역사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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