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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Ax Murder Incident) & 폴 버니언 작전

by 365 ^^ 2020. 7. 4.

JSA(Joint Security Area:공동경비구역)는 크게 3번의 전환점이 있다. 

  1. 1953년 정전협정-군사분계선을 넘어 대화가 가능했던 시절, 70년 이전에는  국군, 미군,북한군 할것 없이 비무장에 가까운 상태 유지 
  2.  1976년에 도끼 만행 사건으로 인해 군사분계선이 추가로 그어지고 그때부터 판문점에 콘크리트벽과 말뚝도 설치해서 서로 오가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서 76~2018년까지는 남,북 군인들이 중무장으로 판문점 경비를 섰다.
  3.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으로 JSA 비무장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현재는 화기도 철수 시키고 비무장화가 완료되어 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영화 JSA 도입부에 배경이 됐던 다리)

 군사분계선(=휴전선)에는 철조망이 없고 표지판을 세워 군사분계선이 지나감을 표시한다. 

군사분계선 표식판- 임진강부터 동해까지 무려1292개가 설치되어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이 다리를 통해 포로 송환이 이뤄졌던 다리다. 한번 건너면 돌아 올 수 없다고 하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불리게 됐다. 남북적십자대표들이나 북한군 판문점 대표들도 드나들었던 왕래가 가능했던 다리였다. 

 

사천강을 다라 군사분계선이 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기념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Ax Murder Incident)

 

미루나무 한 그루가 불러온 남북 공동 경비 구역 최초의 살인 사건이다. 옛날에는 판문점은 다른 군사 분계선과 달리 남.북 군인이 서로 왕래가 자유로웠던 곳이고 경계선도 없었다. 

 

1976년 이전에는 JSA에서는 북한 병사와 왕래가 자유로웠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이 경제적으로 잘 살아서 북한군도 여유가 있어서 국군에게 먼저 농담도 걸고 자유롭게 왕래하며 우정을 쌓은 남북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1976년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의 미루나무로 인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한은 전쟁직전가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3초소 (하늘색 초소:다리 남측에 위치했던 남한 초소)와 3초소를 관측하기 위한 5초소가 반대편 언덕 위에 있었다.
남한 초소 중 북한과 가장 가까웠던 초소가 3초소였고 주변으로 북한군 초소로 불러싸여 있었고 혹시 모를 사건 사고를 대처 기 위해 3초소 상황을 관측하던 5초소가 있었다.
무성해진 미루나무가 5초소의 시야를 차단해서 유엔사 전방 지원 부대는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시도했다.
당시 판문점의 미루나무(Poplar tree)는 심은지 25년 된 나무로 추정하고 있고 약 15m (아파트 5층 높이)까지 폭풍성장하는 나무로 빠르면 일년에 5m까지 성장하는 나무
그런데 북한 경비병이 다가와 가지치기를 하지 말라고 했고 북한 경비병의 협박으로 남측은 가지치기를 중단하고 일단 철수를 했다.

그 이후 문제의 1976년 8월18일

 2명의 미군장교들과

우리나라 노동자, 그리고 경비군은 

다시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데 

 

북한은 미루나무가 가로수로 많이 있다. 

 

북한군 중위 박철이 나타났다. 

박철 중위 별명이 불독이었다. 공동경비구역에 사고가 나면 항상 박철이 중심이었다. 

 

박철은 다가와 중단하라고 불편한 심기를 보였지만 우리 측에서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작업을 했다. 그러자 박철의 지시를 받은 북측 연락병들은 지원군 3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들은 각목와 같은 무기를 들고 와서 무차별로 폭행을 시작했다. 인부들은 피신 도중 손도끼를 떨어뜨리고 도끼를 주운 북한군은 미군을 쫓아가 잔인하게 도끼로 미군 장교 보니파스 대위를 도끼로 얼굴을 찍어 죽였고 바렛 중위는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다.

 

북한군은 갑자기 달려와 남한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참혹한 현장이 고스란히 사진 속에 담겨 있는데 
차 앞에 헬멧이 떨어저 있고 그 곳에 보니파스 대위가 쓰러져 있다. 당시 도끼에 여러번 맞은 보니파스 대위의 얼굴을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있었다. 이날 베럿 중위도 도끼에 맞아 숨져있었다. [5관측소에서 찍은 사진]
휘두르는 모습이 꼭 백정이 짐승을 잡을 때의 모습/ 보니파스 대위가 이동하고 북한군들은 이미 북한 초소로 도망갔다.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도끼
보니파스 대위의 귀국 이틀 전이었으며 배럿 중위는 부임한지 약 한달째였다.
사방이 북한군 초소로 둘러싸인 제 3초소 /엄밀히 말하면 미루나무는 un군 소속의 땅이었다

미국의 복수 폴 버니언 작전

 

사건 발생 이틀 후 장교의 시신은 본국으로 보내졌고 휴전 이후 23년 만에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첫 살인 사건의 충격은 엄청났다. 미국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복수를 위해 폴 버니언 작전을 세운다

 

미국의 나무꾼 설화 속에 나오는 폴 버니언


'아예 미루나무 밑동을 잘라버리자 ' 


미국은 작전 실행에 앞서 북측이 보일 맞대응에 대비해 한반도에는 전투 준비태세 데프콘 3까지 발령되었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마인드였다. 그때  전시 상황에 버금가는 전력이 대동되었다. 정말 무서운 상황이었다.

 

DEFCON 3단계 Round House 전쟁 태세 의미로 김신조 사건, 아웅상 테러때 데프콘 3가 발령되었다.

 

데프콘 상태란?
데프콘(DEFCON:Defense Readiness Condition) 적의 도발에 대한 방어 준비 태세로 테프콘은 모두 5단계이다. 

● 5단계- 가장 하위로 Fade out(장막이 걷히다: 안전한 상태) 분단 상황에서 데프콘 5단계까지 내려간 적이 없다. 
● 4단계 Double Take(경계하다) 전쟁 가능성이 있는 경계 강화 상태를 의미로 현재 상태는 데프콘 4단계이다. 
● 3단계 Round House(집을 돌다) 과거 미군과 인디언이 전투하던 상황에서 유래된 말로 인디언들이 전쟁 나가기 전에 자신의 집을 빙글빙글 돈다는 의미에서 전쟁 직전의 상황을 의미한다.

 

항공모함과 전폭기가 떠있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만약 북한이 미국을 도발했다면 한반도가 불바다가 돼었을 것이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부터 미드웨이 항공모함이 바다에 떠있었고 그 위해는 전폭기 65대를 실려 있었고 F-4 팬텀 24대, B-52 폭격기 3대 또한 육지에는 군군의 기갑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F-111 전투기 
세계 최초로 가변후퇴익을 채용한 복좌식 초음속기로 동시에 폭격기 수준의 탑재량과 계곡 사이를 날 수 있는 초저공 침투능력이 있다. 
B-52 폭격기
정밀조준이 가능한 재래식 무기와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공중발사 순항미사일(ALCM)이 탑재되어 있다. B-52 한대면 북한을 초토화 시킬 수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300만 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던 폭격기이다. 
F-4 팬텀
당시 미군의 최정예 전투기 

미드웨이 항공모함
미군전투기 65대 군인 4000명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1976년 8월 21일 

폴 버니언 작전을 개시한다.

 

미루나무 한 그루를 베기 위해 어마어마한 병력을 준비해 주었는데 사실 나무 한 그루 베는 것은 금방인데 미루나무 한 그루를 40여 분 동안 베었다. 이것은 북한이 조금이라도 도발하면 바로 응징하겠다는 군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북한 초소는 비어있었고 우리군은 북한 초소를 철거했다. 그러나 북한은 아무대응도 하지 않았다.  
폴 버니언 작전에 동원된 64인의 결사대 

 

거기에는 우리나라 특전사 부대도 참여했고 나무를 자르는 미군을 보호하고 우리만의 비밀작전 독수리 작전으로 몰래 무기를 소지해 가서 북한군을 보이는데로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특전사부대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당시 문재인 대통령도 당시 특전사 소속이었다고 한다. 

 


북한은 적극적인 대응은 못했으나 미국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계속됐고 중국,소련에 도움을 요청한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던 상황이어서 중국은 거절했고 명분 없는 살인 사건에 동조할수 없음을 이유로 소련도 거절했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당시 김일성 주석이 유감을 표명한다. 

 

폴 버니언 작전 종료 1시간 후 북한은 사과문을 전달했다

 

도끼 만행 사건 이후 변화

 

이 사건으로 

판문점 바닥에 콘크리트로 만든 

5cm 경계선이 생겼다.

 

남북을 구분지어 경계를 만들어 놓은 군사분계선 너비 50CM 높이 5CM 

 

리고 남,북 왕래도 끊어지고 

서로 중무장을 한 채로 

 경계선 맞은 편에서 서서 경비를 보며 

어떤 소통도 없어졌다.  

 

북한군 중위 박철이 넘어왔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도사건 이후 폐쇄되었다.
우리나라와 미국은 보니파스 대위와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사망 이후 보니파스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시키고 현재 JSA 경비대대 UN사 기지 명칭을 캠프 보니파스(CAMP BONIFAS)로 변경했다.
만행에 사용됐다고 알려진 도끼는 북한의 평화 박물관(북한측 위치)에서 북한의 반미 선전에 이용 중이다. 북한의 백과사전과 교과서에도 나와있는데 미군이 계획적으로 군사적 도발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한반도의 전쟁을 불러 일으킬 뻔했던 사건이다.  

 

 

헨더슨 집단폭행 사건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1975년 6월 30일 공동 경비구역에서 핸더슨 집단폭행 사건이 일어났었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군정 회의를 취재하러 온 북한 기자 배성동이 벤치에 안아서 신문을 보고 있는 헨더슨 소령을 비키라고 밀치면서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헨더슨 소령은 이를 무시로 대응했고 벤치에 올라가 헨더슨 소령에게 침을 뱉고 머리를 치면서 시비가 붙게 되었되었다.  

 

시비가 붙자마자 주변 있던 북한군이 몰려들어 왔고 헨드슨 소령을 구하는 과정에서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집단 구타로 헨더슨 소령은 목뼈가 부러지고 장이 파열된 후 바로 실신을 해서 헬기로 이송후 치료를 받았으나 언어구사능력을 잃을 정도로 심한 후유증을 겪었다. 

 

헨더슨 소령 구타를 주도했던 인물은 다름아닌 판문점 도끼만행의 주동자였던 북한군 박철 중위였다. 그는 성격이 거칠고 JSA 안에서 별명이 미친개로 불릴 만큼 호전적인 성격의 인물로 군화 밑바닥에 쇠 징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헨더슨 폭행시도 북한군을 몰고와 집단 구타를 주도한다. 

 

도끼 만행의 주동자이기도 한 사람이다. 그러나 박철이라는 이름은 가명으로 원래 이름은 홍성문이다. 북한군중에 공동경비구역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은 계급은 낮추고 이름을 바꿔서 사용한다.

박철(=홍성문)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고 자녀들도 탄탄대로 길을 걷게 된다. 

 

 

북한이 UN군을 살해한 이유는? 

76년은 북한에서 화가 많이 났던 해로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전에 남한에서 처음으로 팀스피릿 훈련을 시작했던 해이다. 북한은 상당히 예민했던 때이다. 한미 연합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도끼만행 작전을 벌였다고 볼수 있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

 

[꼬꼬무/이만갑/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0회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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