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천마총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능과 언덕의 구분이 딱히 없었던 경주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왕릉인지 모르고 왕릉을 올라가 놀거나 사진찍는일이 많았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개발을 지시한다. 1970년 완공된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꼐 관광도시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고 천년고도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활용해 경주를 세계적 관광지로 개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1972 10년을 계획을 세워진 경주 개발의 핵심은 고분 발굴 사업이었다.
박정희의 경주개발 이유
경주 개발은 세계적 관광지로 만들어 외화획득을 버는 것이였고 한국적인 것과 민족의 단결 강조. 정신적인 면을 강조해 통치에 적극 활용하려했다. 화랑정신도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사용했다. 또한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고구려를 강조하면 남한은 신라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경주를 강조하는 것도 있었다.
천마총 발굴 계기
그래서 첫 번째 발굴사업으로 천마총을 시작한다. 신라고분은 원래 입구가 없다. 경주 천마총의 입구는 관람을 위해 만든 것이다. 천마총은 실제 무덤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했고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경주의 첫 고분 천마총 발굴은 1973년 4월 6일 시작되었다. 이전까지는 155호분에 불과했던 천마총이다. 천마총 고분 155호분이 마지막인데 지금까지도 정확한 개수를 알수없다.
대릉원에는 23개의 고분이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고분이 황남대총이고 동서 지금 80m 남북 지금 120m 로 약 30 층 아파트를 눕힌 길이보다도 큰 폭의 고분이다.
98호 황남대총 발굴 전 시험 삼아 비교적 작은 천마총을 발굴을 한 것이다. 천마총 높이도 13M로 작은 고분은 아니다. 아파트 5층 높이와 맞먹는 높이이다.
사실 천마총 발굴 직전에 백제의 고분 무녕왕릉이 발굴되었는데 열악했던 발굴 환경과 발굴 지식이 없는 최악의 졸속 발굴로 현장 통제가 불가한 상태에서 이틀만에 급하게 수습된 유물이 4600점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천마총 발굴에 큰 부담감을 안고 발굴을 시작했던 것이다.
천마총에는 무엇이 있나?
천마총의 이름은 이 고분에도 천마도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천마도 수습 이전에는 신라시대 미술 작품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현재 고고학의 시작은 천마총 발굴때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천마도의 용도는?
천마도의 용도는 말을 탈때 진흙 튀는 것을 막아주는 '장니' 에 그려진 그림이다. 말 타는 사람의 지위를 보여주는 가장 화려한 장식품이다.
천마도는 넓은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이다. 천마도는 넓은 너비, 깨끗한 단명 등 까다로운 조근의 자작나무가 필요했고 자작나무에 그린 회화는 고급 명품이자 사치품이었다. 이 자작나무는 신라에서는 자라지 않았다. 북방과 교류가 잦았던 시라는 자작나무를 수입해 천마도를 그렸을 것으로 추측한다.
천마인가 기린인가?
처음에 이 그림이 기린인지 천마인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천마 사상은 기마 민족이 갖고 있는 사상으로 사람이 죽으면 말도 같이 묻는 풍습이 있었고 순장하는 말에는 천마와 유사하게 뿔을 달기도 했다.
* 중국 명나라 때까지 순장제도가 존재했고 명나라 영락제의 후비가 된 한확의 누이가 영락제가 사망하자 함께 순장해버린다. 국내에서는 신라 지증왕 때 순장제도를 폐지시켰다.
실제로 덕흥리 벽화 고분=고구려 시대 고분에서 천마도와 유사한 모습의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렇게 천마총에서 예상밖의 발굴품이 출토되자 천마총 발굴이 한참 진행 중인 1973년 6월 황남대총 발굴도 시작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물 5만여 점이 출토된다.
천마총 발굴로 경주개발은 더욱 본격화되었고 경주 개발을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요한 부문이었다. 이것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로 이어져 1978년 11월 27일 연간 외국인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하게 된다. 이 경주를 시작으로 제주도, 설악산, 한려수도등 다양한 관광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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