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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무령왕릉 발굴 일화 IN 송산리 고분군, 공주 (웅진) 곰나루 설화

by 365 ^^ 2021.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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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8회]

오늘의 탐사지: 공주(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주제: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출연자: 박찬호, 러블리즈 미주

 

공주의 자랑 

 

  • 옛날 백제 수도
  • 사적 제13호 무령왕릉 보유
  • 곰미나루(곰나루)
  • 김구 선생이 머물던 마곡사
  •  

  • 유관순이 다니던 명설, 명선 학당

(지금의 영명중학교)


공주(웅진) 속 백제문화와 송산리 고분군 6호 , 7호(무령왕릉) 발굴 일화에 대해 알아본다. 

 

공주(웅진)

 

 

백제의 수도 천도 순서

한성(한강유역)-웅진(공주)-사비(부여)

 

충청남도 공주시,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에 분포하는 삼국 시대의 백제와 관련된 역사 유적이 2015년도에 백제 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Q. 공주의 다른 이름은? 

 

웅진=곰나루=고마나루라고 불린다. 

 

고마나루 설화 

 

옛날에 금강에 암곰이 살았었는데 나무꾼이 곰한테 잡히게 된다. 암곰은 나무꾼이 도망갈 것을 염려해 굴에 가둬두고 새끼도 두 명 낳는다.

어느 날 도망 안 가겠지 해서 잠깐 외출을 했는데 그 사이에 나무꾼이 도망간다.  이에 곰은 슬퍼하며 눈물만 흘리 하다.

 

결국 이 새끼들 데리고 금강에 투신해 죽는다. 그 뒤로 강을 건널 때마다 사람들이 죽고 우환이 계속되자 곰신에게 제를 지내고 곰 사당을 지었다는 설화다. 

 

 

송산리 고분군 

 

송산리 고분군 안에는 총 7기의 백제 시대 무덤이 있다. 

 

 

 

 

 

 

 

 

6호분은 왜 벽돌무덤인 걸까? 

 

중국 남조의 무덤 양식이 벽돌 무덥다. 이는 웅진 천도 당시 백제가 고구려에 대적하기 위해 양나라와의 외교를 활발히 했음을 의미한다. 

중국과 외교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송산리 6호분 벽돌에 새겨진 글의 내용

 

7호분 무령왕릉 

 

 

백제의 무령왕 그는 누구인가? 

 

고구려의 기습으로 한성이 무너지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백제의 불안은 계속됐다. 귀족들의 반란이 이어졌고 두 명의 왕이 암살을 당했다. 제25대 무령왕은 이런 혼란기(501년)에 왕이 되었다.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외교에 힘을 쏟는다. 중국 양나라와 활발한 교역을 벌이고 고구려의 압력도 물리친다. 

 

 

 

 

 

무령왕릉 발굴 일화 

 

어떻게 무령왕릉은 발견됐을까? 

일제강점기에 무령왕릉은 도굴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무덤이 줄 몰랐었기 때문이다. 그냥 언덕인 줄 알았다. 뒤늦게 주인이 밝혀진 이유는 그 속에서 무령왕릉이라는 표식이 나왔기 때문이다.

 

1971년 비가 쏟아지던 날 6호분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예사롭지 않은 벽돌을 발견했다.

 

그 안을 확인했더니 벽돌무덤이 나왔다.

 

전국적인 관심사로 확대된 발굴 작업은 기자와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17시간 만에 쫓기듯이 발굴 작업을 끝내버렸다.

전례가 없던 첫 대규모 발굴이라 제대로 된 실측은커녕 유물을 쓸어 담기에 급급했었다.

왕관식 2점, 왕비관식 2점, 금귀고리, 금팔찌, 은잔, 청동 항아리등 국보급 부장품 50여점, 약 4600여점이 쏟아져나왔다. 

처참한 무령왕릉 발굴 과정이었다.

 

발굴 당시 무령왕릉임을 어떻게 바로 알아봤을까? 

 

증거 1.

 

진묘수란? 

 

진묘수란?  외부 침입으로부터 무덤을 지키는 상상 속 동물, 무덤 수호 목적-> 기괴한 동물로 표현 (귀여우면 안됨) 대개 한쪽 다리가 부러진 진묘수는 한쪽 다리를 부러뜨린 경우가 많다. 무덤을 지켜야 되는데 뛰쳐나가면 안되므로 일부로 두리를 부러뜨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놓은 동물상이다.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 겸 외부의 사악한 기운, 잡귀를 차단하는 용도 사용된다. 

 

 

증거 2.

영동대장군 =중국과의 교섭에서 얻은 칭호로   백제 사마왕=무령왕의 본명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523)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지석에 확인 결과 무령왕은 461년 경에 태어났고 501년 마흔 살에 즉위한 무령왕,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이다. 

무령왕 출생의 비밀 (무령왕의 아버지는 동성왕이 아니다!?)

 

 

증거 3.

다른 나라와 외교가 발활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

또한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은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중국에서도 백제와의 교류를 증명하는 유물-양직공도

 

양나라에 방문한 외국 사신을 그린 그림에 백제의 사신이 그려져 있었다. 

 

 

 

무령왕릉 비공개 전환

무덤 입구에 이슬이 맺히고 습기가 차고

장마 때는 바닥에 물이 고이는 등 붕괴위험이 커지자 1997년 이후 영구 비공개로 결정으로 내부 관람이 중지되었다.

 

 

 

 

 

 

 

 

 

일본 도굴꾼 

 

가루베 지온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은 무덤의 껴묻거리들을 모두 도굴해갔다. 그중에 한 명이 공주에 교사로 지원했던 가루베 지온이라는 사람이 있다. 

백제 문화에 관심이 많던 가루베는 도굴을 위해 공주로 오게 되고 교사 신분을 이용해 제자들까지 동원해 도굴을 강행했고 그렇게 도굴된 것이 송산리 6호분이다. 

도굴 후에 총독에게까지 도굴 사실을 숨기고 거짓보고 후에 일본으로 빼돌렸던 인물이다. 도굴당한 백제 유물이 무려 약 1000기였고 1970년 죽을 때까지도 범죄 사실을 들키지 않고 백제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던 전문 도굴꾼 가루베 지온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 

대구에서 막대한 부를 축척한 후 고분 도굴을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다는 설이 있고 그가 도굴은 유물이 1000여 점에 달하고 일본에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박물관이 있다.

 

오구라가 사망 후 1982년 그의 아들이 일부를 도쿄 국립박물관에 기증했고 여전히 환수되지 못한 채 일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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