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린 백제, 영원한 강국을 꿈꿨지만 승리하지 못하였기에 역사에 많이 지워지고 부서지고 흩어져서 700여 년 만에 사라져 버린 나라.
백제 왕 계보
온조-비류-근초고왕-문주왕-무령왕-성왕-위덕왕-무왕-의자왕
백제문화단지
1993년에 공부,부여,익산 일대가 백제문화권 특정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1994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17년에 걸쳐 완공된 곳이다. 계백, 수백향 등 다수의 사극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백제문화단지는 어느시대를 재현해 놓은 곳인가?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 천도를 단행한다.
그 신 도시를 그대로 복원해 놓은 곳이 바로 이곳 백제문화단지이다. 고대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백제의 세 번째 수도 사비(부여)다.
성왕 한강 탈환
백제 성왕은 고구려에 뺏긴 옛 땅 한강을 탈환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외교적으로 신라(진흥왕)와 동맹을 맺고 한강 탈환에 성공한다. 무려 76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그러나 한강 수복 후에 신라는 한강 상류에 비해 기후변화가 심하고 거리가 멀어 중국과의 교역에 불리한 한강 하류보다는 상류 영토를 원했다. 그래서 동맹을 파기하고 백제를 공격한다.
결국 신라가 한강 전역을 모두 차지하게 된다.
위덕왕 이야기 (525 ~ 598)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관산성 전투 (554년)
성왕 앞에 나선 아들 부여창 (훗날의 위덕왕:출중한 무예 실력을 가짐)은 신라로 쳐들어간다.
아들(부여창)을 출정시킨 성왕은 그를 격려하기 위해 사비성을 떠나고 기병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하는 도중에 신라군에 붙잡혀 목을 베이고 만다.
이것이 관산성 전투다(554년).
이때 백제 군사 2만 9천6백 명이 목을 베이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한다.
부여창은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끝나지 않는 전쟁에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상실감과 충격에 왕위 포기를 선언한다.
그리고는 출가를 하려 했지만 태자 대신 백성들을 출가시키고 왕이된다.
부여창(창왕) 567년 죽은 아버지 성왕을 위해 능산리에 절을 세웠다. 그리고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금동대향로'를 제작한다.
★백제 금동대향로,금동관음보살 발굴일화 in 국립부여박물관
왕흥사 건립 (577년)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계승한 위덕왕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위덕왕의 아들도 죽는다.
위덕왕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왕흥사에 목탑을 세운다.
위덕왕 아들은 세 명이다. 맏아들 아좌태자(597년 4월 일본에 건너가 불교 전파), 둘째: 미상, 셋째: 임성태자가 있다.
일본에 불교문화를 전파한 아좌태자 (위덕왕 첫번째 아들)
성왕때 불교의 전파와 함께 건축 기술, 예술 양식이 일본에 전파됐다. 일본 태자의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 백제인이었다. 성왕의 손자이자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그렸다는 설이 있는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다.
아자태자는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으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인 ‘쇼토쿠 태자와 두 왕자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위덕왕 외교 활동
위덕왕은 복수를 위해 외교에 올인한다. 가장 먼저 대가야에 신라 정벌을 요청. 대가야는 흔쾌히 수락하지만 대패한다. 결국 신라에 의해 대가야는 멸망한다.
그 후에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일본 역시 패배한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은 사무친 한만 남은 채 결국 눈을 감는다. 위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쓰러져가던 백제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기반을 닦은 왕으로 남아 있다.
위덕왕 이후에 성왕의 둘째 아들 혜왕이 즉위 하지만 즉위 다음 해에 죽는다. 혜왕의 맏아들 법왕 또한 즉위 다음해에 죽고 법왕의 아들 무왕이 즉위한다. 무왕은 선화공주 일화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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