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들 리턴즈 7회 후반]
요약 내용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과 마지막 격전지 남해 관음포 노량해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임진왜란은 1592년 시작하여 총 7년간의 전쟁.
2년 동안의 전쟁
3년 동안의 휴전
1597년, 정유년의 정유재란
임진왜란의 다른 이름은 무엇일까?
'도자기 전쟁'이다. 우리나라의 도자기 기술을 부러워한 일본은 임진왜란의 혼란을 틈타 조선의 우수한 도자기 기술자들을 납치해 잡혀간 도공들이 전한 도자기 기술이 당시 일본의 기술 문화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의 침략성, 폭력성을 지우려는 이름으로 축소된 의미의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유재란 (정유년에 다시 난을 일으켰다)
약 2년간의 임진왜란과 3년간의 휴전 후 1597년, 정유년에 왜군은 다시 쳐들어 온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 때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목표는 절멸이었다. 모두 죽여 공포심을 심어주자는 것이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살아있는 사람의 코와 귀를 베어서 소금에 절인 후 일본으로 보냈다. 베어온 고의 수만큼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교토에는 이때 조선인의 코를 자른 코 무덤이 있다.
정유재란 속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
이순신의 왕명 불복종 사건 그 진실은?
왜군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둘은 경쟁자였다.
경쟁자를 없애고 싶었던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 앞바다로 올 것이라는 정보를 조선 수군이 넘긴다.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대비하라고 했으나 이순신은 어명을 거부한다. 그러나 실제로 가토는 조선으로 쳐들어 왔고 이순신은 백의종군한다.
백의종군 뜻
그때 원균이 이순신의 자리를 이어받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1597년 한양에 도착해 의금부 감옥에 갇혀 12일에는 고문까지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이때 이순신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4월 1일 석방 명령을 받고 도원수 권율이 있는 경상도 초계로 길을 떠나 백의종군하게 된다.
원균의 칠천량해전
임진왜란을 통틀어 가장 크게 유일하게 패한 해상 전투 칠천량 해전이다.
이순신 장군이 어명을 어긴 이유는 적들의 정보는 믿을 수가 없다. 부산 근처는 물살이 세고 배를 댈 곳이 한정적 이여서 불리하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전선 160여 척을 이끌고 부산으로 출전을 한다. 그러나 물살이 센 부산 앞바다에서 격군이 지쳐버려 물과 휴식을 위해 근처의 가덕도에 상륙한다.
그러나 이순신의 말대로 배를 댈 곳이 한정적이여서 가덕도에 매복을 하고 있던 왜군의 기습 공격으로 다시 가덕도 밖으로 다시 나와 칠천량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그곳에도 왜군이 수륙 양면으로 조선 수군을 공격하여 160여 척의 배가 거의 파손되고 원균 장군도 도망가는 도중에 왜군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된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한다.
선조는 다시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 단 한 척의 거북선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판옥선 12척뿐이었다. 이때 선조의 교서가 도착한다. 수군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육지에서 권율 장군을 돕는 건 어떠냐는 내용이었다. 그때
그 유명한 이순신의 명언
명량해전의 서막
이순신의 전략은?
바다의 좁은 골목, 진도대교 바로 아래, 돌이 우는 소리가 날 만큼 물살이 세다는 울돌목이다.
이곳이 유일한 집입로였다. 대규모의 왜군이 동시에 들어오지 못하는 지형 소규모의 병력만을 상대하는 전술 거기에 조류(밀물 때)까지 계산해서 명량해전을 출정한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렇게 울돌목의 지형과 조류를 이용해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남해 관음포
이순신의 최후의 격전지이자 7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곳이고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장소다.
대망첨 (대 바랄 망 볼첨)
임진왜란에 마침표를 찍은 노량해전
명량해전 승리 이후 이순신은 수군 재건을 위해 다시 배를 건조하기 시작한다. 쉴 틈 없이 다음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배를 건조했다. 그러던 중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왜군은 황급히 퇴각을 계획하고 당시 순천 왜성 쪽에 갇혀 있던 고니시는 이순신이 퇴각로를 차단할 것을 염려해 그 당시 해상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에게 뇌물을 주며 도움의 손길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군을 온전히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에 1598년 8월 중국 연합군과 조선군은 새벽 2시 공격을 시작하고 왜군은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시작한다. 퇴각하던 왜군은 앞이 보이지 않아 방향을 잘못 틀어 관음포로 들어온다.
약 300척의 왜선 중 200여 척이 침몰하고 일본이 대패하면서 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다.
이순신 장군의 유언비
혹시나 본인의 죽음으로 위축될 아군을 걱정하여 마지막까지 자신보다 나라를 생각했던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이순신 장군 죽음 이후
전략적으로 승리한 전쟁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은 논공행상이라는 것을 한다.
선무공신 : 나라를 지킨 무장들에게 주는 상
호성공신: 선조를 지킨 수행한 공신
숫자를 보면 선무공신 18명, 호성공신 80명이었다. 호성공신의 대표적인 인물 이항복(오성과 한음) 이 선무공신들보다 더 많은 상을 받는 게 부끄러웠던 호성공신들이었다.
유성룡의 징비록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다. 이겼지만 전쟁의 피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필요해 유성룡은 파직된다. 이순신이 죽은 그때 류성룡도 관직을 박탈당하고 안동으로 낙향한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때의 일을 잊지 않고 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에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게 하고자 내가 징계하고 훗날을 대비하는 반성문을 쓴다.
그것이 징비록이다. 임진왜란의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자 했던 류성룡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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