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0회]
오늘의 탐사지: 안동 옥연정사, 병산서원
주제: 서원의 부패
출연자: 정유미
이황의 제자로 류성룡과 김성일이 있다. 류성룡에 의해 지어진 병산 서원을 방문하고 또 다른 제자 김성일의 후손 김용환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안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편안할 안 동녘 동
신라 말기 신라가 갈라지며 후 삼국 시대로 접어들 무렵 후 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신라를 두고 전쟁을 벌인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고창이다. 우리가 고창이라고 생각하면 전라도인 줄 알지만 사실 안동의 옛 지명이 고창이었다. 고창 전투의 승자는 왕건이고 동쪽을 편안케 했다는 뜻의 안동으로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옥연정사
벼슬을 물리치고 내려온 류성룡은 부용대 남쪽 기슭에 서당을 짓고 교육과 저술에 매진했다. 현재 옥연정사에는 서애 류성룡의 15대 종손 류창해씨가 안동에 살고 있다.
류성룡은 4살에 한문을 익히고 6살에 대학(유교 경전)을 이해한 천재 중의 천재
류성룡의 아버지가 궁에서 글귀를 받아왔는데 식음을 전폐하고 문제에 몰두 했으나 결국 문제를 풀지 못했는데 8살 류성룡이 한번에 맞췄다. 화즉원 : 그림으로 그리면 원이고 서즉방: 글로 써보니 각이졌다. 묘구출: 동쪽에서 나고오즉장: 정오에 가장 길다.
병산서원
자연을 병풍삼아 한 폭의 그림 같은 서원의 모습을 한 병산 서원은 서애 류성룡을 모신 서원이다. 사적 제 260호로 류성룡이 제자들을 가르치 곳으로 현재 류성룡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원래 풍악서당이라 하여 조선 명종 때 구 풍산현 북쪽에 창건되었으나 선조 때 이곳으로 옮겼고, 그후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복례문 입구을 지나면 만대루가 있고 그 뒤로 입교당이 있다.
만대루
만대루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고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절경을 구경할수 있다.
병산서원은 밖에서 보면 왜소하고 별로 볼것이 없는것처럼 보인다. 마당을 본 다음 계단을 올라가서 만대루를 올라가면 경치가 병풍처럼 펼쳐저 보인다. 바깥에 있는 경치를 가지고 오는 것을 차경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건축은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건축법은 어떻게든 밖을 보도록 만들어 놓는다.
입교당
사당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옆에는 류성룡의 성품을 나타내는 청렴결백을 상징하는 배롱나무가 서 있다. 또한 돌기둥에 있는 괘들은 사내의 일생을 상징한다고 한다.
서원 부패의 온상(사학 비리)
서원은 교육의 중심에서 비리의 온상이 된다.
군역회피: 조선시대는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한 양천제도 사회었다. 농민 이상, 양인들은 모두 다 같은 의무를 가지게 되는데 병역과 세금 납부의 의무가 있었다. 반면 천민은 모든 의무에서 제외 그러나 조선 시대에 군 면제를 받았던 두 계층은 현직 관리(이미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
두 번째는 학생,문치주의 국가 답게 예비 공무원도 면제다. 그래서 양반들은 군대를 가지 않는다. 양반들은 서원에서 공부하며 군 면제를 받는다. 그러다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또 군 면제, 떨어지면 다시 서원 행,
반면 먹고 살기 바쁜 농민들은 군 입대를 한다. 그래서 서원이 면제의 도피처로 사용됐다. 그러나 서원보다 지방 공립 학교인 향교가 더 심했다. 향교에 등록금만 내고 군 면제를 받았고 세금을 면제 받기 위해 너도 나도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사액)서원을 설립했다.
조선후기에 서원은 붕당 정치의 온상파벌(노론,소론)을 나누어 대립하기 시작한 서원, 또한 백성들을 괴롭히던 서원 유생들들 (서원제수전)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농민들을 찾아가 제사 비용을 강요하나 돈을 내지 않으면 서원으로 끌고 와서 폭력을 행사했다.
서원 철폐점점 심각해져 가는 서원의 행패에 보다 못한 영조는 서원을 철폐약 1000개 이상의 서원 중 수 백 개를 철폐 그 후 흥선 대원군 때 붕당의 뿌리를 뽑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원을 모두 없애고 47개의 서원만 남겨둔다.그 대원군의 피 바람을 피해간 서원이 병산, 도산서원이다.
이황의 두 제자 류성룡,김성일
김성일 선생의 후손 파락호 김용환
학식 높은 김씨 집안에 김성일의 후손 김용환이 도박에 미쳐 집안의 땅을 다 팔아 먹는다. 집안의 가구, 소 다 잃고 나서 급기야 외동딸의 혼수 비용까지 털어서 도박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광복 후 1년 뒤 김용환이 세상을 떠난 뒤 김용환의 지인이 제문을 읽는데
"집잡히고 , 땅 잡히고 , 딸 장롱까지 잡힌 돈, 모두 모아 독립 운동에 바친 김용환"
도박은 일제를 피하기 위한 위장 방법이었다. 약 300억 재산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면 일제에게 의심 받을 걸 우려 도박판 가는 척 모두를 속이고 독립 자금을 전달 했던 김용환이다.
그의 치밀함에 속아 아버지를 원망했던 외동딸인데 딸에게 만이라도 사실을 얘기하라고 설득 했으나 단호히 거절했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파락호라는 오명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 축문을 읽어도 처음에 딸은 믿지 않았다. 그 후 1995년 8월15일 김용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국가유공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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