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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금관총 이사지왕 무덤이다?! (금관 발굴 의미)

by 365 ^^ 2022. 5. 19.

금관총

경주에 있는 신라 초기 왕릉의 주인이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상대적으로 백제는 주인이 밝혀진 무령왕릉이 있다. 그런데 2013년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중요한 글짜가 발견된다. 일제강점기 금관총에서 출토된 후 90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녹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드러나면서 신라 초기 고분의 주인이 최초로 밝혀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수학여행의 메카가 경주가 된 것도 금관총이 발견되면서 금관총 발굴 후 주변 지역의 발굴을 활성화하면서 신라 역사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금관총이라 이름 붙인 것은 출토품 중 특징적인 유물을 무덤 이름으로 지정했기 때문으로 무덤에서 금관이 발견되어 금관총이고 천마총은 천마도가 나와서 천마총이다. 

 

 

 

금관총 발굴 과정 

신라가 멸망을 한후 고려, 조선을 거치며 일반 백성들은 신라 지배자들의 무덤이 조상이 만들어 놓은 언덕이라 생각했다. 언덕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1921년 경주 노서리 마을의 한 음식점 확장 공사 중 발견된 고대 유물이 발견된다. 조선 총독부는 공사를 중지시키고 발굴에 나선다. 이윽고 금관이 발견되었고 신라가 황금의 나라임을 알리는 금관총 유물이었다.

 


금관총 수습 발굴에 나선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 '모로가 히데오'라는 사람은 수습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고고학 전공자도 발굴 경험이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발굴이 아니라 도굴에 가까웠다. 세세한 발굴기록도 없이 무작정 파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의 정확한 수를 알수 없었고 일부 유물은 현재 일본에 있다. 

 


금관총에서는 금.은제 그릇, 귀금속, 무기 등 총 3만 여점의 유물을 출토되었다. 일본은 8세기 무렵 금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그전까지 한반도에서 수입했다. 일본에게 신라는 금의 나라로 동경하면서 금을 뺏기 위한 침략의 대상이기도 했다.

 


8세기 무렵에 실크로드, 바닷길을 통해 신라에 온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신라의 황금의 나라, 살기좋은 아름다운 나라로 칭송을 했다. 금관총 발굴을 통해 이 내용이 진짜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신라의 황금 금관 세공법
황금은 귀해서 거푸집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자르고 세공하고 철사처럼 늘리기 때문에 황금 공예는 수천 년 동안 변함없는 기술이다. 신라 금은 순금이 아니라 금에 은을 섞어서 만들었는데 순금이 무르기 때문에 은을 합금해서 강도를 높였다.  또한 광택도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순금보다 18k, 14k가 더 반짝인다.

 

 

마립간 시기 금관총
금관총 발굴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몰랐던 역사적 사실이 많이 밝혀졌는데 금관이 나온 고분은 신라 마립간 시대 왕, 왕족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는데 왕호를 왕으로 바꾼 지증왕 이전 시기를 말한다. 마립간 시기는 약 4세기 후반~6세기 초반으로 제 17대 내물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의 시기이다. 

국가의 지도자를 왕으로 부르기 이전에는 왕 명칭 이전에 사용된 '간' 을 사용했고 '간' 중에 가장 위에 있던 것이 마립간이었다. 마립은 맏, 으뜸이라는 뜻이다. '간'은 지도자 마립간은 지도자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금관은 경주에만 있다. ! 
경주에서 발견되는 금관은 경주에서만 발견되는 유물이다. 경주 외 지역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경주의 왕족이 지방 세력보다 우위에서 그들을 다스렸다는 것과 경주가 신라의 정치, 경제적 중심지라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금관처럼 경주에만 있는 돌무지덧널무덤도 경주에만 있다.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마립간들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고 신라 발전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돌무지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구조 및 무덤 양식 변화 이유는?

삼국시대는 다양한 무덤 양식을 가지고 있다. 경주의 금관총, 천마총, 황남대총등 금제품이 출토된 거대 고분들은 부장품으로 많은 황금 유물이 있고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이다.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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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 발굴의 의미

 

신라 금관의 특징은 앞쪽으로 뫼산 자 모양 혹은 날출자 모양의 세움장식이 3개가 있고 사슴뿔모양의 엇가지 장식이 2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르마트 금관, 중국 시베리아, 우크라이나 등 세계 곳곳에서 신라 금관과 유사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신라 금관발견에 전 세계가 놀란 이유는 세계의 금관은 나무와 사슴뿔로 통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이고 사슴뿔은 자라고 하늘로 뻗는 생명력을 의미하며 하늘의 뜻을 받는 상징물로 금관을 쓴 지도자만 하늘의 뜻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금관을 쓴 사람많이 신의 대리인 권력자임을 의미하다. 

 

 

금관의 모양이 유사한 이유는 유라시아 대륙에 퍼진 샤머니즘의 유행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금관을 통해 당시의 교류 및 정치, 종교, 문화가 담긴 유물인 것이다. 

 

금관총은 이사지왕의 것이 아니다. 

금관총에 이사지왕의 것인지는 알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사지라고 새겨진 환두태도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허리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고 어디에서는 관밖에서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관밖에서 발견이 되었다면 무덤 주인이 쓰던것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금에 눈이 멀어 유물을 감자캐듯이 수습한 탓에 실제 전문가들도 기록이 없으면 쉽게 헷갈리는 발굴 현장인데  금관총의 주인이 죽자 이사지왕이 자신의 칼을 넣어준 것이라고 하여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 했다.

 

2015년 재발굴 실시
2015년에 대대적인 금관총 재발굴이 있었는데 이때 이사지왕도 라고 새겨진 칼집 끝부분이 발견되었는데 또 이사지왕의 의미하는 이가 새겨진 유물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한 사람의 이름이 많이 발견되어서 최근에는 금관총의 주인이 이사지왕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금관총 발굴 이후 신라 고분 발굴이 이어져 1926년 서봉총이 발굴된다.  

 

뿔잔 각배는 북방의 유목민족과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다. 

뿔잔



서봉총 금관을 최초로 쓴 평양 기생.. (발굴이야기)

 

서봉총 금관을 최초로 쓴 평양 기생.. (발굴이야기)

서봉총 이름 배경 서봉총의 '서'는 스웨덴의 음역어 서전에서 나온 것이다. 봉은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의 봉황 장식으로 서봉총이 된것이다. 서봉총 발굴이 한창일때 스웨덴의 황태자이자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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