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는 다양한 무덤 양식을 가지고 있다. 경주의 금관총, 천마총, 황남대총등 금제품이 출토된 거대 고분들은 부장품으로 많은 황금 유물이 있고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구조
가장 안쪽에 시신을 안치하는 목관을 설치하고 밖같쪽 상자는 부장품궤로 저승에 갈때 가지고 갈 물건을 넣는 상자가 있다. 돌을 채워 넣어 흔들리지 않게 고정했고 무덤 주인이 수천 년간 머물 공간이 흔들리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 관과 부장품 상자를 감싸는 덧널(곽)을 설치 덧널=사후세계 안방 마련한 후
돌을 쌓아 거대한 봉분을 조성했다. 돌을 막 쌓으면 금방 무너지기 때문에 나무 골조를 세워 돌을 넣었다.
돌무지 위에 다시 흙을 덮었다. 이렇게 무덤을 조성했기때문에 도굴을 할수 없었다.
돌무지덧널무덤의 특징은 목곽이 썩으면서 무덤 윗부분이 내려 앉는다. 경주에 가면 위쪽이 함몰된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인 것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 전성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신라의 문화이고 마립간 시기에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이후는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바뀌게 된다. 굴식돌방무덤 양식은 고구려 백제문화에서 보이는 형태로 삼국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굴식 돌방무덤 구조
굴식 돌방무덤은 돌을 이용해 무덤을 만들고 그 옆으로 길을 만들어 놓은 형태이다.
돌로 널방을 조성하고 그 안에 시상대 위에 관을 안치하고 관을 완벽하게 닫아 절대 열수 없게 만들고 널방으로 출입이 가능한 길과 문을 설치했는데 부부 중 한 명을 먼저 안치하고 나중에 문을 열어 부부가 같이 묻히도록하기 위해 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쉽게 넣을 수 있는 것은 쉽게 뺄수도 있다는 의미로 도굴이 쉬운 무덤 양식이다. 그래서 굴식돌방무덤은 유물이 거의 없다.
무덤 양식이 변한 이유
신라는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중국과도 교류했고 왕의 권한도 강해져 마립간이라는 왕의 호칭을 사용했다. 마립간 이전 시기에는 김.박,석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했으나 이후에는 김씨가 왕위 독점 세습을 하게 되고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왕조 국가 신라를 구축하게 된다.
계세 사상->윤회사상으로 변화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무덤이 황남대총인데 돌과 흙을 쌓아 거대한 고분을 조성해서 마립간 시기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마립간 시기는 수많은 부장품&순장풍습이 유행했으나 이는 사람의 영혼이 죽은 뒤에도 현재와 지위, 신분은 유지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세계를 이어간다는 의미의 계세 사상으로 부른다.
6세기는 신라 전성기로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이 많았고 고인을 애도할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도 부족해져서 무덤의 크기도 줄어들고 재화도 투자하기 어려운 시점이었다. 국력에 반비례한 무덤의 규모이다. 또한 무덤의 양식이 변화했다는 것은 저승에 대한 생각 내세관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립간 시대가 끝나면서 22대 지증왕이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그 이후 528년 법흥황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불교에 의해 내세관도 변화된다. 불교의 윤회사상이 확산되면서 이승과 저승을 구별하게 되고 유물 매장이 적어지는 박장이 유행하게 된다. 확실한 왕권강화로 위세품도 필요없어진 것이다. 율령반포로 법으로 왕권이 보장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무덤의 크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서 그 이후 무덤이 커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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