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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서봉총 금관을 최초로 쓴 평양 기생.. (발굴이야기)

by 365 ^^ 2022. 5. 18.

서봉총 이름 배경

서봉총의 '서'는 스웨덴의 음역어 서전에서 나온 것이다. 봉은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의 봉황 장식으로 서봉총이 된것이다.

 


서봉총 발굴이 한창일때 스웨덴의 황태자이자 훗날 스웨덴 국왕이 되는 구스타프 아돌프가 방문을 하게 된다.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구스타프 황태자를 일제가 발굴현장에 초대한 것이다.

 

 

황태자는 평소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고 황태자의 관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일제였다. 이때 황태자가 직접 금관을 발굴한다. 이것은 일제가 판을 미리 꾸며놓고 황태자가 금관을 발견하기 쉬운 곳에 금관을 묻어놓고 발굴하도록 했던 것이다. 

 

 

서봉총은 일제가 당시 경주역을 짓고 있었고 신라 서봉총의 돌을 건축재로 사용했는데 이미 깍여있는 서봉총을 스웨덴 황태자를 위한 이벤트 장소로 이용했던 것이다.

 

 

평양 기생 금관 파문 사건

서봉총 발굴 후 10년 후 온나라 경악할만한 사건이 벌어진다. 평양 구립박물관 당국이 서봉총 금관을 기생에게 씌워서 사진 촬영을 한 사건이다. 서봉총 발굴에 참여했던 고이즈미 아키오가 공로를 인정받아 평양 박물관장에 부임했고 1935년 서봉총에서 촐토된 금제유물을 평양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된다.

 

 

전시회가 끝나고 축하연회에서 기생 차릉파에게 금관을 씌운 것이다. 심지어 다음날에는 금제 허리띠, 귀걸이등을 착용시킨 후 사진 촬영을 했다. 

 


서봉총의 피장자는 신라 왕족 여성으로 추정되는데 왕족 여인의 부장품을 기생에게 씌워서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 인해 금관의 변형이 일어났고 1935년 당시 6개의 곡옥 중 일부가 떨어져 지금은 2개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떨어져 다시 붙인것이었고 허리띠와 금관도 휘어져 변형되어서 영구적 손상을 가져온 것이다.

 

 

고이즈미는 어떠한 처벌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발굴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아 서봉총 유물 파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고이즈미는 해방 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자신의 회고록에 자신의 만행을 자화자찬했다. 서봉총 발굴 당시 황태자의 목격담에 발굴할때 비단이 나왔고 목숨 수자라는 한문이 나왔는데  어디에서도 유물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록과 숫자를이 있었을텐데 모두 날라가 버린 것이다. 또한 일제는 35년간 한국인은 발굴 작업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나라 잃은 유물의 슬픈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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