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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10.27 불교 법난 = 불교 정화 사건

by 365 ^^ 2022. 5. 22.

[359 회 ]

10.27 불교 법난과 전두환

1980년 10월 27일 전국 곳곳의 사찰에 있던 승려 153명과 관계자들이 강제 연행된다. 사흘 뒤인 10월 30일에는 규모가 더욱 늘어나 군경합동 병력 삼만이천여명이 동원되서 전국의 사찰과 암자 5731곳을 집중 수색해서 1776명을 검거한다.  이 사건를 지시한 사람은 전두환이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 알아보기


제 5공화국 헌법 주요내용은 대통령 임기 7년 단임제로 하고 간접 선거로 선출한다는 제 5공화국 헌번 선포식이 화려하게 열린 10월 28일 헌법 공포식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진 사건으로 이른바 10.27 불교 법난이었다. 80년대 당시에는 '불교 정화사건'으로 알려진 피해자를 범법자로 인식시키는 용어를 사용했다가 국가 권력 남용 사례로 2007년 법난 사건으로 규정했다. 

*법난이란 불교 교단이나 포교하는 사람이 받는 박해를 일컫는 말 

 

 



군 관련 과거 의혹사건들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참여정부 시절 발족한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8개의 사건을 골라서 진상을 규명했고 12.12, 5.17, 사건, 실미도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등과 더불어 10.27 법난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신군부 불교 법난의 명분
신군부가 내세운 명분은 10.27 사찰 수색 비리 승려 색출 - 10월 30일 대규모 확대 수색 간첩 운동권 반체제 인사 색출이었고 이 과정에서 실제로 총을 발사했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연행된 스님들이 끌려간 곳은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 포함 전국 각지 조사실. 경찰청 특수 조사대. 각 지역의 보안부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조사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만 대답하면 돼. 의 방식이었다.

 

 

 

 

수사과정 및 고문

군경들은 스님들을 잡아와 승복을 벗기고 수의나 군복을 입혀 그 자체만으로 성직자의 정체성을 허물어버리는 압박 수단이었다. 뿐만아니라 구타는 기본, 허벅지에 각목을 넣고 밟기, 전기고문, 고춧가루 물고문, 잠 안재우기등 가혹행위를 통해 스님들에게 허위진술을 강요했다고 한다. 
 
당시 오대산 월정사 재무국장이었던 원행 스님은 심한 고문으로 후유증을 겪었고 발목 골절 앞니 부러짐 엉치뼈 수술을 두 번이나 했음에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당시 당국은 성직자에게 돈,여자, 간첩의 치명적인 죄목을 덮어씌우고 수사 게시 불과 2주 만에 중간 수사 결과 발표하는데 언론은 더욱 자극적으로 보도를 했다.

 



이 당시 부정 축재액을 사찰이나 법인 재산을 승려 개인 재산으로 억지 산정한 것으로 퇴폐행위 여성 신도들과 찍은 기념 사진을 추궁하는 방식으로 몰아갔다. 인권유린까지 자행하면서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무혐의 기소된 경우 결국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무혐의나 무죄판결은 보도에 나오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불교에 대한 이미지는 추락하고 말았다. 
 

신군부는 왜 불교계를 흔들었던 것인가?

이 사건은 10.26 박정희 피살로부터 시작된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다음날 계엄령 선포되고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 확대되었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불교 법난을 밀어붙인 것이다.  당시 합동 수사본부장은 노태우. 군통수권자 전두환이었다.  

 

사회정화운동

10.27 법난 당시 일부 승려들도 삼청 교육대로 끌려갔다. 국보위는 정의 사회 구현을 강조하면서 권력을 만들기 위해 신군부가 벌인 캠페인이 사회정화운동이었다. 사회 정화 운동의 일환으로 삼청 계획이 실시되었는데 첫 단계가 구여권 인사들 추출(김종필, 이후락등) 마지막 단계는 정화대상을 일반 국민으로 확대해 소위 삼청교육대를 만들고 악질 폭력배를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인권 유린을 했던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1981년 신군부가 창당한 정당 이름이 민주 정의당이었다. 사실 이것은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의 5대 사회악 소탕 작전을 따라한 것으로 박정희가 지적한 밀수,마약,탈세,폭력,도박 등 5대 사회악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 있었다. 명분 없이 정권을 장악한 이들의 상투적 수법인 것이다. 이것이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져 사전에 준비한 불교 정화 계획에 따라 1980년 10월에 법난을 일으켰다. 

 

 

왜 불교였나? 
45 계획: 1980년 당시 조계종 총무원 주소가 종로구 견지동 45번지였기 때문이다. 

 

불교계 수사계획 명칭 45계획

 

당시 천주교와 개신교의 종교 행사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통로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신군부는 천주교, 개신교 종교인들을 눈엣가시로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1980년 8월 19일 전국 검사장 회의에는 반체제 종교인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는데 정작 불교 관련은 전무했다.  

 

천주교, 개신교는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졌기 때문에 건드리기 쉽지 않아 쿠데타로 잡은 정권의 정당성 인정이 절실했는데 천주교, 개신교를 건드리면 세계적인 종교 탄압논란을 의식해 네트워크가 약한 불교계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천주교 민주화 운동 

 

명동성당 역사 속 3.1 구국선언 / 정의구현 사제단이 영향받은 해방신학 배경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추모 미사가 진행되었다. 미사복을 입고 명동성당 밖으로 나와 가두시위를 벌인 천주교 사제들은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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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로 명분없는 정권을 잡고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존경받는 종교계 인물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었기에 월주 스님에게 세번이나 전두환 지지 성명을 요청했으나 신군부 요청을 거절했다. 결정적으로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6월 3일 광주를 월주스님이 방문하게 된다. 이 소식을 미리 알게된 신군부는 방문하지 말라고 압박했으나 신군부의 압박에도 월주 스님은 광주 방문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10.27 법난의 영향

10.27 법난을 계기로 불교계 민주화에 대한 각성의 목소리가 커져 1980년대 이후 승려와 신자들이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종교계의 한 축을 불교가 담당하게 된다. 특히 5.18 희생자의 영령을 추모하는 행사, 박종철 49재 등 민중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며 등을 돌린 신도와 국민의 지지를 회복하게 되고 불교의 대중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전두환은 왜 백담사로 갔나? (역사 속 불교 역할과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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