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주석 김규식
(Kim Kyu-sik, vice president of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양반 관리의 자제였던 김규식 선생은 아버지가 부산에서 이뤄진 일제의 불평등한 무역 행위에 이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고 귀향을 가게 되자 이로 인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어린 김규식은 고아원에 맡겨진다.
그때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연세대학교 설립자)가 8세 이상은 받을 수 없어 돌려 보냈다가 안부를 묻고 찾아갔더니 굶주림에 벽지를 뜯어먹던 김규식을 다시 데려와 보살핌 속에 건강을 되찾은 그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주석이 된다.
김규식을 눈여겨 본 독립협회 서재필의 도움으로 의친왕 유학길에 통역겸 비서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되고 미국 로녹 대학에 입학해 전교 3등의 성적으로 1903년 대학을 졸업한 후 1913년 독립운동가의 집결지 중국 상해로 건너간다.
1918년 11월 11일은 11시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다. 종전 후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27개국 협상국이 파리에서 개회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은 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 이후에 각종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치다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김구 선생과 함께 남한만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한민족의 자주통일을 염원했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북한에 납북되어 평안북도 만포진에서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몽양 여운형
Lyuh Woon hyung
여운형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감화력으로 대중에게 인기있고 존경받은 지도자였다. 소론파 양반 가문 출신으로 14세때 서울로 상경했고 1900년 배재학당, 1901년 홍화학교, 1903년 우무학당을 다녔으나 졸업을 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상해임시정부 초대내각 외무부 차장을 역임한다. (1919년)
여운형은 1919년 3월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지원했던 인물이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여운형의 편지한장이었다. 1918년 11월 27일에 윌슨 미국 대통령의 친구인 찰스 크레인이 주중공사로 민족자결주의 14개조 선전을 위해 상하이에 방문한다. 이에 여운형은 수많은 군중을 뚫고 크레인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독립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여운형의 일화
▶ 1919년 11월 일본 초청으로 도쿄 제국호텔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 일본은 주요 독립운동가인 그를 회유하고자 초청했지만 오히려 일본 총독부관리들을 만나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했으며 여운형은 도쿄 제국호텔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새나라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이다. 이는 조선 민족의 절대적 요규일 뿐 아니라 세계 대세가 요구하는 것이다. 싸우지 아니하고는 인류가 누릴 자유와 평등을 못 얻을 것인가? 인분 인사들은 깊이 반성하라"
-도쿄 제국호텔에서의 독립연설 중(1919.11.27)
▶1929년 일제 경찰에 체포된 여운형은 국내로 압송돼어 3년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를 창립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일장기 삭제 사건 당시 손기정 선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삭제해 기사를 게재했던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바로 여운형이였고 조선중앙일보는 이 사건으로 폐간되었다.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많은 독립투사들이 전향했던 일제의 패악이 극에 달하면 1940년 시절 좌.우를 망라한 애국세력을 모아 1944년 8월 10일 '건국동맹'을 조직해 광복에 대비했고 해방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며 끝까지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신탁통치 파동으로 좌우 대립 해소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통일 정부를 향해 나침반처럼 살아간 정치인이 여운형이었다. 이는 정치적인 이익만 쫓는 철새 같은 정치인과는 확연히 구분해야된다. 나라를 위해 반대편과도 대화하고 소통, 협력할 줄 알았던 정치인이였던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흔들리는 사람, 멈칫거리는 사람, 중도파를 의미하는 WOBBLER 라고 불렀다. 이에 여운형이 남긴 말이 있다.
그러나 김규식과 여운형은 반탁노선에 반대하면서 공산주의자, 기회주의자라는 끊임없는 비판이 있었고 또한 끊임없는 테러위협에 시달렸다. 1945년 8월~1947년 7월까지 12번의 테러를 당했다.
좌우합작위원회 (1946.7.25)
(Left-Right Coalition Committee)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파동이후 이승만의 남한만 정부 수립을 외치고 있을 때 여운형은 민족분열의 단독정부 수립은 결코 반대를 위치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계속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김규식,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익과 우익을 협력하게 해서 통일 정부 수립을 이루고자 결성한 정치 기구이다. 이 시대의 극심한 좌우 분열 속에서 합의된 좌우합작 7원칙이 나온다.
이러한 노력에도 이것 또한 좌익과 우익 세력들은 입법 기관 설립과 토지 개혁을 각각 문제삼아 상대편에 유리한 입장이라고 여겨 양쪽 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한다. 그러나 미군정의 지원아래 좌우합작위원회는 꽤 유지되었다.
그러나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하며 임시정부 수립은 실패하게 된다. 헌장이 만들어진 지 나흘 만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미군정에서 여운형의 암살 배후를 조사했고 경호원의 인터뷰 내용에 확인된 것은 경찰 개입의 가능성이 암시되었다.
결국 1947년 혜화동 파출소 앞에서 저격을 당해 12번째 테러로 여운형은 세상을 떠났다. 여운형의 죽음이후 1947년 12월 좌우합작위원회는 공식적으로 해산된다.
김규식의 북한행
김규식은 통일을 위해 남한만 선거에 참여를 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에 당황한 미군정은 북한에 가면 안전은 보장할수 없다고 했고 김규식을 마지막으로 다녀오고 다음에 정부에 참여하자고 제안했으나 김규식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김규식은 통일정부를 위해 김구와 함께 북한에 방문(1948.4.19)해 남북협상을 진행하지만 서로의 입장차이만 확인하고 남북협상은 결렬되어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남한만 단독정부가 수립(1948.8.15)되고 6.25가 터지면서 남북한은 분단이된다. 김규식은 북한군에 납북되어 북한에서 병사로 생을 마감한다.
하나 된 통일 국가를 위해 많은 영웅들이 있어고 이념을 내려놓고 화합한 김규식과 여윤형은 마지막까지 하나된 나라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영웅들이다.
버치 보고서 문서로 알아보는 해방정국 역사(1945년~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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