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치 보고서(문서)란?
버치문서에는 미군정 소속으로 레너드 버치 중위가 쓴 보고서,문서를 의미한다. 한국에서 미군정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치 흐름을 바꾸는 정치 공작을 했던 인물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를 달아 놓은 문서와 이승만이 버치에게 보낸 친필메모, 쌀 수집 현황, 거마비내역서, 김규식과 버치가 주고
받은 메모 , 미군정 공식문서,편지, 사진등이 해방 직후부터 분단까지 정치 상황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 문서이다.
해방직후 상황
1945년 8월15일 연합국에 일본이 항복하고 9월9일 남한으로 미군이 들어온다. 당시 소련은 이미 한반도 이북을 모두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에 있던 가장 가까운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사단을 한반도 이남으로 급하게 들어보낸 것이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없이 들어온 미군정은 정부를 통치할 전문 인력 부재로 통치 효율을 위해 일본 총독부 관리들을 다시 등용하는 '일본인 관공리 유임' 을 발표한다.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무지했던 존 하지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한국인 반발로 일본인 등용은 취소하고 귀환조치를 내린 후 이번에는 친일관리를 대거 유임한다.
이승만 귀국
일본에 독립운동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선전포고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국내 정치인들은 대부분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좌파인사들었기 에 미국에 우호적이고 우익 정치인으로 미국 유학파 정치인 이승만을 불러들인다.
당시 이승만은 가장 유명한 정치인 중의 한사람이었고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서 인기 연설가로 활동하고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에서 세운 '조선인민공화국' 좌익세력 조직에 이승만을 주석으로 선출할 정도로 명성이 있던 정치인이었다. 여기서 미국이 주목한 이승만의 특징한 강력한 반공주의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945년 10월 16일 맥아더 전용기를 타고 화려하게 이승만은 국내로 귀국한다 .
처음 좌,우익을 망라한 정치단체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으로 추대되며 최고지도자로 부상하지만 이승만이 친일세력까지 수용하면서 정치인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김구 선생 귀국
이에 미군정은 다시 김구 주석을 불러들인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으므로 당시 남한에 있던 미군정은 고민에 빠진다. 대한 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면 조선공산당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도 인정해야 되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 서명을 받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1945년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다.
당시 중요한 정치인들 중 좌익세력의 박헌영, 중도좌익 여운형, 중도우익 김규식, 우익 김구,이승만,송진우, 장덕수등이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와 김구에게 전면에 나서지 말고 자신이 지원하는 제3의 인물을 지원하라고 요청한다. 이에 정치적 입지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미국에 로비를 하러 간다.
신탁통치 파동
이승만이 미국에 간 사이 신탁통치 파동이 일어나면서 좌파, 우파의 분열이 시작된다.
※신탁통치 : 국제연합의 위임을 받은 나라가 일정한 지역을 통치하는 제도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소련, 영국의 3개국 외상이 모여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한다. 미국은 "30년 신탁통치"를 제안하고 당시 한국인의 사회주의 지지율이 70%이상이였기 때문에 소련은 "즉시 독립"을 제안한다.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
미국의 경우 한반도가 즉시 독립할 경우 한반도가 한 나라만의 영향 하에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미소영 중 4개국이 신탁통치를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소련이 즉시 독립을 제안한 이유는 당시 한반도의 분위기는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있어도 사회주의 국가가 될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왜 사회주의를 선호했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끝까지 친일을 하지 않은 애국자가 대다수였고 해방 이후 한국의 빠른 성장 방법을 고민하던 중 자본주의 국가 중 가장 빨리 성장한 국가는 일본과 독일었다. 그러나 그 국가들도 100년 넘게 걸렸다. 그러나 소련은 1917년 공산주의 정권 수립 후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대립하는 세계2위 강대국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빠른 국가 성장에 사회주의가 접합하다고 생각했다. 유럽에서 분단된 국가 독일은 미영프소가 1945년 전범국의 힘을 빼기 위해 분할점렴했다는 것도 이유였다.
모스크바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타협점을 찾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에 따라 5년 신탁통치 후 독립국가 수립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동아일보 오보사건
그러나 한반도를 충격에 빠뜨린 보도가 나온다. 미국이 즉시독립,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사실과 정반대의 오보가 보도된 것이다.
가짜뉴스에 분노한 국민들
이 기사가 나오기 전까지 국민들은 소련에 대한 반감이 없었다. 그러나 오보인지 왜곡인지 확인되지 않은 의문점이 남는 가짜 뉴스가 온 국민의 분노를 부른다. 이 보도로 국민들은 소련에 반감을 갖게 된다.
가짜뉴스로 희생된 송진우
1945년 12월 28일 임시정부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시작한다. 반탁운동이 시작되면서 미군정에 호의적이였던 '한국민주당' 우익 정치인 한민당 수석 총무 송진우가 암살당한다. 그 이유는 송진우는 당시 뉴스가 오보임을 알고 있었고 반탁운동을 강하게 하면 반미군 투쟁이 될 것임을 예견에 반탁운동을 반대했었다. 그리고 결국 암살당한 것이다.
오해받는 좌익세력
그 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가 공개되고 정세가 바뀐다. 1946년 1월 3일 좌익 주도로 '3상회의 지지'가 시작된다. 그러면서 '신탁통치' 자체를 찬성한다고 오해받은 좌익세력이었다.
우익과 미국에 유리한 정치 프레임 형성
그 상황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이 1946년 외신 기자회견에서 신탁통치를 찬성하며 소련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찬성한다로 신문기사가 발표된다. 이것은 의도된 왜곡기사였다.
그리고 점점 더 왜국되어 찬탁은 곧 매국노, 반탁은 애국자로 정치 프레임들이 씌워지면서 주도권을 얻은 우익세력들이었고 여기에 친일파들이 대거 합류한다.
45년도 해방직후는 민족 독립운동가VS 반민족 친일파 였으나 신탁통치 파동으로 찬탁하는 좌파(반민족) VS 반탁하는 우파(민족) 바뀌게 된것이다. 민족과 반민족의 구도에서 좌익과 우익의 이념 갈등 프레임이 씌워지면 민족적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정치적 프레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당시 3.1 운동 기념식은 민족분열의 양상을 보여주었는데 반탁세력은 서울운동장과 모스크바 회의 지지세력은 남산공원에서 따로 기념식이 열렸고 급기야 두 시위대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렇게 해방직후는 가짜 뉴스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1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
이렇게 가짜뉴스로 인해 미국쪽에 유리한 상황이 되었지만 문제는 자신들이 지지하던 지도자들이 반탁 운동을 하고 있었고 미소 공동위원회에 우익정당이 참여해야 하는 상황에서 반탁운동 지도자 김구, 이승만이 불참 선언을 한다. 이렇게 임시 정부 구성에서 제외될 위기에 처한 반탁 세력으로 인해 1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미국이 결렬시킨다.
미군정의 선택 김규식
이로 인해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방해요인으로 전락시킨 배경이 된다. 그래서 미군정이 선택한 제3의 인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한 김규식이였다.
미국이 원하는 인물은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여 가능한 사람으로 소련과 소통할 수 있고 미국의 입장을 지지할 리더가 필요했고 이 조건에 적합한 사람을 김규식이라 생각했다. 미군정은 김규식을 지도자로 지지하는 조력자로 나설것을 이승만과 김구선생에게 요청한다.
김규식의 조력자 여윤형
그러나 이승만은 지방 순회를 하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미군정이 찾은 김규식의 조력자로 여운형을 선택한다. 여운형은 1886~1947년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로 건국동맹 창설자이자 중도 좌파 정치인이다.
그러나 여운형은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도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미군정은 여운형을 믿을수 없었다. 좌파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때마침 여운형이 친일을 했다는 가짜 뉴스 기사를 경성일보(일본 총독부 기관지)에 보도한다.
이에 여운형의 약점을 찾기 위해 특별 조사팀을 만들어 일본에 보낸후 조선총독부 총독들을 인터뷰한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통일정부의 지도자로 떠오른 이유는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과도 소통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성이 된다. 이 좌우합작위원회를 미군정이 지원하고 신당동 버치의 집에서 좌우합작위원회 정식 예비회담을 열었다.
우익과 좌익은 모두 상대편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해 양쪽에서 동시에 압력을 주는 상황이었지만 미국의 지원으로 제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때는 김구와 이승만을 제외한 우익 세력이 참가했으나 통일 정부 수립의 꿈에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임시정부 헌장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하며 임시정부 수립은 실패하게 된다. 헌장이 만들어진 지 나흘 만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미군정에서 여운형의 암살 배후를 조사했고 경호원의 인터뷰 내용에 확인된 것은 경찰 개입의 가능성이 암시되었다.
결국 12번째 테러로 여운형은 세상을 떠났다.
미소공동위원회 완전히 결렬
또한 김규식을 지지해줄 조력자가 상실되었고 통일 정부를 이끌 지도자 또한 상실된 것이었다. 이 시점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되었던 시기로 여운형의 죽움으로 미.소 공동위원회는 완전히 결렬된다. 그리고 1947년 9월 17일 UN으로 한반도 문제가 이관되었다.
장덕수 암살 사건
여운형의 죽음 이후 미군정이 조력자로 선택한 인물은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 장덕수였다. 그러나 장덕수 또한 1947년 12월 2일 남측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던 세력 장덕수가 자택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사건의 배후에 김구를 암살 배후로 몰아간다. 그렇게 장덕수 암살 배후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된 김구였고 그날이 남북협상 가기 직전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경찰이 직접 암살했다.
김구,김규식의 북한행
1948년 2월 UN소총회 남한만의 단독 선거안이 가결했으나 김규식은 북한 지도자에 서한을 보내 남북 지도자 회담을 추진한다. 그렇게 1948.4.19~4.30일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열리지만 조직적으로 참가한 북측과 개별 참가한 남측의 상황에서 북한의 각본대로 진행되는 회의 방식과 김일성의 독재를 숭배하는 분위기로 남측 주도로 공식 일정에 없던 '4김 회담'을 가지지만 남북의 입장차이만 확인하고 남북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김규식, 김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고 1948년 7월 20일 초대 대통령 선거 결과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었는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은 김구가 2등을 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하게 된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암살사건이 발생, 그 후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6.25를 일으키고 남북한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분단국가로 남는다. 또한 김규식은 6.25 전쟁 때 북한군에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가서 병으로 사망한다.
우리는 왜 잊혀진 영웅을 기억하고 실패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가?
이러한 실패한 역사지만 이것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증명해주는 소중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의 독립의지를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도 실패한 역사이나 분단보다 통일을 원했음을 증명할 유일한 역사이다.
분단의 책임이 외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극단적인 분열을 일으켰고 분열을 통합으로 바꾸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폭력과 테러로 쓰러져갔다. 분단은 분명 우리 내부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화합하지 못한 역사에 책임을 느끼고 고민해야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교훈이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한 첫번째 단계가 이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의미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출처 차이나는 클라스 30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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