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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이릉대전 유비, 관우, 조조, 장비의 최후

by 365 ^^ 2021.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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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속 삼국지 캐릭터 분석/ 삼고초려 의미/ 천하삼분지계 (삼국지 이야기 2.)

 

208년 적벽대전 조조를 공격한 손권. 유비 연합군은 화공으로 조조를 무너트린다. 한편 적벽의 동맹 유비와 손권 또한 갈등의 불씨가 피어오른다 손권과 유비는 서로 형주 땅을 차지하고 천하를 제패할 꿈을 숨긴 채 불안한 동맹을 이어간다.  

 

적벽대전 이후 

남북 교통 요충지, 형주를 가로지르는 장강을 두고 동서로 영토확장이 가능한 형주는 병가핑쟁지지(兵家必爭之地)로 전쟁에서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지역 형주였고 적벽대전 패배 후 조조는 북쪽으로 이동하고 기세 등등해진 손권은 강릉까지 점령한다. 유비는 형주 남쪽 (무릉,장사, 영릉, 계양) 4군을 차지하면서 형주 삼등분 북쪽 조조, 중심 손권, 남쪽 유비로 삼등분 된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려던 이유 

지도로 보면 유비가 형주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가장 큰 수혜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비가 차지한 곳은 넓기만하고 실속이 없는 남부였다. 형주 남부 4군은 전통적으로 이민족의 땅이였고 인구가 적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력을 키우기는 어려운 땅이었다. 그래서 유빈은 익주로 세력을 넓히려 했다.

 

 

익주는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 일대인데 농업 생산력이 뛰어난 지역으로 산지로 둘러싸인 내륙 분지기 때문에 한 관문을 막으면 만 명의 군대가 와도 들어오지 못하는 수비 최적의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안정적으로 국가 운영이 쉬운 땅으로 유비가 국가 기틀을 마련하고 웅비할 수 있는 최고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런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익주의 입구인 강릉을 차지해야 했지만 그곳에는 동맹 관계의 손권이 있었다. 이에 유비는 손권에게 강릉을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손권은 고민하지만 결국 승락한다 

 

 

 

 

손권이 강릉을 내어준 이유  

적벽대전에 패배했어도 조조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조조를 손권 혼자서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손권 혼자서 유비를 완전히 제압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강릉을 빌려 줬던 것이다. 차츰 세력을 키워가는 유비에게 손권은 자신의 여동생과 혼인을 제안한다.  공동의 적 조조를 견제하고 양국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함이었다 

 

 

 

유비의 세번째 부인 손부인

유비는 첫째 부인 미부인, 둘째 감부인 모두 사망한 상태였고 당시 유비의 나이는 약 50세(지천명), 손권 여동생의 나이(약 25세)였다.  손권의 여동생(손상향) 손부인은 제기가 있고 강인하고 용감하며 여러 오라버니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이 언급하길 낮에는 손권, 조조에 두려움을 느끼고 가까이로는 손부인 때문에 신변에 변고가 생길까 두려워했다. 

 

손부인은 항시 백여명의 칼찬 시비를 옆에 두었다고 한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는 과정

 

당시 익주는  유비의 종친인 유장이 다스리고 있었고 그때 마침 조조의 침략 소문을 들은 유장은 조조를 막아준다는 유비에게 자신의 군사를 빌려준다. 그러나 유비는 민심 얻기에만 신경쓰고 전쟁과 관련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또한 손권이 협공하여 조조를 치자고 하자 유비는 다시 유장에게 군사를 더 빌려온다. 그러나 유비는 자신이 빌린 그 군사를 가지고 유장을 공격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인 유장)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은 손권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몇 년 전에 손권은 유비에게 익주를 같이 치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 유비는 같은 한실 종친인데 어떻게 익주를 차지할 수 있겠냐며 거절했고 이에 손권도 익주 공격을 포기를 했었다. 그런 익주를 유비가 점령한 것이다. 화가 난 손권은 유비에게 강릉 땅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시간을 계속 끌며 돌려주지 않았다.   

 

 

 

 

 

유비의 이중적인 모습

이렇게 유비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삼국지연의에서 익주 점령 과정을 길게 묘사한 것도 나관중의 소설에 주인공 유비를 변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난세를 평정할 영웅은 유비’ 라는 명분을 소설에 계속 심어 놓은 나관중이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 속 주유(손권의 장수)와 노숙(손권의 전략가)은 유비를 '효웅'으로 표현한다. 이는  효=올빼미 효 자로 올빼미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이다. 보통 효가 들어간 사람은 '음흉하고 착하기만한 사람은 아니다'는 뜻이다.  

 

 

한중 공방전 

이렇게 형주와 익주를 모두 차지한 유비는 조조 손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조는 한중을 점령한 후 공격을 개시한다. 유비가 익주의 북쪽 한중에서 조조와 맞붙게 되고 유비는 무서운 기세로 조조군을 밀어붙였다. 

 

 

'계륵 ' 뜻 (유래) 

조조와 유비가 한중 땅을 놓고 싸울 때 조조는 진격이냐 후퇴냐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곤경에 빠졌는데 마침 닭고기를 먹고 있던 조조에게 병사가 암호를 묻자 계륵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취해 보아도 이렇다할 이득은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계륵으로 조조에게 계륵과 같은 한중 땅이였지만 유비에겐 한중 땅은 중요했다. 결국 조조는 한중을 포기하고 유비는 한중을 차지한 후 한중 왕에 오른다. 이는 한나라 초대 황제 유방이 한중왕으로 한나라를 건국했고 유비 자신이 한나라의 계승자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유비(한중왕 촉나라)/조조(위왕)/손권(오나라) 위촉오 삼국시대 

 

번성전투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조조의 영역으로 북상하여 벌인 전투로 이때 폭우로 조조군은 혼란에 빠진다. 관우가 번성을 공격할때 번성의 백성들이 투항하면서 관우는 그 기세를 몰아 북진한다. 번성 위에는 조조의 근거지 허도가 있었고 관우의 무서운 기세에 조조는 천도까지 고려했었다. (관우의 위세가 중원을 흔들었다) 

 

 

소설 삼국지 관우는 번성 전투에서 독화살을 맞게 되고 이를 치료하게 위해 전설적인 인물 화타가 등장한다. 그러나 화타는 독화살을 맞기 11년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다. 

 

 

관우의 죽음 

219년 조조군을 무섭게 몰아 부치며 천하를 진동시켰던 관우지만 전세는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새롭게 임명된 조조의 장군 육손은 관우의 업적을 칭송하고 자신을 한없이 낮춘 편지를 관우에게 전하고 육손의 아부에 관우는 안심한다. 

 

육손의 관우에 대한 아부편지

이틈을 타 손권은 강릉을 차지하고 이 소식을 들은 관우는 놀라 강릉쪽으로 군사를 돌리지만 그 과정에서  조조와 손잡은 손권에 의해 관우는 포위되고 만다. 순식간에 근거지를 잃고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 관우는 결국 오나라 군대에 잡혀 참수(관우의 나이 58세때)를 당하게 된다.

 

손권은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낸다. 조조는 제후의 예로 장례를 치른다. 형제와 같던 관우의 죽음으로 유빈은 복수를 다짐하며 오나라와 전쟁을 준비한다.  

 

관우신앙(관왕묘) 어떻게 조선에 들어왔을까?

 

동묘 속 관우신앙(관왕묘) 어떻게 조선에 들어왔을까?

중국에서 회사, 집, 음식점 등에 관우 그림, 관우상 그린 그림을 많이 볼수 있다. 중국 민간 신앙에서는 관우를 전쟁의 신, 복덕, 재물의 신으로 모시고 있다. 중국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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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죽음과 위.촉.오 삼국지 형성

220년 1월 오랜 지병을 앓다가 갑작스레 병석에 눕게 된 조조는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관우가 죽고 약 한달 사이에 조조도 6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위나라를 세운다.

조조의 실제 무덤 
2018년에는 중국의 허난성 안양현에서 조조의 무덤도 발견되었다. 총면적이 약 740평방미터에 이르는 어머어머한 크기다. 

 

제갈량의 권유로 유비도 촉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다. 이듬해 손권도 오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다. 이렇게 위.촉.오 나라 삼국지가 형성된다.

 

 

 

장비의 죽음

장비는 관우의 죽음으로 점점 포악해져 자신의 부하, 장수를 포악하게 다루게 되고 이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장비였다.  

 

  

이릉대전

전쟁을 준비하던 유비를 부하.신하들은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촉의 적은 위지, 오가 아니다. 그러나 유비는 평소와 달리 반대를 무릅쓰고 (이제는 관우형으로써) 전쟁을 강행한다. 손권이 화친을 청하지만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이릉대전이 시작된다.  221년 마침내 시작된 이릉대전은 오의 장수 육손(관우를 죽음으로 이끌었던)은 기회를 엿보다 화공을 펼쳐 유비군을 격파하고 승기를 잡는다. 파죽지세로 몰아 부치는 육손의 공격에 유비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죽은 자가 수만에 이르고 장강 일대에 병사들의 시신이 떠다녔다.

 

 

유비의 죽음

결국 유비는 백제성까지 후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다가 223년 이듬해 (화병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66세에 최후를 맞이한다.  

 

[역사저널 /벌거벗은 세계사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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