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회사, 집, 음식점 등에 관우 그림, 관우상 그린 그림을 많이 볼수 있다. 동양의 샤머니즘 중에 한이 클수록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풍습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영 장군을 신격화 하고 있고 중국 민간 신앙에서는 관우를 전쟁의 신, 복덕, 재물의 신으로 모시고 있다. 중국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도 관우를 전국각지에서 모시고 있다.
중국 관림
제왕으로 대우받은 관우의 무덤을 관림이라고 부르는데 사천성에도 관우의 묘가 있지만 많은 사람이 찾는 진정한 관우의 무덤은 조조의 땅 하남성 낙양 외곽에 있다. 중국 관림은 관우의 머리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높이 여겨 신과 같은 존재이다. 중국에서 무덤마다 모시는 칭호가 다른데 황제의 묘는 능, 성인의 묘는 '림'으로 공자와 관우의 묘만 '림'으로 부른다.
관우는 어떻게 재물신으로 모셔졌을까?
관우의 고향은 하동군 해주에는 중국 최대의 해지 (소금호수)가 있다. 중국 소금의 70%가 해주에서 생산될 정도로 해주는 옛날부터 유명한 염지(소금 생산지)였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이 중국 각지로 팔리면서 소금 상인들은 대부호가 되었다. 이런 부호들이 믿는 신이 관우신이여서 이들을 통해 전국적으로 모든 상인들이 모시기 시작하면서 관우신이 재물, 복덕의 신으로 여겨졌다.
우리나라 전국의 관우 사당
관우 신앙은 어떻게 조선에 들어왔나?
정유재란에 참전한 조명 연합군의 명나라 장수들이 관우 신앙을 도입한 것으로 명나라 장수들이 전국 각지에 관우신을 모시면서 사당을 세웠다. 명나라 군대는 주둔지 마다 관왕묘(전쟁의 신)를 세웠다.
남묘 (남관왕묘) 건립
당시 명나라 장수 '진인'이 울산성 전투(1589년)에서 왜군과 싸우다 총탄을 맞아 거의 죽을뻔 했다. 그러나 '진인'은 자신이 관우신 덕에 살아났다고 여기며 조선에 관우 사당 건립을 강력히 건의했다. 그래서 남대문 밖에 관우신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게 된다. 재조지은(거의 멸망하게 된 조선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 의 나라 명나라의 요청이었으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동묘 (동관왕묘 선조 32년) 관우 사당
우리나라에도 관우를 모신 사당이 있는데 현존 사당 중 가장 큰 규묘의 동관왕묘 (동묘)이다. 동묘가 지어진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명나라 황제 신종은 서울에 관왕묘를 세우기를 요청한다. 당시 명나라는 관우신앙의 열기가 고조되던 때였고 명나라 황제 만력제=신종은 관우신을 열열히 모시던 왕이었다. 신종은 조선 왕실에 금4천냥과 중국의 기술자도 보내서 관왕묘 건립을 서둘렀고 친필로 사당에 내걸 현판까지 써서 보내왔다.
남쪽 남관왕묘, 동쪽 동관왕묘 등 전국 각지에 관왕묘를 세운다.
조선 초기 관우 신앙
관우 신앙은 성리학 기반의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중국인에 무신이고 게다가 자신의 나라 촉한을 지키지도 못하고 멸망한 나라의 장수를 전쟁신으로 섬기는 것은 조선에서는 원치않았던 신앙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조선의 관왕묘는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숙종 (관우신앙의 부활)
억지로 세워져 조선 초기는 방치되었다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관우 신앙이 조선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숙종 때 부터이다. 숙종이 관왕묘를 모시게 된 이유는 당시 붕당으로 인해 왕권이 흔들리는 상황에 왕권강화를 뒷받침 해줄 영웅적 존재로서 관운장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숙종 이후 영조때에도 계속되었다 .
영조, 정조때 관우 신앙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동묘에 참배했다. 정조 때에는 자신을 포함해 숙종, 영조, 사도세자 4명의 임금으로 비석을 세우고 관우를 찬양하는 글을 새겨넣었다. 특이한 점은 비문에 정사가 아닌 소설 삼국지의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숙종, 영조, 정조 거쳐 관왕묘는 국가 제사로 편입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관왕묘를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관우신앙은 민간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고종 북묘
고종 관우신앙에 가장 적극적인 왕이었고 북묘를 건립했다. 고종은 갑신정변(1887)때 북묘로 피신했고 그의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만큼 개인적 신앙적 관심이 높았다.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가 충주로 피난갔다가 피난지 충주에서 관우를 모시는 무당 진령군을 만나게 된다. 명성황후의 환궁 날짜를 맞추게 되면서 무당의 주청으로 북묘를 건립하게 된다.
서묘 건립
북묘가 건립된 이후 서대문 밖에 서묘를 세웠다. 서묘는 1902년 특정관 조병식의 주청으로 세워졌다. 유비와 장비를 모시는 곳이 없다해서 이자리에 관우묘를 짓게 된다. 사람들이 관우장군을 더 숭상하다보니 이 지역을 관우묘라 불렀고 방위상 서묘라 했다.
이로써 서울에 동서남북에 관왕묘가 생겼고 초창기 6개에 불과하던 관왕묘가 고종대에는 30여개로 늘어났다
관우 신앙이 조선에서 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이렇게 관우 신앙이 조선에서 신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충의에 상징인 관우의 존재를 부각시켜 왕권 강화에 관우 신앙을 이용하려던 조선왕들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이후 국운이 쇠퇴하면서 국가제사가 모두 폐지되고 관왕묘의 제사 또한 페지되면서 이후 민간에서 1900년대 중반까지 대중적인 호응을 이어왔다. 그러나 동묘에서 종교활동이 금지되면서 관우신앙의 열기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관우신앙의 명맥
시대가 지나면서 관우 신앙은 우리땅에서 점차 쇠퇴하였지만 민간에는 여러 형태로 관우 신앙이 존재하고 있다.
강화도의 동관제묘에서는 무속인들에 의해 관우신앙이 대대로 모셔지고 있다. 관우신은 무속신앙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하고 신흥종교에서도 관우신을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민간에서는 관우신이 관살을 막아주고 관운, 병을 다스리는 신등의 다양한 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관우가 오랜 시간동안 신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덕목인 충과 의를 관우에게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하더라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관우는 최후를 맞이하지만 죽어서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역사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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