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중국 위촉오 삼국통일의 승자는? (제갈공명의 출사표,죽음, 무덤)

by 365 ^^ 2021. 7. 30.
반응형

[322회]

 

221~ 222년 이릉대전에 참패하면서 촉은 피폐해졌고 민심 또한 좋지 않았다. 촉나라 관우 장비가 죽고 223년 유비 마저 숨을 거둔다. 촉나라의 국정을 책임지게 된 제갈공명은 유비의 아들 유선을 보좌한다. 잠을 자도 편치가 않고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르겠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당시 제갈공명의 중압감이 대단했다. 

 

유비가 죽고 유비의 아들 유선이 촉의 2대 황제로 오른다. 그러나 유선은 삼국에서 가장 무능한 황제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정(황제가 어리거나 아플 때 일시적으로 황제 대신 국정을 책임지는 것)대신과 달리 충성심으로 국정을 책임진 제갈공명이었다.

 

 

제갈공명(제갈량)의 사당과 무덤이 있는 '무후사'

 

중국 쓰촨성 청두에 제갈공명의 사당 무후사가 있다. 1500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무후는 공명의 시호,
무후사에 가면 제갈량의 출사표가 쓰여있는 벽면이 인기가 있다.
제갈량 , 제갈공명의 실제 묘 무후묘

 

 

제갈량의 출사표 

227년 삼국통일의 의지를 담은 출사표를 써 촉한 황제 유선에게 올린 뒤 제갈공명은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 공격에 나선다.

 

제갈공명 출사표 내용

 

출사표 뜻:  나갈 출+군대 사

(군대를 이끌고 나갈 때 임금에게 올리는 글)

제갈공명은 유비, 유선까지 대를 이어 충성하는 마음을 담아 쓴 것이 출사표의 내용이다.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있지만 익주는 피폐하니 이는 진실로 위급하여 존망이 걸린 때 입니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생각지 않으시고 외람하게도 스스로 몸을 낮춘 후 삼고초려하여 당시 세상일을 신에게 물었습니다.  바라는 바는 우둔한 재능을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을 물리치고 한나라 황실을 부흥 시켜 옛 도읍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멀리 떠나는 마당에 글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갈공명이 무리해서 위나라와의 전쟁을 결심한 배경은?

 

조조와 제갈공명은 서주 대학살(193년, 194년) 로인한 악연으로 서주 대학살로 수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서주 대학살을 피해 형주로 피난 간 제갈공명이었다. 그러나 제갈공명의 개인적인 복수만으로 위나라와의 전쟁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제갈공명이 유비를 선택한 이유는 한 왕실의 후예였기 때문이었다. 제갈공명의 절대목표는 ‘한실부흥’이었다.  그 당시 유비, 관우, 장비 왠만한 장수들이 모두 떠나고 제갈공명 홀로 이뤄내야 했던 사명이었다.

 

 

정사 삼국지 속 제량공명 평가

삼국 지연의 속 제갈공명은 신출귀몰한 능력자로 나오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군사재목으로는 그다지 능력이 있지 않았지만 행정가로서는  뛰어난 인재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제갈공명은 북벌을 위해 장기간 5년을 준비했다.  제갈공명의 북벌준비를 위해 익주 토착세력을 기용해 민심을 수습에 노력했다.  또한 군사자금을 확보를 위해 제갈공명은 촉나라에서 유명한 촉금(촉나라 비단)으로 군사자금을 마련했다. 황제를 위한 진상품이였고 적국의 위나라에서 사갈 정도로 품질이 좋았던 비단 무역을 통해 군사자금을 확보한 것이다.

 

 

225년 제갈공명의 남만정벌

 

남만 정벌에 배경은 중국 남부 운남성이다. 당시까지만해도 운남성은 미지의 땅이었다. 유비가 죽은 이후 남쪽지역의 유목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제갈공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가서 정벌한다.

 

칠종칠금( 七縱七擒 ) 사자성어 뜻

그러나 제갈공명이 남만정벌에서의 일화는 대부분 허구이지만 남만정벌을 했다는 것과 제갈공명이 남만의 맹획을 7번 잡았다가 7번 풀어준 이야기는 역사에 있는 사실이다. (한진춘추, 화양국지 중국사서에 기록된 칠종칠금 일화이다) 제갈공명이 맹획을 7번 놓아 준 이유는 '공심책'이라고 해서 마음을 공격해서 진정으로 복종하게 하는 전략이다. 이민족의 반란을 무력으로만 누른것이 아닌 스스로 와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복종을 만들어 낸 것이 칠종칠금이다.

 

남만 정벌의 이유는 북벅을 위한 후방기지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전쟁에서 소비되는 재정적인 지원을 남만정벌을 통해 북벌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데 사용했다.

 

 

 

228년 1차 북벌전쟁

실제로 제갈공명이 직접 출정해 현장 지휘한 첫 전쟁이 북벌전쟁이다. 제갈공명의 실제 역할은 후방에서 전략을 구상하던 책사 역할이었으나 장수가 없으니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전을 한 것이다. 전장 경험이 부족했던 제갈량이지만 1차 북벌만큼은 탁월한 전술을 구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촉 군대를 두 패로 나눈 후 한 부대를  조자룡에게 맡겨  위의 장안 방면으로 진격해 위장 공격을 하게 해서 장안 을 공격하는 것 처럼 위의 병력을 유인했다. 이때 제갈공명이 대군을 이끌고 기산을 거쳐 천수 방향으로 진격해 위나라에 인접한 양주를 점령해 위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읍참마속' (泣斬馬謖) 사자성어 뜻

그러나 이때 제갈공명이 아끼던 부하 장수 ‘마속’ 이 강기슭에 진을 치라는 제갈공명의 명령을 불복종을 하면서 (산위에 진을 친 마속의 촉군은 그곳으로 통하는 물길을 끊어버린 위군에게 패한 것이다) 전쟁에 패하게 된다. 결국 5년이나 준비한 공명의 1차 북벌은 실패로 끝나면서  마속의 명령 불복종이 결정적 패착이라고 판단한 제갈공명은 자신이 아끼던 마속의 처형을 (울면서) 명령하고 자신 스스로도 승상 자리에서 물러난다.

 

'읍참마속'은 형주학파의 특징인 공정, 엄격, 합리적 법 집행 강조하여 기강을 바로 잡는 것으로 사적인 인연보다 원리원칙을 더 중요시하는 제갈공명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마의 등장

이후에 228년 1차 북벌 이후 231년까지 3차례 북벌을 단행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5차 북벌전쟁 이때는 10만 군대를 보내게 되고 제갈공명에 맞서는 위 지략가 '사마의'가 등장하게 된다.

 

 

234년 5차 북벌전쟁 

이때 오나라와 연합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오나라에 역병이 돌면서 홀로 위나라와 맞서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위나라는 촉의 군수물자 보급의 어려움을 알고 장기전으로 들어갔고 전쟁을 계속 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사마의의 도발을 감행한다. 사마의에게 사신을 보내 여성의 악세사리와 함께 편지를 전달한다. 전투를 피하는 사마의를 도발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사마의는 엄청나게 분노하고 전쟁을 준비하려고 했으나 부하장수 신비의 만류로 전쟁을 피한다.

 

 

제갈공명의 죽음 

제갈공명과 사마의가 대치하는 지역은 '오장원'이었다. 중국 산시성에 위치한 고지대 평안으로 제갈공명과 사마의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234년 8월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사망한다. 구체적인 제갈공명의 사망원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제갈량은 계설향을 먹고 있었는데 계설향은 적벽대전 당시 조조가 공명을 회유하기 위에 보낸 약재로써 강한 향기로 위장을 깨워 소화를 촉진하는 작용이 강하다. 

 

 

제갈공명은 음식 맛을 느끼지 못 하는 식불감미 증상이 있었다. 이로 볼때 위장질환을 앓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죽기 전에 많은 피를 토했다고 한다. 이는 스트레스와 과로사로 보인다. 그가 두 번째 출사표에 남긴 말만 봐도 알수 있다. 이렇게 제갈공명은 한실부흥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54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제갈공명 후출사표

 

제갈공명의 유언

정사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은 자신의 죽으면 바로 철수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평생 검소하게 생활했던 것이 유언에도 나타난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물리쳤다. (중국속담)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여전히 그 사람의 영향력이 남아 있을 때 쓰는 중국 속담으로 제갈량이 죽은 후에도 철수하는 촉군을 추격한 사마의 군대는 촉군의 장수가 제갈량의 복장으로 변장 후 제갈량이 살아 있는것 처럼 행동했고 공격할 듯 북을 울리며 위군을 견제하며 후퇴했다. 이것이 제갈량의 마지막 죽기전 작전이었다. 

 

*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촉나라 군대는 쓸쓸하게 퇴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즉위 당시와 사망때 재산이 똑같았다.

제갈공명은 실패를 알면서도 우직하게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 실패를 향해 나아가는 비극적 영웅이었다.

 

 

제갈공명 사망 이후 234~280년  역사

 

제갈량이 죽고나서도 삼국통일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삼국통일은 누가했을까?

239년 정변을 일으키고 위의 권력을 장악한다. 조조의 후예들은 사마의의 허수아비가 되고 사마씨 가문으로 권력이 넘어가게 된다. 바로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가 촉을 공격해 263년 촉이 멸망하게 되고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 황제를 폐하고 265년 서진을 건국한다. 

 

 

그리고 이 서진이 오를 멸망시켜 280년에 삼국을 통일시킨다.  삼국지의 최종 주인공은 사마 씨 가문이었고 삼국통일의 최종 국가는 위.촉.오도 아닌 서진이었다.

 

1996년 손권이 통치했던 오나라에서 대나무에 기록된 당시 문서가 발견되었다. 약 10만여 매, 총 200만 자 분량의 목간과 죽간이 출토되었고 그 안에는 손권의 통치 당시의 연호가 확인되었다.

 

 

☞관도대전 속 조조 /동탁의 최후 (삼국지 이야기 1)

적벽대전 속 삼국지 캐릭터 분석/ 삼고초려 의미/ 천하삼분지계 (삼국지 이야기 2.)

이릉대전 유비, 관우, 장비의 최후(삼국지 이야기 3)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