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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광개토대왕 업적 정복 활동 이야기

by 365 ^^ 2021.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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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회]

 

광개토대왕을 언급할 때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이라고 한다. 광개토태왕은 385년 나이 13세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기근이 들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 고구려는 어려웠다. 391년 5월 18세에 첫 번째 정복 활동을 나섰다.  

 

 

패려 정벌  (거란 정벌)

 

초원을 누비던 호전적인 거란족 패려는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자주 침범했다. 패려는 거란의 한 갈래인 만주 북서부 일대에 유목민 집단으로 거란은 고구려 때 자주 쳐들어온다. 특히 소수림왕 8년(378년) 때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고 4개월 만에 거란 정벌을 떠난다. 비문의 첫 무훈이 거란 정벌인 이유는 아들 장수왕의 관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패려 정벌로 얻은 이익 

 

백성 구출

광개토대왕이 거란을 정벌하면서 소수림왕때 빼앗긴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되찾아 온다. 광개토대왕은 1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이후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신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이런 선택에 도움을 받은 것이기도 한다. 

 

 

소금 획득

패려 정벌로 얻은 지역이 시라무렌강 유역 (당시 이름은 염수)에 얻은 소금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고대에는 소금을 화폐처럼 사용했다.  샐러리맨의 어원(salaried man) 소금을 지급한다는 뜻의 라틴어 'Salarium(살라리움)'에서 유래된 말이다. 로마시대에는 월급을 소금으로 받기도 했다. 

 

가축 획득

거란족이 있던 구릉지대에는 말, 소, 양등이  많아 많은 가축도 획득하게 된다. 이것은 이후 정복 활동의 전략적 물자가 된다.  

 

당시 거란족(패려)은 유목민인 선비족의 일족으로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호전적 성격의 유목민이었다. 머리카락을 일부만 남기고 모두 미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모습 자체가 다른 민족에게 공포였다. 

 

 

☞중국 북방민족 변발 (흉노족, 선비족, 돌궐, 거란 ) 알아보기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고 4세기 말 세계의 모습
 

날이갈수록 쇠퇴해가던 로마가 드디어 395년   동.서로 분열된 로마제국
5호 16국 시대 (304~439년) 흉노, 선비, 강,갈,저, 다섯 이민족이 화복 지역을 지배하며 잇달아 16개의 나라를 세우던 시대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

 

그러나 거란을 정벌하고 광개토대왕은 빠른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서 후연과의 국경 지역을 돌며 사냥까지 한다. 한다. 옛날 4냥 은 단순한 취미 오락이 아니라 군사훈련에 가까웠다. (순수: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 이것은 일종의 광개토대왕의 무력시위였다.  

 

324년 고국원왕 때 고구려를 침공한 연나라(전연) 그때 바로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 때 수도가 함락당하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도 포로가 되었고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도 도굴해갔던 후연은 고구려와는 깊은 원한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후연 위치 그림 후연은 모용선비족이 세운 중국 5호 16국 중 하나, 후연과  고구려 사이에 흐르는 요하강이 있고  후연은   요서 지역에 위치했다. 광개토대왕 초년에 이미 요동을 점령해 고구려 영토에 속해 있었다.

 

고구려의 후연 공격 

 

400년에 고구려는 후연에게 사신을 보내는데 후연은 고구려가 예를 안 갖췄다는 핑계로 고구려가 군사 5만을 보내 신라 원정하는 틈타 군사 3만을 이끌고 요동을 목표로 고구려를 급습한다. 이때 고구려 2개의 성을 함락, 5000호 를 약탈해간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숙군성을 2년 뒤 다시 공격하면서 406년까지 공방전이 이어진다.

후연과 고구려의 공방전/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407년 마지막 전투에서 고구려가 승리를 한다.  

 

요동의 가치 

요동은 고려말 조선시대에도 정벌이 이루어졌던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넓은 농경지가 있고 산둥반도와 가까운 요동은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바닷길을 장악의 중요한 장소로 교통로, 지정학적으로 사통팔달의 요지이다.

 

 

요동반도를 장악하는 것은 영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치도 있다. 바로 철광석이 풍부한 곳이 바로 요동으로 최강 철갑기병의 배경이 된 요동을 장악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 공격 

 

396년 광개토대왕은 한강을 건너 백제를 공격한다. 기병에서 수륙양면으로 공격을 퍼붓는 고구려군에게 백제 아신왕( 40대)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20대) 에게 무릎을 꿇는다.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원한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사망한 고국원왕(광개토대왕 할아버지)의 수십 년 원한을 즉위 6년 만에 설욕한 광개토대왕이다. 전쟁 후 백제는 포로 1000명 베 1000 필을 바치고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 신하들을 데리고 귀환한다.  

 

고구려는 백제를 적대시하여 낮추어 부른 말이 '백잔'인데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7번의 전쟁이 새겨져 있는데 상대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달랐던 광개토대왕임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백제, 신라, 동부여의 나라에는 태왕이 은덕을 베풀지만( 동류의식이 있는 국가들) 왜, 패려, 후연 등은 참살, 궤멸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광개토대왕 시기가 고구려 최대의 영토였다? 

 

광개토대왕은 18세 즉위해서 한반도와 연해주, 만주, 중원으로 동아시아의 대 제국을 완성했으나 39세에 단명한다. 광개토대왕 사후에 아버지와 달리 아들 장수왕은 97세까지 장수하며 고구려를 동아시아 강국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고구려 때 최대의 영토를 차지했던 왕을 광개토대왕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장수왕의 손자 고구려 21대 왕 문자왕이다. (장수왕이 아들보다 오래 살아 손자로 왕권이 이어지면서 )장수왕, 문자왕까지 대를 이어 고구려의 영토를 지켰다는 것에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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