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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살수대첩 을지문덕은 수양제를 어떻게 멸망시켰나?

by 365 ^^ 2021.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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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95회 / 역사스페셜 19회]

살수대첩  

7세기 612년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동원해 수양제는 고구려는 침공하지만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청천강(=살수)에서 수군대를 몰살시킨다.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 전체를 통틀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으로 전쟁에 폐패한 수나라는 결국 멸망으로 접어들었다. 

 

수나라 병력 

출발하는데만 40일이 걸렸던 수나라 군대였다. 40리 간격 하루에 1군씩 출정했다. 960리=377km 로 서울~부산까지 거리/1차 세계대전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 병력 규모인 113만 3800명이었다. 고구려 병력은 고작 약 2~30만 명이었다. 그러나 살아 돌아간 군인은 고작 2700명이었다. 

 

 

 

 

 

당시 수나라 상황 

잦은 도발로 수나라의 골칫거리였던 돌궐이 583년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동~서로 분열된다. 수 문제는 권력 암투를 벌이고 있던 칸들의 분열을 조장했다. 약 270여 년간 지속된 중국 분열기를 거쳐 589년 중국을 수나라가 통일한다.  

 

5호16 국 , 위진남북조 시대

 

수문제 시절 

 

수 문제 시절은 세계 최초 과거제(선거제) 실시, 국방,정치국방, 정치, 경제 모두 안정기를 맞으며 살기 좋았던 수나라를 일컫어 개황 지치라고 불렀다. 통일 당시 400만 호였던 호구수가 20년이 안돼서 890만 호로 2배 이상 늘어났고 세금을 낮춰도 국고가 늘어나 창고를 새로 지어야 할 정도로 부국강병의 대국으로 성장한다. 

 

과목선거 중산층 일반 백성들에게 관직 진출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 제도는 수나라-당나라-송나라 과거제의 기원이 된다. 과목 선거의 목적은 귀족 세력을 통제하고 황제권을 강화시키는데 유효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광종때 과거제도가 시작된다. 

 

수문제는 고질적인 중국 대륙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중국 왕조는 장강의 물줄기를 북으로 연결했다. 경항대운하는 북경과 항주를 잇는 대운하 건설한다.

 

중국 강남~강북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해서 이남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북부로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587년 회수-양자강을 잇는 산양독까지 연결하고 아들 수 양제 때 강남하까지 이어지면서 대운하가 완성된다.

 

 

수양제 그는 누구인가? 

 

수문제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와 형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황제에 올랐던 인물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정통성 확보에 대한 노력으로 동궐, 서역 등으로 대외 원정을 나선다. 

 

국 통일 후 북(돌궐), 서(서역) 남(베트남)까지 장악하니 유일하게 남은 동쪽 고구려를 장악하려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수양제는 요동성, 평양성, 살수에서 모두 패하면서 무모한 전쟁으로 나라를 망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된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한 이유 

 

명분은 골칫거리였던 돌궐을 분열시키고 607년 동돌궐에 순행 간 수 양제는 동동궐 군주계민가한의 장막에서 고구려 사신을 만나게 된다. 이간책 등으로 돌궐을 겨우 복속시켰는데 돌궐이 적국의 고구려와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고 심지어 구글의 사실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 것도 전쟁을 일으킬수도 있다는 속내는 보여준 것일 수도 있다고 판단해 수 양제 입장에서는 고구려 정벌 의지를 보여줘야 돌궐이 다른 마음을 안 할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이때 수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입조를 명령한다. 당시 고구려왕은 영양왕영양왕(제26대 왕)이었고 수양제의 입조 요구를 거부한다. 대신 군사 군량을 비축 수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요동성 전투  

 

612년 2월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1차 방어선 요하에 도착하고 부교를 이용 요하를 건넌 수나라군과 한 달 넘게 막아내고 있던 고구려군이지만 결국 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요동성으로 퇴각한다. 100만 대군의 파상공세 앞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요동성이었다. 요동성은 요동지역의 핵심 근거지로 수나라 침공에 대비해서 수십만 석의 군량을 미리 준비, 충분한 방어시설도 갖춰져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요동성 전투는 3개월을 버틴다. 당시 수양제는 약 200KM 거리에 임해돈이라는 곳에 있었고 이곳은 말을 타면 꼬박 이틀이 걸리는 거리였다. 수나라의 명령 체계는 수양제의 지시를 따라야 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항복하는 척하고 처분을 받으러 간 이틀 동안 전열을 정비하는 시간을 갗추게 된것이다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반복하며 고구려는 3개월 동안 수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요동성 공략에 실패하자 분노한 수양제가 직접 와서 싸우나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는다.  

 

현재 요동성은 남아있지 않다.  

 

 

 

평양성 전투 

 

수나라 군대는 수군도 있었다. 요동성이 함락될 기미가 없자 수나라 수군은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한다. 수군의 공격에 평양성의 외성이 뚫리지만 이것은 군사적 전략이었다.  (수나라 군대의 수군은 군량 보급 역할을 담당했으나 패배하면서 수군이 철수하게 되자 수나라 육군은 식량이 부족해진다. 이때 고구려 군대의 지휘관 을지문덕은 성 밖 들과 집을 비워 수나라 군대가 현지에서 식량을 보급하는 것을 막았다. 보급이 끊긴 수나라 군대가 성급하게 공격하자 고구려 군은 집중 공격을 했고 수나라 육군은 평양성 30리 앞까지 진출했다가 평양성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한다. 

 

고구려 최대 평양성은 42년간 쌓은 성으로 높이도 웅장한 외성,  내성,중성내성, 중성, 나성의 4개의 성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철옹성이었다.  대동강과 보통강이 일종의 해자 역할을 하고   있었고  외성은  군사작전이 어려웠던 바둑판식 구조였다. 이를 이용해 외성에 있는 작은 절로 수군을 유인해 수군을 격파했던 고구려였다.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인물은 영양왕의 동생 건무로 후에 고구려 27대 영류왕이 된다. 이 전투에서 흐트러진 대열의 군대를 공격해 결국 평양성 전투도 승리를 한다. 

 

수양제의 별동부대 급파

이에 수양제는 평양성에 별동부대 30만 5천 명을 급파한다. 이들은 보급 식량을 3섬(79.2KG)씩 지고 이동했기 때문에 군량을 버리는 병사가 속출했다.  

 

 

을지문덕의 전술

 

기만전술

이에 을지문덕은 별동부대의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 항복하는 척하며 적진으로 들어갔다. (기만전술) 영양왕을 설득해 항복을 받아내겠다고 말하니 수군이 을지문덕을 풀어주게 된다. 그러나 이때 수양제는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나타나면 사로잡으라는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수나라의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풀어줬다가 다시 부르지만 을지문덕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버렸다 

 

이에 별동대는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쫓기시작한다쫓기 시작한다. 이에 을지문덕은 항복하는 척 도망치기를 몇번을 하면서 수나라 군대를 지치게 만들었고 보급품 조달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청야 입보 전술

적이 사용할 수 있는 군수물자를 모두 태워 없애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수나라 별동대는 현지에서 식량 조달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이 우중문에게 시를 보낸다. 

여수장우중문시  수나라   별동대에 무모한 진군을 조롱하듯 풍자한 시이다 .  

 그 후에 사신을 보내 철군을 하면 왕을 데리고 항복을 하겠다고 하니 수군은 철군을 한다.  

 

 

612년 7월 살수대첩의 그날은 우리가 아는 내용과 다르다? 

 

을지문덕 장군은 철군하는 수나라 별동부대를 추격한다. 살수를 건너는 30만 수나라 별동부대의 후미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수군은 2700여 명만 생존했다. 수양제 군은 7월 25일 퇴각한다. 

 

  살수는 (보살 살 물 수)로 이전부터 있었던 강의 지명 이름이다. (지금의 청천강) 또한  살수대첩의 하일라이트 둑을 터트려 적을 수장시켰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둑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랑에 수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일것이고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등장하는데 이런 엄청난 병력을 물리친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넣은 이야기로 추측된다.
청천강은 강폭이나 깊이로는 수공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둑을 쌓으려면 대규모 토목공사를 해야 되는 상황으로 쉽지 않은 기술이다. 또한 그 많은 수나라 군대가 좁은 강을 한꺼번에 건너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마라톤에 참여한 사람이 3만으로 수나라 군대의 10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데도 비슷한 강폭의 다리를 건너는데 늘어선 사람의 길이만 봐도 한번에 동시에 건너기는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

 

을지문덕 그는 누구인가? 

 

또한 살수대첩 당시 기록에만 등장하는 을지문덕 장군에 대한 정보는 심지어 언제 태어났는지 기록에 없다.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편에 보면 을지문덕은 그 계보가 분명하지 않고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락이 있었고 아울러 문장을 짓고 해석할 수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단지 25줄 439자에 불과하다. 

 

또한 을지문덕이 고구려로 귀화한 선비족으로 추정된 적도 있으나 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다. 고구려라는 국가 자체가 다민족 국가였지만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았던 시대이다. 

 

 

 

살수 대첩 이후 

 

(613년, 614년살수 대첩 후 고구려-수의 전쟁은 두 차례나 더 있었다. 613년 수양제는 고구려는 침공하는데 수양제의 2차 침공 때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게다가 이 군사기밀을 담당하는 병부시랑병부시랑(현재 국방부 차관)까지 고구려에 투항까지 하면서 공성 무기까지 그대로 두고 다급하게 퇴각하게 된다. 614년 다시 고구려를 침공한 수양제에게 고구려 또한 전쟁의 피로감에 화의를 신청하며 수나라의 병부시랑을 송환하고 큰 전투 없이 전쟁이 마무리된다.  

 

 

 

618년 수 멸망

 

고구려와 수의 전쟁 후 고구려의 위상은 국제적으로 높아졌지만 전쟁이 고구려 땅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많은 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수 나라 는 3번이나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양제는 결국 618년에 양주에서 신하의 손에 사망하면서 왕조가 멸망하게 된다.  

 

이로써 동아시아가 새로운 격변의 시대로 다시 들어갔다. 수가 중국 혼란기를 거의 300년 만에 통합 (589 년) 한 왕조를 불과 20년 만에 멸명한 것은 고구려 원정이 가장 큰 이유였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수와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해졌고 신라가 급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수양제 무덤

중국 강소성 양주에 가면  수양제  무덤이 있는데 중국황제의 무덤치고는 규모가 작다. 2004년 7월 벼락을 맞은 흔적이 있지만 수리하지 않고 있다.
수양제의 비에는 업적과 과오를 적어놨는데   ‘요동 땅에서 일을 벌이다 천하를 잃었다’ 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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