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 정사 삼국지 차이점 (진수, 배송지, 나관중 삼국지 무엇이 다른가?)
삼국지 캐릭터 분석
유비, 관우, 장비
소설 속 유비, 관우, 장비 캐릭터는 처음에 별볼일 없는 출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삼국지>에는 관우는 하동군 해현, 장비는 탁군 출신지만 나와 있다.
유비
[삼국지연의]속 유비는 인.의 상징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자리를 엮어 생계를 꾸려 나갔을 만큼 가난했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삼국지>에는 유비가 가난하다는 말은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까지는 마을에서 나름 괜찮은 형편이었다. <정사 삼국지 촉서>에서는 책 읽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개(사냥개)와 말, 음악과 아름다운 옷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의]에서 유비를 흙수저로 묘사한 이유는 사람들이 흙수저가 성공한 사례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관우, 장비
장비는 자신은 술,돼지등을 판다고 말하는 직선적이고 우직한 성격, 관우는 책을 많이 읽고 의협십도 강한 성격, 관우의 얼굴을 붉은색으로 묘사한 것은 중국에서는 붉은색이 충의, 의리를 나타내는 상징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유비, 관우,장비가 도원결의를 하고 무기 만드는 장인에게 찾아갔다.
유비, 관우, 장비의 무기들
유비의 쌍고검
관우의 청룡언월도
우리 역사 속 사도세자도 삼국지에 빠져 관우의 청룡언월도로 무술시범을 보였다는 내용이 있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중 82근(약 52KG) 청룡언월도를 춤추듯 휘두르면서 … 라는 대목이 있는데 82근의 무게는 관우의 절대 무력을 표현해 관우를 신격화하기 위한 장치로 보임
장비의 장팔사모
실제 역사 속에서도 유비, 관우, 장비는 장수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가졌고 특히 관우는 천하의 조조를 떨게 했던 몇 안되는 무장 중의 무장이었다. [정사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는 "이리 새끼는 기룰 수 없습니다. 훗날 틀림없이 해를 끼칠 것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비 삼형제, 의형제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 당시 관념은 의리를 매개로 한 수평적 질서의 임협을 가진 이들이 무리를 지어 있다는 것은 별볼일 없는 오늘날의 건달같은 무리라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에는 세 사람을 군신 관계로 명확히 설명하면서도 정은 형제와 같았다고 묘사한다.
[정사 삼국지 촉서 관우전]
"유비는 잠잘 때도 두 사람과 함께했으며 정이 형제 같았다. "
관도대전 이후 상황
관도대전 이후 황하유역의 대부분의 지역을 조조가 차지하고 있던 상황, 강동의 손권, 익주의 유장이 차지하고 있었고 주요 지역은 이미 막강한 세력에 장악된 상태였다. 이때 유비는 신야(형주의 북쪽)에 은거하면서 틈을 엿보고 있었다.
제갈량(=제갈공명)
소설 삼국지연의 속 제갈량은 삼국지 최고의 지략가로 무결점의 완벽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깃털 부채를 들고 냉철함과 평정심을 유지하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이것은 소설 속 제갈량 모습이다. 역사 속 제갈량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제갈공명은 어떤 사람인가?
'와룡 봉추'
초야의 농사꾼으로 묻혀있던 제갈량이 나오게 된 계기는 유비에게 형주의 명사 서서가 와룡과 봉추 두사람 중 하나를 얻어도 천하를 편한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와룡의 뜻은 업드릴 와, 용 룡, 누워있는 듯 움크리고 있는 용으로 곧 승천을 할 잠재력을 가진 용이라는 뜻,
*봉추의 뜻은 봉황새 봉, 병라이 추로 아직 봉황을 의미로 책사 '방통'이 있다.
유비는 와룡에 비유되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제갈량을 찾아가게 된다. (벌거벗은 세계사 28회)
삼고초려 이야기
유비의 삼고초려 의미
유비,관우, 장비의 성격과 배경이 전장에서는 맨 앞쪽에 서있기 좋은 용병 캐릭터(총알받이)인 것이다. 삼국지에서 대표적인 하수인 여포와 유비이다. 유비에게는 브레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비는 지략가를 얻기 위해 사마휘를 찾아가고 사마휘가 추천한 인물이 제갈공명이다.
유비는 세번이나 찾아가 제갈공명을 얻었다. ** 삼고초려 뜻(三顧草廬) : (초가집을 3번 방문하다)유비가 은거하던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데서 유래한 말로 인재를 얻기 위해 참을성 있게 노력함을 뜻한다. (당시 제갈량의 나이 26세, 유비의 나이 46세)
첫번째 방문: 제갈량의 부재
두번째 방문 :12월에 추위와 눈길을 뚫고 방문 역시 부재
세번째 방문: 낮잠자는 제갈량 2시간 기다려 만남 후 눈물로 호소 제갈량을 책사로 얻게 된다.
유비는 삼고초려로 자신이 단순한 임협 집단의 수장이 아님을 제갈량에게 보인다. 자신을 낮추고 인재를 발탁할 수 있는 리더로서의 덕모를 보여준 것이다. 유비에게 그날을 꼽는다면 삼고초려 끝에 제갈공명을 얻는 날일 것이다.
제갈량에게 삼고초려 의미
유비를 삼고초려 시킨 제갈공명은 이를 통해 자신의 자질이 있음을 보여주어 명성을 얻고 유비와의 관계에서 전권 행사의 우위를 점하면서 한 황실 부흥을 꽤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만약 조조가 제갈량을 먼저 찾아갔다면 제갈량을 얻을 수 있었을까?
추측해 볼때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갈량은 현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야심가였다. 따라서 당시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던 시기의 제갈량은 서주 출신이었는데 그곳에서 조조군에 의해 서주 대학살이 일어났다.
서주 대학살(193~194)
서주 성주의 부하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빌미로 조조는 서주를 두 차례 공격, 민간인 대량 학살을 했다.
조조 군이 서주에서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을 제갈량 청소년기에 목격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제갈공명에게 반 조조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었고 제갈량은 한 황실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제갈량 앞에 한 황실의 후예 유비가 나타난 것이다.
적벽대전 이전 상황
박망파 전투
삼국지연의 속 제갈량을 얻고 처음으로 치룬 유비와 조조의 전투가 있다. 연의 속 박망파 전투는 제갈량의 지략으로 승리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역사 삼국지에는 유비의 지략으로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조의 형주 공격
208년 여름 화북을 평정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조조는 황제를 겁박해 남하를 결정한다. 조조의 첫번째 목표는 유비가 있던 형주였다. 제갈공명까지 얻은 유비는 형주에서 세력을 키우려던 찰나에 갑작스러운 형주 자사 유표의 사망과 중원을 제패한 조조가 밀고 내려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조의 기병 5천여명이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는 하는 그때 유비는 짐을 싸서 도망을 가는데 형주 백성 10만이 유비를 따르겠다고 하니 이에 백성들의 안위보다 빠른 후퇴의 중요성을 주장한 신하들에게 유비는 백성들과 함께 피난길을 가겠다고 결정한다. 이에 유비는 백성들을 택한 결과 조조에게 따라 잡힌다.
그로 인해 조자룡과 장비가 활약한 장판전투가 시작된다.
영화 적벽대전에서는 조자룡이 홀로 수많은 조조군을 상대로 유비의 아들을 구해오는 조자룡이 있는데 영화 속 조자룡은 허무맹랑하게 그러진것 같지만 정사 삼국지에 보면 조운(조자룡)이 직접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감부인을 보호하여 모두 난을 모면하게 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유비는 장비와 조자룡 덕분에 몸을 피하게 되고 조조군의 추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손권과의 동맹
절체절명의 순간 유비를 위해 나선 제갈량은 형주 땅을 차지한 조조의 소식에 강동의 손권을 찾아가 동맹을 제안하지만 신하들의 거센 반발로 망설이는 손권이었다. 이때 제갈량의 손권의 자존심으로 거드리는 지략으로 고심 끝에 손권은 조조와의 전쟁을 결심한다. 이렇게 조조에 맞선 손권과 유비의 동맹으로 세 영웅의 한판 대결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소설에는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한것 처럼 나오지만 정사 <삼국지> 내용은 적벽 전쟁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유표의 죽음, 형주를 무혈입성한 조조는 손권에게 편지를 보냈다.
노숙의 '천하삼분지계'
오 안에서 항복과 전쟁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대부분의 손권 대신들은 항복을 주장했다. 항복해도 형주 신하들처럼 다시 출세할 수 있었던 손권의 대신들이었다. 이때 항복을 반대한 이가 바로 노숙이다.
[정사 삼국지 오서 노숙전] 노숙 왈
" 장군께서 조조를 맞이한다면 어찌 돌아갈 곳이 있겠습니까? "
이 말은 우리는 살 수 있지만 너는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한것이다. 노숙과 제갈공명이 만나고 제갈공명을 통해 손권의 전쟁 결정에 힘을 실어준 노숙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노숙의 인지도가 약하지만 삼국지를 삼국지라 부를 수 있게 한 인물이 바로 노숙이다.
노숙은 선진성, 이단성을 동시에 가진 인물로 당시 명사들의 태도는 한 황실의 부흥을 주장하거나 한 황실의 부흥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만 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때 노숙은 한 황실은 끝났다고 말을 한다. 지금 오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제 3의 세력을 키워서 천하를 삼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인물이 노숙이다. 이 천하삼분지계는 소설에서 제갈공명이 주장한 것으로 나온다.
주유의 적벽대전
적벽대전은 사실 주유의 전쟁이었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의 주인공을 주유로 보고 있다. 주유는 명문가 출신의 손권의 정치적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강동의 영웅이자 군의 수장인 도독으로 주유가 있다.
항복을 반대하고 노숙에게 힘을 더해준 인물이 주유였다. 자신이 군사 3만을 몰고 나가 조조를 막아내겠다고 한다. 주유는 손권을 중심으로 한 황실의 부흥, 천하통일에 대해 생각한다. 주유는 조조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주유가 승리를 주장한 이유가 있었다.
조조가 무리하게 전쟁을 강행한 이유는?
조조는 형주 남하 전 연못까지 파서 수군을 훈련시킨다. 그렇게 야심차게 내려왔던 형주였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무혈입성하게 된 형주였다. 그래서 내친 김에 손권을 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권을 토벌한다면 후환을 없애는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조군이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문제가 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의 피로는 누적되어 있었고 편입된 형주군과의 결속력도 좋지 않았다. 계획되지 않은 전쟁에 조조의 참모들은 반대를 하지만 결국은 전쟁을 하게 된다. 그 당시 편지 속의 조조는 천하를 순행하는 황제처럼 자신의 전쟁 결심을 밀어 붙인 조조였다.
적벽대전
나관중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총 120회 분량 중 8회에 걸쳐 적벽대전를 묘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판소리 적벽가(중국의 삼국지연의 중 적벽대전을 소재로 만든 조선 시대의 판소리) 가 있을 만큼 소설 속 적벽대전은 삼국지의 하일라이트 부분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적벽 대전을 다루는 부분이 8 군데 정도 나온다. <삼국지 위서-무제기><삼국지 오서-주유전,오주전><삼국지 촉서-선주전, 제갈량전> 등 그러나 삼국지 중 유일하게 적벽대전의 전후를 다룬 것은 오직 하나 주유전에만 나온다. 주유전의 적벽대전 전체 분량 280글 자이다.
조조와 유비+손권이 적벽에의 전쟁이 시작된다. 608년 겨울 적벽을 바람은 심상치 않았다. 기름을 부은 풀을 실은 오나라 배들이 앞뒤로 이어져 있는 조조 군의 배에 돌진한다. 조조의 천하통일의 꿈이 잿더미처럼 사그라지는 순간이었다.
적벽대전 속 군사력
당시 적벽대전에서 군사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소설 속에는 조조의 군대는 80만이였지만 형주군을 합쳐 20만 정도로 추정하고 손권+유비 연합군=주유 3만+유비 2만=5만 정도로 20만 vs 5만추정이 있고 주유 3만+ [배송지 인용한 강표전] 유비 병력 2천 정도로 20만 vs 3만2천 정도 추측이 있다.
영화 속 적벽대전 진실? 거짓?
♧허수아비 화살 10만개 가져오는 장면
유비와 제갈량이 허수아비를 이용해 화살 10만개를 가져오는 장면은 거짓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사실 적벽대전 속 유비와 제갈량의 활약은 거의 찾아볼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방관한 것에 가깝다.
♧ (방통의 연환계) 조조의 배는 묶여 있지 않았나?
수전에 익숙하지 않아 조조군이 배를 묶은 것으로 추정 가능하지만 소설 속 조조가 방통을 보내 고의로 배를 연결했다는연환계는 사실이 아니다. 또한 적벽대전 속 화공작적을 제안한 사람은 제갈량이 아닌 황개로 정사 삼국지에는 기록되어 있다.
♧ 적벽대전 속 재갈량 남동풍
적벽대전 속 남동풍이 갑자기 불어 승패를 가르는 남동풍은 진실이다.
배송지가 주석을 단 <강표전에 >기록이 있다. 일부 역사가들도 남동풍의 중요성을 인정해 남동풍이 불지 않았다면 화공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 전염병이 돌았다
승리의 또 다른 원인 중 하나는 전염병이 있다. 해전할 때 전염병이 돌았던 것으로 봐서 물과 관련된 전염병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조의 대패 원인
→전염병,날씨,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 주유 군이 전장의 형세를 훤히 알고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형주에서 조조는 정말 이상했다. 정상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평상시에 참모들의 이야기를 잘 듣던 조조가 이때는 전혀 듣지 않았고 오나라 장군의 거짓 투항도 맹신했던 이해 할 수 없는 조조의 선택과 행동이었다.
적벽대전 후 손권과 유비는?
적벽대전 이후 최대의 수혜자는 유비였다. 적벽대전에서 승리 후 손권은 형주를 유비에게 대여를 한다. 지리적 요충지 형주를 유비에게 준 이유는 천하삼분지계는 조조와 손권이 아닌 제3의 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제3의 세력이 바로 유비였고 유비가 세력을 키울 수 있도록 형주라는 근거지를 빌려준 손권이었다. 손권은 형주보다 더 큰 미래를 보고자 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상상할수 없었던 충격적인 손권의 결정이었다.
조조에게 적벽대전이란?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지만 적벽대전이 조조에게 치명적인 패배는 아니었다. 처음 조조의 첫 목표는 형주 북부(유표)였다. 적벽대전은 조조가 치밀한 계산으로 치른 전쟁도 아니였고 전쟁 후 손권. 유비가 차지한 형주 지역은 당시 전통적인 중국에 포함되지는 않았던 곳이다. 따라서 이 전쟁을 계속 할 필요가 없었던 조조였다. 이때 조조의 최대 관심사는 왕 등극, 왕조 창건하는 것이 급했다. 그래서 조조서는 적벽대전 후 왕조 창건의 여정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적벽대전이 자체만으로 중요한 전쟁이었지만 더 중요한것은 천하삼분지계가 실현됐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손권은 유비가 있어야 조조와 대결이 가능하고 유비 또한 손권이 있어야 자립이 가능한 상태이다.
삼국지가 삼국지인 이유는 바로 천하삼분지계 때문이고 천하삼분지계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현재의 국제정세와도 닮아있다. 적벽대전을 통해 유비는 형주를 확보하게 되고 그 옆에 있는 익주가 목표가 되었고 손권은 강력한 대군 조조와 싸워서 승리 후 자신감을 얻으며 위.촉.오 삼국 정립의 서막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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