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관도대전 속 조조 /동탁의 최후 (삼국지 이야기 1)

by 365 ^^ 2021. 7. 9.
반응형

중국은 진, 한 제국 (BC206~AD220) 약 400년간 고대 제국을 완성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가 죽고 난 후 다시금 혼란이 시작되었고 이를 한나라의 유방이 재통일을 하며 약 400년 역사의 한나라 왕조가 만들어진다.  후한 시대 말기는 중국이 공간적으로 확장되고 다민족, 다문화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던 시기로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주는 것이 삼국지이다.   

 

 

십상시의 국정농단

영원한 제국은 없는 법 후한 말 한나라는 혼돈 그 자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라를 망하게 한 10명의 환관들이 있었다. 십상시는 현재까지도 국정농단의 대명사로 사용될 만큼 10명의 환관들이 후한말 중앙정치를 좌지우지했고 환관들의 만행에 백성들의 삶은 점차 피폐해져 가고 자연재해까지 더해져 굶어죽는 사람들이 넘쳐나게 되니 결국 백성들은 반란 집단이 되었다. 그때 농민의 반란인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난세의 혼란한 상황에서 천하의 영웅들이 등장하게 된다. 

 

 

 

 

 

 

 

 

 

십상시의 퇴장

당시 한나라 조정에서 황제가 자랄 때까지 국정을 대리 운영하던 보정대신 '하진'이 있었다. 환관들을 제거할 것을 결심하고 원소와 동탁을 부르지만 환관들이 눈치채고 '하진'을 죽여버린다. 이에 분노한 원소는 환관 2000여명을 죽인다.  이때 목숨을 건진 환관들이 어린 황제와 동생을 데리고 도망을 갔는데 궁지에 몰린 환관들이 자살을 하게 된다. 

 

오늘날 국정농당의 대명사로 쓰이는 '십상시' 는 중국 후한 말 영제 때 권력을 잡고 조정을 휘두른 10여명의 환관들을 일컫는 말

 

동탁의 등장

남겨진 황제와 동생은 낙양으로 향하던 도중 동탁을 북망산(당시 무덤이 많았던 북망산)에 만나게 된다. 황제를 데리고 온 동탁은 현재 황제를 폐위시키고 그 동생을 새 황제로 옹립한 후 스스로 보정대신(어린 황제를 대신해서 국정을 운영하는 최고관직)의 자리에 오른다. 변방에서 중앙 진출의 기회를 노렸던 동탁이 황제를 데리고 오면서 동탁은 어린 황제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권력을 잡게 되고 폭정을 일삼으며 조정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한다. 이에 각지 영웅호걸들이 동탁에 맞서 일어난다.   

 

악마의 심장을 가진 동탁

환건적의 난 이후 후한말 정치를 장악하는 인물이 바로 삼국지 최악의 폭군 동탁이다. 동탁과 관련된 악행은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연회장에서 전쟁포로의 혀를 뽑아 자르고 그들의 눈을 뽑아 삶았다. 동탁의 만행 앞에 문무백관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후한 말 동탁이 어린 황제를 손에 쥐고 정권을 장악하자 각 지방에서 잇따른 봉기가 일어나고 무정부상태에서 위.촉.오 삼국시대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 동탁이다. 동탁의 잔인함은 정사 삼국지에도 묘사되어 있을 만큼 악명이 높았다. 잔치를 벌이며 다른 관리들 앞에서 무자비하게 살해하며 그 잔인함에 밥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공포정치를 했다. 

 

 

 

 

 

조조의 등장

반 동탁 연합으로 대단한 인물들이 많이 나타났던 시기이다. 반 동탁 연합은 맹주 원소(당시 후한의 명망가) 중심으로 모인다. 그러나 연합군은 행동은 하지 않고 구호만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반 동탁 연합의 명성획득으로 만족만 하고 행동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때 동탁 토벌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 바로 조조이다. 처음에 조조는 천하의 역적 동탁 밑에서 본심을 숨기고 충성을 하고 있었다.

 

 

여백사 살인사건

당시 사도직에 있던 왕윤과 동탁 암살을 모의하지만 동탁 암살에 실패(소설 내용) 동탁을 배신 도주하게 된 조조는 아버지의 의형제 여백사의 집에 도착한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여백사였다. 그런데 쉬는 도중 밖에서 칼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백사 일행이 자신을 공격하려고 칼을 가는것이라 생각해 그 집안의 모든 사람을 몰살시킨다. 그러나 알고봤더니 돼지를 잡으려고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사람을 모두 죽인 후였기 때문에 때마침 함께 마실 술을 사 오던 여백사마저 살해해 버린 사건이다. 이에 같이 갔던 의조카가 이것은 심한것 아니냐고 했더니 조조는 이렇게 말한다.

 

조조에 관한 유명한 일화인 여백사 살인 사건은 정사 삼국지에는 없는 허구이다. 위나라의 정치가 왕침 <위서> 에서는 여백사 이야기가 여백사는 마침 집에 없었고 여백사의 아들과 손님들이 함께 조조를 겁박해 말과 재물을 빼앗으려 하자 조조는 직접 칼을 빼서 그들을 찔러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방면으로 제주가 많았던 조조지만 그에게는 큰 약점이 하나 있었다. 조조는 당시 환관 '조등'에게서 태어났다. 환관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174년 낙양 북부위에 임명된다. 그 당시 낙양은 치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조는 치안을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펼치던 중 당시 최고 실세 환관 건석의 숙부가 야간 통행금지를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환관의 자식이었음에도) 자신이 경고했던 대로 그를 몽둥이로 때려 죽인다. 이런 일화들이 퍼지면서 조조의 원칙주의적인 면모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관우의 등장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수도 낙양으로 진격한 연합군은 가는 길에 동탁군의 맹장 '화웅'을 만난다. 화웅은 연합군의 장수들을 무참히 베어버리며 연합군을 공포에 빠뜨린다. 화웅의 위세에 연합군의 장수들은 나서길 주저하는 그때 관우가 화웅을 처단하고 오겠다고 말한다. 이에 조조는 관우에게 술을 권했지만 관우는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키고 연합군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이 유명한 일화(관우가 환웅을 벤 장면)는 실제로는 역사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화웅을 죽인 인물은 손견(훗날 오나라를 세운 손권의 아버지) 이었다.  

 

▼관우가 마셨던 술 (소흥주) 

 

 

쏸라펀, 피단두부, 소흥주 (삼국지에 나오는 음식들 )

피단두부 더운 여름 훈련으로 지친 병사들을 본 관우가 두부가 해열에 효과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삭힌 오리알(피단)을 올린 두부요리를 만들어서 병사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쏸라펀 유비, 관우,

jangane.tistory.com

 

여포의 배반과 동탁의 죽음

화웅은 죽었지만 동탁에게는 삼국지 최고 무력, 전투력 1등의 여포가 있었다. 적토마를 타고 동탁을 지키고 있었던 양아들 여포가 있어서 동탁은 든든했다. 그래서 반 동탁 진영에서 택한 것은 미인계였다.  

 

중국 4대 미녀 초선

왕윤의 집을 수색하던 중 초선과 마주친 여포는 초선에게 마음을 빼았겨 아내로 맞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여포의 양아버지 동탁 역시 초선에게 반해 초선을 먼저 첩으로 취한다. 동탁에게 초선을 빼앗긴 여포는 분노하게 된다. 연합군의 계획대로 여포와 동탁의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여포는 동탁을 살해한다. 동탁이 죽자 반 동탁 연합군은 분열되면서 본격적인 핏빗 공방전이 시작된다. 동탁이 죽은 시점이 본격적인 삼국지의 시작이다 

 

 <삼국지>에서 가장 대중적인 ‘초선’ 이야기는 정사 삼국지에는 2줄만 있다.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했다라고 만있고 초선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 왕윤이 여포와 공모하여 동탁을 살해하는 장면은 남아있다.  

 

중국 4대 미녀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가 있는데 3사람은 모두 실존 인물이나 초선만 유일하게 허구이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제일 유명하다. 이것만 봐도 삼국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수 있다.

 

 

 

 

 

 

황제 헌제는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이에 조조는 황제를 보호하며 권력은 조조에게로 이동하게 된다.  조조는 둔전제를 실시 군인들에게 토지를 제공함으로써 식량생산 증가와 국가 이윤 창출 및 전쟁 시 군량미 확보에 용이하게 했으며 구현령이라는 인재 중용정책을 반포하여 천하의 인재를 능력만 있으면 등용하겠다는 정책이었다.  

 

 

군웅들의 세력 기반 

 

중국은 두강을 중심으로 역사가 만들어진다. 황하, 양쯔강(장강) 인데 장강 이남 양주 손견, 손권 손씨 집안이 확보한 지역이었고 당시 중국은 황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당시 중국은 황색지역을 중심으로 움직였음: 중국의 배꼽이라 불리는 중원(전통적으로 황하 중하류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현재 허난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지역

 

 조조의 기반은 연주였는데 그 옆 지역(청주)에 황건적의 잔당들이 있었고 그들을 확보하면서 조조의 군사력은 막강해진다.  

여포의 근거지 서주 

적벽대전 후 유비의 근거지 형주

원소의 근거지 기주, 병주,청주, 서주 

 

 

 

관도대전 속 조조의 재발견

 

원소 VS 조조

삼국지 3대 전쟁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 있다. 이 중에 관도대전은 삼국지 3대 대전 중 분량이 가장 많고 중요한 전쟁이다. 황하 북쪽 원소 vs 황하 남쪽 조조의 1차전이 시작된 관도대전의 승리자가 북중국 후한 적통 계승자가 되는 것이다.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로 관도를 둘러싸고 8개월간 전투가 이어진 것이 바로 관도대전이다. 

 

조조를 토벌하기 위해 원소는 대군을 이끌고 선제 공격을 감행한다. 조조의 병력은 적었지만 관도 대전은 치열한 공방전으로 흘러갔다. 원소는 압도적인 병력에도 조조의 기습 공격에 밀려 많은 병력을 잃었다. 여기에는 조조의 편에서서 출정한 관우의 활약이 있었다.

 

관우는 왜 조조에게 있었을까?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대패를 하게 된다. 이때 유비는 원소에게 도망쳤고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조가 다시 진군하여 공격하니 관우는 투항했다. (조조가 유비의 부인들을 포로로 잡아 관우가 보호하려 조조에게 투항했을 뿐)  -> (삼국지 위서 무제기)

 

▼관우신앙에 대해 알아보기

 

동묘 속 관우신앙(관왕묘) 어떻게 조선에 들어왔을까?

중국에서 회사, 집, 음식점 등에 관우 그림, 관우상 그린 그림을 많이 볼수 있다. 중국 민간 신앙에서는 관우를 전쟁의 신, 복덕, 재물의 신으로 모시고 있다. 중국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도

jangane.tistory.com

 

수적으로 열세했던 조조군 

중국의 속담에 ‘조조 얘기만 하면 조조가 도달한다. ‘는 말도 있을 만큼 전쟁 초반 뛰어난 기동력을 보인 조조군이었다.그러나 객관적으로는 조조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원소 11만 대군 vs 조조 1만 정확한 군사 병력수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관도대전 이후 원소군과 내통한 조조군의 편지들이 다수 발견되었다.(전쟁 후 자신의 목숨에 대한 선처를 부탁한 편지들) 이에 조조의 반응은 " 원소가 막강했을 때 나도 나 자신을 지킬 수 없었는데 일반 백성이야 더 말할 게있겠는가! 말하며 편지를 불태웠다(위씨춘추 기록) 고 한다. -> 조조의 덕장의 면모를 볼수 있는 장면

 

또한 (삼국지 위서 무제기순유가 조조에게 진언하길 "우리 병사수가 적어 원소를 대적할 수 없지만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면 승산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것을 보면 확실한 것은 조조군의 병력이 상당히 적은 것은 분명했다.  

 

 

오관참육장(관우의 도주)

관우는 관도전쟁 중 혼란을 틈타  유비에게 도망쳤다.  관우는 유비의 두 부인들을 데리고 유비를 찾아가기 위해 먼길을 떠난다. 이때 조조의 장수들이 통행증을 요구하며 관우의 길을 막고 다섯 관문을 지나며 조조의 여섯 장수를 베어버린다(오관참육장). 이 장면도 역시 정사에는 없는 얘기이다.  

 

관우의 도주는 사실 조조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사실 조조는 관우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적도마를 주고, 초선을 줬다는 말도 있었다. 관도전쟁 중 혼란을 틈타 유비에게 도망가는 관우를 쫓아가자고 조조의 부하들 말한다. 이에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쫓지 말라” (삼국지 촉서 관우전) 고 말한다.  

   

 

 

 

 

 

 

 

 

조조의 승리

관도대전이 장기전으로 흐르자 조조는 성안으로 들어가버린다. 관도대전은 다른 대전들과 달리 장기전으로 10개월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장기전으로 조조 군대의 군량이 떨어질 무렵 원소의 핵심 참모 허유가 투항해온다. 허유는 '원소'군 군량기지 오소 공격을 제안하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인다. 결국 전쟁은 조조의 승리로 끝이 나고 그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은 원소였다. 조조는 이 전쟁의 승리로 후한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게 된다.

 

 

허유가 투항한 이유 

허도를 치자고 제안한 자신의 계책을 무시당했고 가족들들 비리가 탄로나 체포되어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것을 두려워했고 허유 자신의 욕심도 있었다. 원소 밑에는 지식인들이 많이 있었고(당시 유비도 원소 밑에 있었다) 서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정세 분석을 이용해 원소에게 간언했고 원소는 누구 말을 들어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고 이로인해 우유부단 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조조는 허유를 왜 믿었나?  

삼국지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와 그의 신하들은 모두 허유의 말을 의심했지만 순유와 가유만은 조조에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조조는 그들의 말을 믿고 결단을 내린 것으로 조조의 결단력이 빛났던 순간이다. 이 시대는 누구 누구를 어떻게 만나서 그 사람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그 시기의 모든 상황을 좌우하던 때였다.  

 

 

관도대전의 승리의 의의 

 

  • 후한의 중심 북중국을 차지 
  • 새로운 왕조창건을 위한 인재 획득(기주 지역을 획득) 
  • 지인선용- 인재를 잘 알아보고 잘 활용해야 한다 것이 성공한 리더의 필수 항목이었다.  

 

조조는 문학적인 재능도 뛰어나서 중국 문학사에서 굵직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조조의 23편의 시들이 있다.  그 중에서 조조의 통찰력과 개혁가, 혁명가로써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 하나가 있다. 

 

술을 마주하고 노래하나니 인생살이 그 얼마던가
아침이슬 같은 인생이여 지나간 세월 너무도 많구나
격정의 노래를 불러보지만 근심을 떨치기 어렵구나 
무엇으로 근심을 해소할까 오직 술밖에 없구나
산이 어찌 높아지는 것을 싫어하랴  바다가 어찌 깊어지는 것을 싫어하랴
(뜻 -나는 왕이 될 것이니 인재들이여 나에게 모여라)  
주공께서 먹던 음식 뱉어내 인재를 맞이하자, 천하가 마음을 돌려주었다네

 

이 시는 중국 황제가 있는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 시대의 가치를 담은 조조의 시로 조조는 후한 말의 혼란이 유학이 가지고 있는 느슨한 정치(관정)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했고 유학은 더이상 사람도 세상도 구할 수 없다고 말하며 새로운 시대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오직 재능만을 (기준으로 삼아) 천거하라고 말했다.  

 

조조는 원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세력으로 출발해 삼국지 첫 장을 연 주인공이자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대변자이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엄격하면서도 공정하게 법을 집행했고 한편으로는 개인의 개성을 노래할 줄 알았고 리더로서의 결단력을 갖추고 있었고 조조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 (환관의 아들)에서 한계를 딛고 일어선 사람으로 '변화는 변방에서 시작된다. ' 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

 

[역사저널/ 벌거벗은 세계사 27회]

 

 

(삼국지 이야기 2.) 적벽대전 속 삼국지 캐릭터 분석/ 삼고초려 의미/ 천하삼분지계 

 

적벽대전 속 삼국지 캐릭터 분석/ 삼고초려 의미/ 천하삼분지계 (삼국지 이야기 2.)

***진나라 때 학자 진수의 역사서 [삼국지] 를 바탕으로 쓴 삼국지연의는 명나라 때 나관중이 쓴 장편 소설 삼국지를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고 열광하는 삼국지 내용은 대부분 나관중의 소설에

jangane.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