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동남아시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가난, 개발도상국, 피부색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이렇게 된 것에는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서구중심의 교육이 문제였다. 우리나라 초, 중 교과서에서 다루는 동남아시아의 비중은 2007년 이후 단 1%였다. 그 와중에도 틀린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동남아시아를 배웠고 이런 시각이 60~70년 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성장 중인 동남아의 힘을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시아의 힘은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자.
동남아는 다채로운 문화 ,천연자연의 보고,해양 무역의 중심지, 동서양을 잇는 세계 1위의 물류 루트에 위치해 있고 무엇보다 중위 연령 (총인구를 연령순으로 나열할 때 정중앙의 연령)이 한국은 44.3세인데 동남아는 2019년 기준 29세이다.
상당히 젊은 나라이다. 무엇보다 동남아는 우리나라에서 미국보다 더 중요한 2위의 무역 상대국이다.
아세안 국가 (10개국)
동남아는 크게 대륙부 동남아와 도서부 동남아로 나뉜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는 대륙부 동남아 5개국으로 총 길이 4,800KM 메콩강(매의 뜻: 어머니의 강이라는 뜻)을 끼고 있어 상당히 비옥한 대륙부이다. 벼농사 발달, 풍요로운 농경문화로 인도와 중국의 영향으로 불교 문화가 강한 대륙부 동남 아시아이다.
도서부 동남아시아에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 싱가포르, 떠오르는 커넥토그래피 강국 말레이시아, 세계 4위 인국 대국, 다양성의 나라 인도네시아, 아시아 대표 산유국 브루나이, 세계적 관광지와 항구 도시 필리핀은 바다와 접해 있어 예로부터 뱃길따라 상업이 발달했고 아랍 상인들과의 교역으로 이슬람이 자리잡은 도서부 동남아시아이다.
대륙부 5개국과 도서부 5개국 총 10개의 나라가 모인 것이 아세안에 속해있다. 아세안 총 인구는 6억 6천 만여명으로 유럽보다 크고 정치, 경제, 안보, 사회등으로 협력하여 힘을 키우는 아세안이다.
7세기 무역의 중심지 동남아시아
15세기 대항해 시대 유럽이 동남아를 발견한 이후부터 동남아가 세계사에 비중있게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7세기부터 동남아시아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15세기 유럽의 탐사가 국제무역에 문을 열었다는 것은 거짓으로 유럽보다 앞선 7세기부터 동남아시아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선박의 주인들은 이슬람 아랍 상인들로 그 당시 배는 동력원이 무역 등에 의존해서 항해를 했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기도 하고 물품을 교역하고 선박을 수리하기도 하던 중간 기착지가 동남아시아였다.
향신료 무역 루트 찾기
당시 음식 부패 방지, 만병 통치약으로 인식되던 향신료는 유럽에서 품귀현상을 일으키고 동남아시아산 핫 아이템이자 고가의 음식으로 파티 후 커피처럼 즐긴 고가의 디저트이자 신부들의 결혼 지참금이기도 했다. 귀족들은 이것을 쌓아놓고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동남아 산지에서 아랍 상인들이 가져와 베네치아의 중간상인들을 거쳐서 유럽 구매자에게 전달이 되었으나 유럽은 이런 값 비싼 향신료를 얻기 위한 향신료 루트를 찾아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다. 스페인과 포루투갈이 15세기 향신료 무역 루트 발견 경쟁을 시작하면서 1498년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발견한 마스코 다가마가 동남아 항로 개척의 길을 열었다. 그후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는 지도학을 발달시켜 신항로 개척의 기반을 쌓았다.
말라카 해협의 중요성
유럽에서 향신료의 찾아 동남아로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이는 약 800KM의 말라카 해협이 있었다.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의 해협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지름길로 4세기경 아랍 상인들이 개발한 항로이다. 말라카 해협은 세계 물동량의 20%가 오가고 중국과 동아시아를 잇는 유일한 석유수송 통로였기 때문에 말라카 해협을 두고 유럽에서 각축전이 벌어졌다.
말레이시아 , 싱가포르의 말라카 왕조(=믈라카 왕조)
처음 '바람 아래의 땅' 말라카 왕국(1402~1511) 은 말라카 해협을 장악했던 왕국으로 지금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 일대를 일켰는다. 이곳에서 당시 사용되었던 언어만 70~80여개였고 온갖 민족이 모여 교역을 하던 곳인 기회의 땅이였다.
아랍과 더 활발한 교역을 위해 동아시아 최초로 이슬람 국가를 선포했으나 1511~1641년에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무력점령하면서 130년간 식민지배를 했다. 그 후에 유럽인들도 말라카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데 포르투갈, 그 다음 타자는 상인의 나라 네덜라드 그리고 영국이 말라카 해협을 두고 각축전을 벌였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마자파힛 왕조
네덜란드는 작지만 당시 해양 강국이었고 특히 지도 제작에 능했던 상인의 나라 네덜란드가 찾은 곳이 바로 인도네시아 (바타비아) 자바섬 자카르타였다.
네덜란드는 특히 자바섬에서 정향 (꽃봉오리를 말린 향신료)과 육두구를 탐을 내서 항신료 무역에 우월한 자바섬에 눈독을 들이던 네덜란드는 결국 1602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점령하고 350년간 식민지배한다.
글에서도 알수 있듯이 마자파힛 제국(자바섬:1293~1520) 이 말라카 왕국보다 더 일찍 번성했던 황금의 제국으로 자바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전통의상 (바틱)도 자바에서 기원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뿌리가 된 부유했던 마자파힛 왕국이었다.
마자파힛의 중심지 자바섬에서 대량으로 발굴된 돼지저금통은 13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업,무역, 금용이 발달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에게 돈이 있었다는 것) 9세기부터 화폐가 일상화되며 상업의 시대를 이뤘던 동남아의 해양 왕국들이다.
조선의 해금정책
우리나라로 오던 조와국=마자파힛(자바섬) 사신이 화계(칠면조),공작, 앵무새 등의 열대의 새를 갖지고 오던 중 왜국를 만나 교역에 실패했다. 이보다 먼저 섬라곡국(시암=타이 왕국의 옛 이름)으로 조선이 답례를 보냈는데 또 왜구가 약탈해 가면서 왜구에 시달리던 조선과 명나라는 14세기에 해금정책을 선포한다. 이에 점점 국운이 쇠퇴해갔던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의 지도 기술을 전수 받아 앞선 근대화에 성공한다.
↓식민 지배 속 유일한 독립왕조였던 태국 어떻게?
↓다양성의 문화 인도네시아 어떻게 통합했나?
동남아시아는 다양한 힘과 매력이 있는 곳이고 앞으로 참 잘 될 친구로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50년 전부터 동남아에 주목했고 전 세계가 동남아시아에 주목하고 있는 요즘이다.
동남아시아는 우리나라 문화에 드라마 , KPOP, 등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옛날에는 누구를 침략하고 땅을 차지하고 등의 제국주의적인 이념으로 세상이 돌아갔다면 현재는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친구가 경쟁력이다.
[차이나는 클라스 214회 지리학자 김이재 교수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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