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이전 이야기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의 충격적 진실!!! (배경 결과 정리)
경복궁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건청궁이 있다.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어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곳이다. 한국사의 가슴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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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이야기
당시 러시아를 우리말로 부르던 말 '아라사' 였고 아라사 공사관에 임금이 들어갔다는 의미가 =아관파천이다.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 9일간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고종 황제는 왜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숨겼을까?
A. 명성 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며느리를 죽였다고 위로하며 보호라는 미명 하에 고종의 감시를 시작했다. 아내를 죽인 살인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고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 계획을 세웠으나 미군, 러시아 군인들과 궁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일본에 발각되어 무력 충돌이 있었고 경복궁 탈출은 실패하게 되는데 이 사건은 경복궁 동쪽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서 춘생문 사건이다.
▷아관파천의 1등 공신 엄상궁
엄상궁은 이쁘지는 않았으나 권모와 지략이 뛰어났고 중국어에 능통했고 춤과 노래에도 능했다.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는 궁에서 쫓겨났는데 명성황후가 자리를 비웠던 시기 엄상궁이 어느날 아침 고종의 침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왔다. 왕의 승은을 입으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이에 명성황후는 화가나서 엄상궁을 궁에서 쫓아낸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극적인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고종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일 만에 엄상궁을 불러들인다. 중전이 살해된 상황이라 내전의 질서를 잡아줄 적임자가 필요했고 왕실의 혼란을 수습해야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반일 감정은 폭발 직전이었고 이와 더불어 개화 정책으로 친일 내각은 단발령을 선포한다. 그로 인해 의병이 일어나면서 경복궁을 지키던 친위대 병력이 파병이 되면서 이틈을 타서 을미사변 4개월 뒤 1896년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궁녀의 가마를 타고 아들과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에 성공한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숨겨진 조력자 엄상궁이 있었다. 외출 시 경비병의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수개월간의 뇌물 공세(엽전, 음식)로 경비병을 회유했고 2대의 가마로 탈출했는데 가마는 바로 통과를 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 놨었다. 엄상궁 덕분에 고종과 엄상궁을 태운 궁녀용 가마 1호와 그 뒤에 세자와 궁녀 박 씨를 태운 가마는 탈출에 성공했다.
그 뒤에 엄상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44세의 나이에 고종 임금의 아이를 임신하는데 그분이 바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이은(영친왕)이 되고 후에 엄상궁은 순헌황귀비 엄 씨가 된다. 또한 엄상궁은 1901년 10월 순비로 책봉 , 1903년 12월 황귀비로 책봉되서 순헌황귑비 엄씨로 불리게 된다.
엄귀비는 여성 인재 양성에 힘썼고 근대 교육의 선구자로 1906년 사재를 털어 숙명, 진명, 양정 여학교를 설립했다. 수시로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했다.
아관파천 이후 상황
아관파천 이후 열강들은 이권 침탈에 박차를 가했다.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을 했기에 러시아의 이권 침탈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광산, 산림 채벌권을 가져가고 미국은 전기, 전등 부설권, 일본은 철도 부설권을 가져갔다. 나라가 풍비박산 나던 시기다. 아관파천 3개월 때 고종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축하사절단을 보낸다.
러시아 축하사절단의 여정
인천-> 제물포항->중국 상해-> 일본 나가사키 ->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 미국 뉴욕-> 대서양을 건너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러시아 모스크바 총 10개 나라를 경유해서 왕복 204일의 대장정(약 7개월)이었다. 우리나라 사람 최초의 세계일주이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민영환은 일기 형식의 기행문 <해천추범>:(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 )을 출간한다. 해천추범의 기록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을 기록한 것으로 양력, 음력, 러시아력 날짜를 상세히 적어 기록했다. 러시아에서 백야현상을 경험한 내용, 민영환이 관료의 시선으로 다양한 신문물을 바라보는 인상 (밀가루 제조기, 기차를 탄 경험 등)이 적혀 있고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고종은 왜 러시아에 축하사절단을 보냈을까?
고종은 축하사절단을 통해 러시아 군데, 군사교관단 파견, 차관 제공, 조선-러시아 간 전신 가설 등의 요청사항을 전달하고 러시아와 비밀협약을 체결한다. 고종은 러시아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환궁을 하기 위해 민영환을 러시아로 파견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성과로 군사고문 푸차타 대령과 함께 군사교관단 13인을 지원받아 국왕 호위부대인 시위대를 창설하고 기본적 안전이 보장되자 경운궁으로 환궁을 준비한다.
고종이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을 한 이유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뒤에 환궁하는데 고종은 1894,95년 두 차례나 일본군에 의해 습격당하고 부인이 죽은 경복궁으로는 향하지 못하고 러시아 공사관과 가장 가깝고 위기상황 시 서양 각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외국 공사관이 많은 경운궁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된다.
광무개혁 (1897)
경운궁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가 월산대군의 사저를 임시거처로 사용하며 생긴 행궁이었는데 고종 환궁 당시 경운궁은 석어당과 즉조당만 존재했던 곳으로 고종 이후 작은 궁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관파천 1년 후 1897년 10월 12일 새벽 2시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통치권을 강화했다.
순종은 몸이 약해 왕위를 이을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순종은 즉위하면서 순원황귀비 아들 이은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그러나 1907년 이은은 11세의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게 된다. 엄귀비는 하나뿐인 아들을 평생 그리워하다가 58세의 나이로 덕수궁 즉조당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때가 1910년 조선이 국권을 빼긴 그 시기이다. 우리가 아는 마지막 황태자는 엄귀비의 아들 이은 (영친왕)이다. 순원황귀비 장례식에 아들 영친왕이 참석을 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한다. 1907년 일본으로 끌려가서 4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은 것이다. 그러나 엄씨가 전염병 장티푸스(typoid fever) 로 사망했기 때문에 고종과 영친왕은 상여가 나갈 때 곡을 했을 뿐 가까이 접근이 불가했다. 장례가 끝난 3일 후 영친왕은 급히 일본으로 돌아갔다.
1897년 고종은 영휘원 자리에 명성황후 무덤을 조성하고 홍릉으로 명명한다. 엄귀비도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는 홍릉 동편에 묻히게 된다. 황후와 같은 능역에 묻은 건 고종이 엄귀비를 아꼈다는 뜻이다.
홍릉 누구의 능일까? (황릉과 왕릉의 차이점)
역사저널 393 명성황후의 죽음은 우리나라 근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그 안에는 많은 정치적 이야기가 있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현재 남양주 금곡동 홍릉에 고종과 함께 모셔져있다.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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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선을 넘는 녀석들 1회 일부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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