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홍릉 누구의 능일까? (황릉과 왕릉의 차이점)

by 365 ^^ 2023. 1. 20.

역사저널 393 

명성황후의 죽음은 우리나라 근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그 안에는 많은 정치적 이야기가 있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현재 남양주 금곡동 홍릉에 고종과 함께 모셔져있다. 

 

 

남양주 금곡동 홍릉

 

 

청량리 홍릉 

1895년 동구릉(현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현종 무덤 숭릉(현종+명성왕후) 옆에 명성황후 무덤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나 고종은 몇달 후에 중단시키고 새 후보지를 탐색한다. 그리고 27 곳의 후보지 중 청량리 일대 지금의 홍릉 수목원 있는 곳을 선정한다. 

 

청량리 홍릉

 

그리고 1897년 2월 (현재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청량리에 홍릉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빈전위치(인산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도 경복궁에 있던 것을 경운궁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왕릉 조성 사업은 5번 이상 일정이 변경된다. 

 

금곡 홍릉

 

 

남양주 금곡으로 천장

1900년 고종은 다시한번 홍릉을 옮길 결심을 한다. 청량리의 홍릉을 남양주 금곡으로 옮기려고 시도를 한다. 겨울 공사로 인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청량리 홍릉의 석물때문이기도 했고 풍수적으로도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도 작용했다. 청량리 홍릉은 황제의 능은 아니었다. 고종은 자신이 묻힐 황릉을 조성하고자 했고 황제의 제도에 걸맞게 만들어야 했던 황릉이었다.  

 

남양주 금곡 천장



황릉과 왕릉의 차이 

남양주 금곡 홍릉은 왕릉에는 침전이 아닌 정자각이 존재한다. 일자 모양 침전이 위치해 있고 왕릉에는 T자 모양 정자각이 있다. 석물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당시엔 익숙지 않은 동물들이 있다. 코끼리, 중국 상상 속의 동물 사후세계의 수호자 기린도 있다. 이것은 명나라 황제릉의 제도를 참고한 것이다. 고종이 문신 박제순에게 밀명을 내려 중국의 명나라 황제 영락제의 장릉을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합장묘 홍릉 

고종은 황릉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승하한다. 1910년 강제 병합 직전 일본 측 요구는 대한제국에서 조선으로 국호 변경을 요청했고 황실의 지위를 신하의 지위로 격하시키자는 조건을 내건다. 그래서 왕실의 대우로 강제 병합 이후 황제가 아닌 이태왕으로 불리게 된 고종이었다. 그리고 1919년 1월 20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황릉과 왕릉 차이
석물

고종이 사망 후 중단되었던 금곡의 홍릉 공사가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 능을 청량리 홍릉, 금곡으로 천장 한다. 고종이 같은 자리에 들어가서 합장하면서 홍릉은 명성황후와 고종의 합장묘이다.

 

신로, 어로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고 3개월 장례를 치른 후 홍릉 근처에 있는 유릉을 조성에 묻히고 이를 홍유릉이라고 부른다. 유릉이 조성되면서 대한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황제릉, 유릉 조성

 

 

→고종 장례식

 

고종 장례식 (인산일) 모습, 의미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여 1919년 1월 20일 68세로 생을 마감한다. 고종황제의 장례는 패망 군주의 장례식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 귀족의 장례 절차에 준

myvoice.wissue.net

→명성황후 장례식 

 

명성황후 장례식 (유해 수습은 누가? 장례식에서 무슨일이? )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이전글]을미사변 명성황후 장례 전 명성황후 남은 유해는 어떻게 했을까? 당시 조선군 훈련대 참위였던 윤석우가 불

myvoice.wissue.ne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