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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효창공원 역사

by 365 ^^ 2023. 1. 24.

김구선생의 묘는 서울 용산구 효창원로 177-18 효창운동장 옆 효창공원에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는 서울 현충원에 있다. 효창공원은 현충원보다 먼저 국립묘지가 될뻔한 공원이다. 백범 김구의 묘보다 먼저 이곳에 안치된 여러 사람이 있다.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일본군 대장을 처단한 윤봉길, 항일 무장투쟁 단체 흑색공포단 백정기는 중국 주재 일본공사 암살시도하다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일본 감옥에서 옥고로 숨졌다. 일본에 묻혀있던 이 세명의 독립운동가를 박열에게 수습하도록했고 이봉창과 백정기의 유해는 찾았고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어렵게 찾아 삼의사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안치시켰다.  

 

삼의사 왼쪽부터 백정기 , 이봉창, 윤봉길
삼의사 왼쪽부터 백정기 , 이봉창, 윤봉길

▶한인 애국단 이봉창 의사 의거 이야기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의거

 

 

효창묘->효창원

백범 김구와 삼의사를 모신 효창공원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원래 효창공원은 효창묘였다가 고종때 효창원으로 바뀌게 된다. 원은 왕의 사친의 무덤으로 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세자의 왕세손의 무덤이 된다. 효창원은 정조와 의빈 성씨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묘가 있기 때문에 효창묘였다. <옷소매 붉은 끝동> 성덕임이 바로 의빈 성씨이다. 현재 1944년 문효세자의 묘는 서삼릉으로 천장했다.  

 

서삼릉 문효세자 묘
서삼릉 문효세자 묘

정조나이 31세에 낳은 늦둥이 문효세자가 1786년 5월 5살에 요절, 의빈 성씨도 만삭의 몸으로 9월에 사망하면서 당시 정조의 거처 창덕궁에서 가까운 곳에 문효세자의 묘를 조성했고 그곳이 지금의 효장공원에 효창묘를 만들었고 문효세자 묘 곁에 의빈 성씨의 묘를 조성했다.

 

 

 

효창의 뜻 

정조에게 의빈 성씨는 첫사랑이자 끝사랑이었다. 비록 왕비는 아니였으나 의빈 성씨의 묘가 있는 효창원도 왕비능이나 마찬가지였고 왕의 계승자로 장자이나 세자였던 문효세자에게 특별하게 묘이름을 효창이라고 지어주었고 사당이름 또한 문희묘라고 지었다. 또한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신도비(=죽은 이를 기리는 비석)의 글을 직접 지은 정조였다. 이전에 세자가 죽었을때는 묘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효창원은 가장 인간적이 정조의 모습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행차 때마다 효창원에 머물었던 정조였다. 

 

효창 효성스럽고 번성하라
효창 효성스럽고 번성하라

 

이후에 이곳에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 딸 영온 옹주 묘가 있었다. 당시 효창원의 규모는 효창동, 공덕동, 청파동 일대를 아우를 정도로 큰 규모였다. 

 

효창공원 이전 규모
효창공원 이전 규모

 

조선 최고의 정치 군주로 알려진 정조는 특히 왕릉을 정치에 활용했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수원으로 천장 후 '현륭원'을 만들었는데 표면적으로 효심으로 정조의 잦은 현륭원 행차와 참배가 있었지만 목적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그런 정조가 유일하게 군주가 아닌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만든 것이 효창원이다.  

 

헌륭원 사도세자 묘
헌륭원 사도세자 묘
정조어제효창묘신도비명 해
정조어제효창묘신도비명 해

 

 

효창원->효창공원으로 

이 효창원이 효창공원으로 바뀐 것은 1924년 일제 강점기때이다. 1894년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군 주둔지로 활용을 했고 그린벨트처럼 보호받는 왕실 묘 일대였기에 우거진 숲+ 적당한 언덕의 지형적 특성으로 군 주둔지로 적합했고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숙영지+병참기지로 활용되었다.  

 

청일 전쟁 승리후 일본 승리의 성지가 된 효창원이었다. 러일 전쟁 이후에는 효창원 인근에 유곽(=성매매 영업을 하는 업소나 집결지)도 조성이 되었다. 또한 효창원 배후지역에는 일본인 밀집 거주지역을 조성하면서 일본인의 휴양지가 되었던 효창원 일대였다.  

 

용산 간략 역사

옛 말에 용산을 지배하면 한반도를 지배할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고려때 몽골군이 주둔한 지역이 용산이었고 임진왜란때도 북상하던 왜군이 주둔했던 지역이며, 청일 전쟁때는 일본군이 주둔했었다. 러일 전쟁때는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곳이고 이후에 주한미군기지가 들어서게 된 곳이 용산이다. 

 

용산 역사
용산 역사

 

효창원이 있는 용산의 지리적인 이점은?  

한강이남에서 강을 건너 남대문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에 유일한 평지가 용산이다. 1883년 3월 7일 서울 답사 중인 일본군 장교의 눈에 띈 용산이었다. 대규모 부대가 주둔하기에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용산의 지리적 이점
용산의 지리적 이점
용산의 지리적 이

 

효창원에 최초의 골프장

현재 우리나라는 골프 강국이지만 우리나라 골프의 시작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이 있던 곳이 효창원이기 때문이다.   

 

낙원 파라다이스 코스 노란색 구간은 의빈 성씨 묘로 추정
낙원 파라다이스 코스 노란색 구간은 의빈 성씨 묘로 추정

 

사진 속 코스의 이름은 낙원 파라다이스였다. 자꾸만 날아오는 골프공에 항의한 주민들에게 자신의 놀이터에서 방해를 하냐는 식이었다. 이곳에 골프장을 지은 이유는 당시 조선 철도국에서오 운영하던 철도 호텔에 사람을 머물게 하기 위해 철도 호텔의 손님 유치를 위해 인근 효창원에 골프장을 설립했던 것이다. 철도 호텔이 만들어진 자리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제단 환구단이었다. 환구단을 철거하고 세운 호텔이 철도 호텔이었다. 

 

철도 호텔
철도 호텔

 

최초의 라운딩 인물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에서 처음으로 라운딩을 한 사람은 친일파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였다. 당시 이항구는 어보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보가 도난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이항구는 골프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항구 모습
이항구 모습
당시 이항구의 실제 인터뷰 내용
당시 이항구의 실제 인터뷰 내용
당시 이항구의 실제 인터뷰 내용

당시 도난 당한 어보는 성종의 아버지(추존왕) 덕종과 성종의 어보였다. 결국 찾지 못해 어보를 새로 제작했는데 이것이 또다시 한국전쟁 당시 미국으로 반출되고 2015년 미국으로부터 어보를 환수받았다. . 

 

효창원을 골프장으로 만들었던 일제는 스카장 그리고 가족 공원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심지어 1940년대 접어들면서 태평양 전쟁때 전사한 일본군 전사자를 위한 충령탑 조성을 시도했었다.

 

 

 

삼의사 유해 효창원에

해방 직전인 1944년 10월 효창원 묘역을 서삼릉으로 천장한다. 이에 백범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모실 장소로 효창원을 결정한다. 1946년 6월 15일 서울역에 도착한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에 삼의사의 유해와 함께 김구가 돌아왔다.  

 

그리고 비어있던 효창원 문효세자의 묘자리에 삼의사의 유해를 묻었다. 그리고 2년 뒤에 의빈 성씨의 묘자리에는 임시정부 요인들 조성환, 이동녕 치리석 선생의 묘가 안치되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지금까지도 찾지를 못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날을 위해 효창공원 삼의사 옆에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안치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는 공동묘지에 있으나 어디인지를 일본이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고 있고 중국 도시 개발로 인한 공도묘지가 많이 훼손되었다.  

 

★이토히로부미 암살한 하얼빈 의거의 안중근 의사

 

효창운동장 지은 이유

이렇게 효창공원은 임시정부 묘역이 되었고 이에 이승만 정부는 효창공원의 의미를 희석하려고 1945년 한국전쟁 직후 효창 운동장 건설계획을 세운다. 축구장, 배구장, 체육관, 실내스케이트장이 다 있는 종합운동경기장을 설립하려했고 임시정부 묘역은 서삼릉으로 이전 시도를 했다.

 

1956년 육군공병대대가 건설 공사에 착수하게 되고 설계대로라면 김구, 삼의사 묘역 바로 앞에 관중석이 위치하게 된다. 이에 각계각층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건설공사는 중단된다. 결국 종합운동장보다 규모가 작은 효창운동장으로 건설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의도는 56년은 이승만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했던 때로 이에 좋지 못한 여론이 형성되고 효창공원이 반정부 여론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효창운동장 공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정권 위기마다 효창공원의 상징성을 바꾸려 했다.  

 

1960년 효창운동장에서 광복직후 우리나라 최초 국제 행사라고 볼수 있는 제2회 AFC 아시안컵 축구대회가 열렸고 이때 우리나라가 전승 무패 우승을 차지한다. 흥행 대성공으로 10만명 이상 인파가 몰려들었던 효창운동장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독립지사 애국선열의 묘소보다는 영광스러운 우승이 있던 스포츠 경기장으로 각인된다.    

 

당시 효창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모습
당시 효창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모습
효창운동장 건설 후 모습
효창운동장 건설 후 모습

 

 

이렇게 효창공원에 겹겹이 슬프고 비통한 역사가 쌓여있다. 그러나 정치적 공간으로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박정희 정권때 1960년 이곳에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이 조성되었고 인근에 원효로라는 도로가 있어 1969년 원효대사 동상도 조성되었다. 그래서 현재 독립투사 묘역, 반공투사,원효대사 동사등 뒤엉킨 역사가 마치 하나처럼 보이지만 펼쳐보면 상당히 다른 역사적 맥락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뿌리 임시정부의 상징이 어려있는 효창공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저널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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