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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나제 동맹 (배경 ~ 결렬까지)

by 365 ^^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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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 동맹 배경 

4세기 고구려와 백제가 서해와 황해도 지배권을 두고 격돌하던 시기 고구려 16대 왕 고국원왕은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 그러나 고국원왕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고 그만 전사한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유일하게 전장에서 전사한 왕으로 남았다. 이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는 철천지원수가 된다.  

 

->백제 건국 과정 (주몽 신화, 백제왕계보)

 

이를 복수하기 위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대왕이 복수를 하게 된다. 396년 광개토대왕이 대군을 이끌고 백제 한성을 공격하고 결국 백제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영원히 노객(충직한 신하)이 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백제 아신왕의 굴욕

 

 

삼국의 왕 89명 중에 전사한 왕은 고국원왕을 포함해 딱 4명있었다. 책계왕, 개로왕, 성왕으로 4~6세기 무렵 백제의 왕들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치열한 세력 싸움을 했다는 증거이다. 공존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백제와 고구려이다.  

 

 

 

 

 

5세기 삼국 관계  

이 시기 삼국은 한반도 주도권을 두고 주변국과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백제는 366년, 368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해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373년 백제 독산성의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해 왔다. 이를 신라가 받아들여 이들을 6부에 나눠 살게 했다. 이때의 백제왕이 근초고왕이었다.  

 

이로 인해 백제는 한반도에서 고립무원이 되었고 이에 차선책으로 가야, 왜와 손을 잡게 된다. 왜와는 4세기 근초고왕 때 선진문물을 전해주며 우호를 다졌고 397년 5월 왜국에 아신왕이 아들을 보내 더욱더 우호관계를 다지게 되면서 고구려와 신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나제동맹 결성  

그러나 이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433년 7월 백제 비유왕이 신라에 화친을 제의하면서 이듬해 2월, 신라에 좋은 말 2 필을 보내고 9월에는 흰 매를 선물한 백제였다. 백제가 3번에 걸쳐 화친을 요청하자 신라 눌지왕도 황금과 비단으로 화답했다. 373년 백제 독산성 성주의 신라 귀순 이후 60년 만에 맞은 관계 변화였다.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유 

나제 동맹 결성 이유는 고구려가 427년에 고구려가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수도 국내성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는 바닷길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활발한 활동이 가능할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성의 귀족 세력 견제 목적도 있었다. 또한 평양일대는 평야지대로 농업생산력 확보에도 유리했다. 남쪽으로 내려온 백제는 큰 위기감을 느끼면서 이에 나제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를 배신한 이유 

신라는 고구려에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던 나라였다.  신라의 왕자들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야 했고 신라 영토 내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신라 왕위 계승에도 관여를 했던 고구려였다. 402년에는 고구려 인질이었던 실성을 신라에 보내 왕으로 옹립하게 되고 실성이 눌지를 견제하려 하자 417년 눌지를 이용해 실성왕을 제거했다.  이전까지는 박석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위 계승을 했으나 고구려와 관계를 맺은 이후부터는 김 씨 세습으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신라에 심한 내정간섭이 있었다.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

 

이렇게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를 고구려는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고구려는 449년 고구려왕과 신라의 왕이 만남을 갖게 된다. 신라 눌지왕과 우의를 다지기 위해 장수왕은 충주까지 내려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손을 수동적으로 양쪽으로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제 개로왕 전사 수도 천도

450년 7월의 어느 날 나제동맹 20년 후 신라 영토 안으로 사냥을 간 고구려 장수는 싸늘한 주검이 되고 나타난다. 이는 삼국관계의 변화를 암시한 것으로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백제와 손을 잡겠다는 표현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진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몰아친다. 당시 백제왕은 개로왕으로 신라에 SOS를 보내고 신라는 군사 1만 명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군사가 도달하기도 전에 한성은 장수왕에 의해 함락되었고 백제는 500년 도읍지를 고구려에 넘기면서 백제의 수도를 한성으로 천도한다. 

 

고구려군이 개로왕에게 침을 뱉고 죄를 조목조목 읊은 뒤 처형했다. 이후에 더 이상 물러설수 없었던 신라와 백제는 공동운명체가 되어 493년에 신라의 왕녀와 백제 동성왕은 혼인을 하면서 나제동맹이 빛을 발한다. 나제동맹군은 여러 차례 고구려의 공격을 저지하게 된다.  6세기 나제동맹은 공세적 입장에서 백제의 한강 탈환을 위해 가야와도 손을 잡게 되면서 한강을 탈환한다.  

 

백제 6군 , 신라 10군

 

나제 동맹 결렬

553년 신라군은 백제를 기습공격한다. 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쳐 한강유역을 점령한지 2년 만의 일이다. 신라는 백제가 수복한 한강하류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삼는다. 이는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이 낳은 결과였다.  이로써 120년간 지속된 나제동맹이 결렬되었고 백제와 신라는 적대관계로 돌아선다.  

 

 

 

신라의 전성기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후부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나제동맹 당시에도 신라는 백제를 전적으로 믿지 않았고 이 시기에 삼년산성(충북보은)을 쌓아 올렸다. 

 

 

관산성 전투 

백제도 수세에 몰리는 것을 느꼈던 것인지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냈었다. 진흥왕에게 딸을 보낸 것은 신라를 치기 위한 백제의 그림이었다. 결국 554 가야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한다. 이것이 관산성 전투로 초반에는 백제군이 우세했으나 신라는 한강유역 군사를 빼올 정도로 위기였으나 결국 신라가 승리하면서 3만명 가까운 백제인들을 죽이고 필의 말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압승이었다. 전투 후 신라는 성왕 처형 몸은 백제에 보내고 머리는 신라 왕궁 계단에 매장시켰다.  

[역사저널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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