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389회 >
663년 8월 27일 왜, 백제 vs 신라 , 당이 한 팀이 되는 백강전투는 7세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이다. 백강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으나 금강과 동진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백강전투 이후 동아시아 질서가 개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은 나라' 라는 의미의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는 계기가 된다.
백제 멸망
645년 이후 당이 신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백제는 당과 외교관계를 단절한다. 이에 백제는 당 내부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된다. 660년 당의 소정방이 백제로 13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음에도 백제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당이 백제가 아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백제는 일주일 만에 사비성이 함락된다.
백제 부흥운동
이후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난다. 이 지역에 있던 백제인들은 당나라 군대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충남 예산에 위치한 임존성에서 당과 벌인 치열하게 6일간의 전투를 벌였고 당이 퇴각해버렸다. 백제인들은 빈약한 무기로 당과 신라군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백제 부활을 위한 백제 부흥군의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던 이때 동맹국이었던 왜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했다. 661년 귀국한 부여풍은 백제왕에 올렸고 왜에서도 전례가 없던 파병을 지원했다. 부여풍은 왜에 30여 년간 있었기 때문에 왜군을 동원하는데도 유리했다.
왜가 백제를 도운 이유
왜는 562 가야제국이 멸망하면서 6세기 중반부터 백제는 왜와 적극적 교류를 이어왔다. 이렇게 백제의 영향력이 높아졌던 것이다. 백제는 왜에게 문물을 전파하는 공공외교를 펼친 셈이었다. 또한 백제가 사라지면 나.당 연합세력의 다음 타깃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도 있었다.
백강 전투 (백제. 왜 VS 신라. 당 )
663년 8월 왜군 전선 1천 척과 2만 7천 명의 군사가 백강에 도착했고 강변에서 왜선을 엄호하는 백제 기병이 있었다. 이에 맞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역시 백강에 전선 170척을 집결시켰다. 백강 하구에선 왜와 당 수군이 접전을 벌이는 동안 육지에서는 신라와 백제 보병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백제. 왜 VS 신라. 당, 동아시아 4개국이 벌인 백강 전투의 발발이었다.
당나라는 백강전투 열흘 전에 이미 백강하구에 도착해 있었고 유리한 위치 선점 후 전장을 분석을 마친 상태였을 것이다. 당군의 배가 170여척 왜의 배는 1000 척이었으나 당군의 배는 60~70명 수용가능했고 왜군의 배는 25~30명 정도 수용가능했다. 그래서 당과 왜의 수군 전력 차이는 비교할 수 없었다. 나당연합군은 백제 기병을 격퇴시켰고 당 수군은 바람의 방향을 이용해 왜선 400여 척을 불태워 버렸다. 왜 군은 당시 전투 경험이 거의 전무했다. 여러 측면에서 당 수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2년이 넘게 준비했던 백제+왜 전투는 이렇게 패배로 끝이 났다. 이렇게 663년 백제는 사라지게 된다.
백강 전투 이후
사활을 걸고 백제를 도와줬던 왜도 지방 호족들의 힘이 약해지면서 중앙 세력에게 통일의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 또한 백강 전투 이후 백제의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일본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율령 체제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백강전투 이후 작은 국가 왜는 '해가 뜨는 나라' 라는 의미의 일본으로 국호가 바뀌게 된다.
백강전투에서 당의 수군이 역할을 했으나 큰 역할을 한 것은 신라 육군이였기에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잡가 갔던 백제 왕자 부여융을 웅진 도독에 임명한다. 이것은 백제 고토를 노리는 신라를 향한 당의 일종의 경고였다. 그래서 신라와 당의 관계가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고구려 공격을 위해 왜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승전국으로는 이례적으로 당이 먼저 왜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를 눈치 챈 신라는 자신의 적이였던 왜와 손을 잡기 위해 사신을 보낸다.
**웅진도독부(660년) 란? 백제 멸명 후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당이 설치한 군정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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