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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의 충격적 진실!!! (배경 결과 정리)

by 짱신나^^ 2021.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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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건청궁이 있다.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어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곳이다. 한국사의 가슴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건청궁 앞 

 

건청궁 앞:  1873년 고종이 창건한 곳으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곳, 전통적인 궁궐의 양식과 달리 양반 가옥의 살림집을 응용하여 지은 건물

 

건청궁은 근대 문물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공간이다.  1887년 우리나라 최초 전등불이 점화된 곳, 에디슨 회사의 전등을 가져와 설치했던 곳이다. 1883년 조선의 보빙단이 미국을 방문해 에디슨 회사를 둘러본 후 고종에게 보고를 하고 에디슨에게 설비를 요청하는 편지를 전한다.  당시 전등 사업은 자주적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상징적 작업이었다. 

 

 

건청궁 입구

건청궁 건물의 의미는 하늘은 맑고 땅은 평안하다. 맑은 하늘을 의미하는 '건청'이다. 이런 좋은뜻이 있는 장소인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시해가 일어났다.

건청궁 속 곤녕합 (을미사변의 장소)

곤령합 건물

곤녕합은 태극기 건곤감리의 곤땅을 의미하는데

곤령합 현판

 

명성황후가 일상생활을 하던 공간 및 침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이곳 곤령합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남

을미사변의 시대적 배경

19세기 말 조선 주변의 열강들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충돌하면서 청일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게 되고 청나라에게 요동반도와 대만의 소유권을 얻게되는 조약이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한다.이것이 바로 삼국간섭이다. 압박에 못 이겨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납하게 된다. 이때 세력이 커진 러시아와 손을 잡은 것이 명성황후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잡고 친일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이렇게 러시아를 중심으로 친러 내각이 만들어 지고 이에 일본은 눈에 가시였던 명성황후를 암살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을미년 1895년 10월 8일 한 나라의 왕비 명성황후를 침전인 곤녕합(옥호루)에서 시해하는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일본의 사전모의 과정

 

명성황후 시해 모의 증거 편지

을미사변 3개월 전 작성된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 총리의 편지에서 '각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단행' 이란 문구에서 알수 있듯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사전에 모의했다는 증거를 알수 있다.

 

또한 을미사변 1년 전 이노우에(전임 일본공사)는 조선의 전권을 부여받고 한국에 주한공사로 파견된다. 이노우에는 자신의 후임으로 강경파 군인 미우라를 후임공사로 추천한 후 을미사변 2개월 전 미우라가 주한 공사로 조선에 파견된다. 후임공사 미우라가 조선에 왔음에도 이노우에는 17일 동안 미우라와 함께 서울에 머물면서 명성황후 시해를 모의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내각 총리),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는 서로 친구 사이로 어릴때 부터 함께 공부했던 사이로 조선 침략을 함께 공모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시나리오 배후 인물들(전임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후임 공사 미우라 고로)

 

 

일본의 시나리오는 이러했다.

명성황후를 살해함으로써 조선에서 친러내각을 무너트리고 친일 내각 수립을 계획했고 이런 내각의 변경은 일본 정부는 관여하지 않고 조선이 스스로 바꾼 걸로 위장하기 위해 궁중 쿠데타처럼 사건을 꾸며 은폐하려고 했다. 흥선대원군(시아버지)과 명성황후(며느리)의 갈등으로 몰아 명성황후가 흥성대원군에 의해 실종된 것처럼 꾸미려 했던 것이다. 

 

 

을미사변 당일

10월 8일 시해 사건 당일 주둔 병력은 일본군 경성 수비대 600여 명과 일본인 자객 56명 조선 병력 800명 이 동원했고 청일 전쟁 이후 궁궐 수비는 일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왕실 수비는 고종의 친위 부대 시위대가 하고 있었기 때문에 궁궐에 일본군이 어렵지 않게 들어올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고종과 왕세자까지 위협을 하며 명성황후의 거처를 알아냈다. 민간인 복장을 한 일본 장교들이 건청궁으로 난입한다. 그 시각 명성황후는 궁녀들과 곤령합의 부속 건물 옥호루에 있었고 결국 이곳으로 난입해 왕비를 시해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왕비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얼굴의 궁녀들을 모두 죽인다. 명성황후를 시해 후 건청궁 동쪽 녹산으로 시신을 옮겨 불태운다. 시신을 훼손한 이유는 왕비가 죽은 것이 아닌 실종으로 날조하려던 계획으로 치밀하게 계획하고 증거 인멸을 시도했던 그들이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죽이고 도망간 것처럼 거짓 발표하기 위해 명성황후의 황후 자격이 박탈된것 처럼 거짓으로 실록에 남기기 위해 고종을 협박까지 하며 증거를 날조하려 했다. 

 

그러나 당일 날 일본군은 새벽 1시에 흥선대원군의 집으로 몰려가서 입궐을 재촉했지만 흥선대원군이 입궐을 미루는 사이 날이 밝아왔고 거사 시간 새벽 4시보다 1시간 뒤인 5시에 입궐하면서 이로 인해 목격자가 생기게 되었다. 경복궁 내 관문각(최초의 서양식 건물)에 상시 거주하던 미국인 장교 윌리엄 다이,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찐이 머물고 있고 그들 이외에 다수가 이날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을미사변 이야기는 당시 프랑스 언론을 통해 만행이 알려진다. 

프랑스 언론에 보도된 명성황후 시해 내용

핵심은 일본 정부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여 했지만 이 사건은 프랑스 보도를 시작으로 전 세계로 퍼졌기 때문에 일본은 사건을 그냥 넘어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가담한 일본인들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게 하지만 결과는 모두 무죄방면이었다. 이유는 증거 불충분이었다. 

 

 

 

 

▷을미사변의 충격적 진실

 

일본 낭인들의 정체

많은 역사사전을 보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낭인에 의해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들은 낭인이 아니였고 일본 군대의 조직적인 개입과 대부분이 친일파와 일본 엘리트 집단 약 50명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했었다. 한성 신보의 사장 아다치 겐조, 교토아다치, 당시 전임 주재 일본 제국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 후임 공사 미우라 고로 또한 이 무리 중에는 하버드대를 나온 사람도 있었다. 이 집단이 중심이 되어 정말 계획적으로 움직여 명성황후 시해를 자행한 것이다. 

 

한성신보사 앞 명성 황후 시해 가담한 일본 낭인 집단 

한성신보사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위한 낭인들의  비밀 아지트로서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이후 흥선대원군이 연루되었다고 신문에 보도한 인물이다. 

 

 

행동대의 중심에는 오카모토류노스케로 육군 소령 출신으로 낭인들을 규합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낭인 규합한 오카모토류노스케


행동대의 중심에는 오카모토류노스케로 육군 소령 출신으로 낭인들을 규합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이들의 대부분이 을미사변으로 명성이 높아져 일본에서 권력 행사하며 잘 살았다고 한다. 한성신보 사장이었던 아다치 겐조는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 14선 의원과 내무대신까지 된다.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죗값을 치르지 않고 전원 석방되었다.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고도 처벌받지 않았던 역사적 비극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무리중에 한국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 !!!

 

당시 일본 자객과 한국 훈련대가 동원됐는데 이두황,이진호,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에 적극 가담한 친일 군인이였다. 게다가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 기름을 뿌려 소각에 앞장 선 구연수라는 친일파도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에 적극 가담한 친일 군인 3인 (이두황,이진호, 우범선)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 일본도 

 

일본은 후쿠오카의 구시다 신사에 명성황후를 시해 했던 칼을 봉납해 놨다.

일본의 후쿠호카 구시다신사 

이 봉납함에는 '이 칼로 조선 왕비를 베었다' 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고

봉납함에 기록된 명성황후 시해 내용

 

일본도 칼자루에는 '번개처럼 늙은 여우를 베었다'는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기록이 칼자루에 새겨져 있다. 

일본도(히젠도)  칼에 새겨진 명성황후 시해 기록 

일본에서 명성황후 시해의 암호가 여우 사냥이였다. 한국 입장으로는 상당히 불쾌한데 시해한 칼까지 기념하듯 보관하고 있다. 당시 시해범이 세 사람 있었는데 그 중에 살해범으로 지목이 돼 현상 수배가 되었던 사람(토우 카츠야키)이 칼을 기증했다. 칼날의 길이가 약 90CM의 전형적인 일본 장검의 모양이다. 

나머지 두 명의 후손들은 사죄하고 싶다고 2005년에 명성황후의 묘(홍릉)를 찾아서 사죄를 했다.

 

명성황후와 고종이 잠든 홍릉

 

사죄의 절을 올리는 시해범 후손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이 바로 우장춘 박사(씨 없는 수박)다.

친일파 우범선과 그의 아들 우장춘 가족사진

 

우장춘 박사는 아버지(우범선)의 이런 행동을  가슴 아프고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을미사변은 절대 잊혀지면 안 되는 잊으면 안 되는 역사로 이런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세대를 넘어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4개월 뒤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역사저널 , 선을 넘는 녀석들 1회 중  리뷰]

 

 

을미사변 이후 상황 더보기↓

 

아관파천 1등 공신은 누구? (아관파천 배경 원인과 이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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