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절사
강원도 영월 창절사는 10개의 위패들 (사육신 6명+엄흥도, 박심문 포함 8명)과 정조 15년 생육신인 김시습 남효온까지 10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사육신과 생육신
(죽을)사(여섯)육 (신하)신 이란?
단종 복위 운동을 위해서 목숨 바쳐 죽은 6명의 신하.
(살) 생(여섯) 육(신하) 신이란?
단종 복위에 절의를 지킨 여섯 신하로 목숨을 바치진 않았으나 벼슬길에서 내려와 은거 생활을 한 생육신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건네는 날 성산문과 박팽년은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한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가 열리는 날 연회 때 세울 호위무사를 고민하던 세조는 성산문의 아버지 성승과 나중에 사육신의 한명이 되는 유응부에게 맡기게 되고 세조를 암살할 기회를 얻어 그날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한명회와 세조의 목을 치자는 암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갑자기 한명회가 연회를 취소한다. 단종 복위 혁명세력 중 김질이라는 자가 한명회 세력에게 밀고로 발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모두 잡히게 된다. 세조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국문 형장에 친히 찾아간다. 그리고 잔혹한 고문이 시작된다.
사육신 성산문
성산문은 이런 모진 고문에도 세조를 전하라고 부르지 않고 수양 나리라고 부른다. 고문받는 중에 세조 옆에 서있던 신숙주(세종의 총애를 받던 집현전 학사 성삼문, 신숙주)를 보게 되고 호통을 치며 단종을 부탁했는데 어찌 그럴 수 있냐고.. 이에 세조는 더 화가 나서 불에 달군 쇠로 허벅지를... 뚫어버린다. 그리고 발과 다리를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굳은 절개를 보인 성삼문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성삼문과 제일 친했던 사람 중에 신숙주라고 있다. 신숙주는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조선후기 와서 사육신이 복권이 되면서 신숙주가 비난의 타깃이 되었다. 조선 후기 이후 신숙주와 같이 맛이 쉽게 변하는 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육신 박팽년
사육신 중 박팽년이 제일 천재였다. 별명이 집대성이었는데 경학, 문장, 필법 등 다재다능하여 집대성이라는 별명이 있다. 세조는 너무 인재인 박팽년은 죽이기가 아까웠다. 박팽년의 재능을 높이 산 세조는 회유를 한다. 전하라고 한번만 부르면 살려주겠다고 하니 "나의 임금은 선왕이신 단종 전하뿐인데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하니..
약이 오른 세조 왈 세조 즉위 후 1년간 충청도 관찰사를 하면서 왕에게 보내던 장계에 흔히 쓰는 표현인 '신하는 임금님께 고합니다'를여러 번 썼고 그로 인해 너는 이미 신하라고 인정하지 않았냐고 추궁하니 박팽년 왈 그런 적 없다고 했다.
확인해 보니 장계와 문서에도 결코 쓰지 않은 글자 신. 그래서 박팽년은 고문으로 죽었다.
하위지는 거열형에 처해졌는데 소와 말에 팔다리를 찢어서 죽이는 형벌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고
유성원은 칼로 목을 그어 자결한다.
사육신 모두 고문과 자결로 죽음을 맞이한다.
박팽년의 후손
정조시대 단종 능 제사에 축문을 읽기 위해 홍문관 부교리 박기정이 온다. 단종복위사건 당시 멸문지화를 당한 박팽년의 후손이다. 세조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했던 사육신 후손들이었으나 박팽년의 둘째 아들 처가 임신을 하고 있었다. 임신 중이던 박팽년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고 마침 박팽년 집안의 종이 임신 중이였고 그 아이는 딸이었다. 그래서 종의 딸과 박팽년의 아들을 바꿔치기해서 멸문지화를 모면했던 것이다.
당시 태어난 박팽년 손자를 여자 종 비 자를 사용해 박비라고 불렀는데 성종때 자신의 존재를 자수하게 되고 성종으로부터 ‘귀한 혈육’ 이란 뜻의 ‘일산’ 이란 이름을 하사받게 된다. 이 후손들이 사육신의 복권을 위해 힘쓰게 되고 사육신의 묘가 노량진에 위치해 있고 민간에서 제사를 지내 오다가 숙종때 1691년 사육신이 복권되고 얼마후 1698년 단종도 복권이 되면서 정조 시대에 단종능 제사에 관리를 파견하게 되고 그 관리가 박평년 후손인 박기정였다. 제사 이후 박기정은 영월 부사로 부임하여 단종 유적지 조성을 주도하게 된다.
처음에는 박팽년의 제사만 지내닥 후손의 꿈에 사육신 다섯 명이 나타나서 이후 사육신의 제사도 동시에 지내게 되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생육신 김시습
생육신 중 김시습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했고 오늘날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가 있게 한 인물이다.
남효온 선생은 6인이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실을 '육신전'으로 저술해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기리고 그들의 역사와 정신을 남겨준 인물이다.
이분들은 200여 년이 지난 숙종 때 충신으로 인정을 받는다. 현재 충절과 절개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사육신, 생육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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