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글) 교황들의 타락 : 콘클라베 - 아비뇽 유수=억류 123-2
레오 10세
그리고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레오10세가 등장한다. 레오 10세는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영리했고 성격도 호방했다. 그러나 그는 사치와 낭비가 매우 심했다. 그의 취임식날 분수에 와인을 뿜어 나오게 했다. 연회장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고 구경꾼들에게는 금화를 뿌렸다. 그의 취임식에만 들어간 비용이 율리오 2세가 남긴 재정의 1/7가량이었다.
그는 사치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추기경 자리를 돈을 받고 판매했다. 레오 10세가 매매한 관직은 약 2150개 정도였고 수입만 약 980억원이었고 심지어 성인들의 성유물을 판매하고 전시해서 수익을 창출했다. 여기에서 부족한 돈은 은행이나 부유한 추기경에게 빌리고 교황의 귀금속까지 전당포에 맡겨 대출을 받기도 했다.
면벌부=면죄부 내용
그의 사치로 인해 성 베드로 성당 증축을 위해 면벌부=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사실 면벌부는 11세기 십자군 전쟁 때부터 교황청이 암암리에 배포했었다. 성지 수복을 위한 전투에서 죽게되면 천국에 갈수 있다는 의미로 면벌부를 배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돈이 필요했던 교황들이 이를 악용하기 시작했다.
죄를 범한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 불로 죄를 정화하고 단련받는 곳이 연옥인데 연옥에 가면 죄를 없애기 위해 죄의 크기만큼 연옥에 머물며 불에 태워지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면벌부를 사면 연옥에 머무는 시간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쓸수록 천국행이 빨라지는 것이다. 죄목에 따라 변벌부 가격이 달라졌고 기간도 3개월에서 평생까지 선택가능했다.
면벌부 판매가 교황령을 넘어 독일까지 확대되었다. 당시 대주교 자리를 탐내고 있는 독일 성직자 알브레히트라는 인물에게 면벌부 판매를 일임했던 것이다. 당시 성직 매매로 부수입을 올리던 교황은 더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고 알브레히트에게 큰 직책을 주는 조건으로 약 90억을 받고 성직을 판매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금액을 한꺼번에 감당하기 힘들었던 알브레히트는 당대 부자 가문이었던 푸거가문에 돈을 빌리게 되고 그 돈을 충당하기 위해 교황에게 8년간 면벌부 판매권을 받아 푸거 가문과 레오 10세엑 수익금을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때 알브레히트는 면벌부 판매를 희망하는 교회를 신청받고 각 교회에서도 면벌부는 판매되기 시작되었고 이것이 심해져 죽은이를 위한 면벌부 판매도 시작되었다.
마틴 루터 95개조 반박문
이렇게 면벌부가 대량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이런 면벌부로 인한 교황청의 타락을 지켜볼수 없던 한 인물이 등장한다.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였다. 루터는 수도사가 된 후 금욕적인 생활과 신학공부를 하며 영혼의 구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면벌부 판매 담당자 알브레히트에게 이를 반박하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문서를 보냈다.
당시 유럽은 인쇄술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루터는 반박문과 자신의 책을 인쇄하여 사람들에게 배포했으며 그리고 성경은 이전까지 읽고 해석하는 특권을 성직자만 가지고 있었는데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널리 퍼지게 했으며 그의 인쇄물 덕분에 면벌부 판매와 교회의 타락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깨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루터는 레오 10세에게도 이 반박문을 보내게 되고 루터는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종교개혁의 시작
하지만 루터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이 사건은 기독교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유럽 사회를 뒤흔든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그 결과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구교 로마카톨릭과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난 신교 오늘날의 개신교로 나뉘게 되었다.
루터파,칼뱅파
부패한 가톨릭을 부정한 개신교를 지지하는 세력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마틴 루터와 더불어 프랑스에서 장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예정설을 주장하며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칼뱅의 교리는 현대 개신교 사상의 기반으로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정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의지로 미리 정해진다는 교리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고 로마 가톨릭과 분리하게 되었고 유럽의 질서를 뒤흔드는 엄청난 변화였다.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파의 교리는 독일 남부, 동부 그리고 북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칼뱅파의 교리는 프랑스 남부 스코틀랜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종교적인 신념이 전부는 아니였다. 많은 제후와 국왕들은 자신의 권력 강화 수단이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종교개혁을 수용했다.
종교개혁의 영향
종교개혁을 계기로 16.17세기에 걸쳐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종교 전쟁이 벌어진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아 1524년 남독일 지방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과 칼뱅파 세력 사이에 36년간의 내전 위그노 전쟁, 가톨릭의 수호자 스페인의 절대주의적 지배에 대항한 독립전쟁으로 네덜란드는 신교 국가로 승인되었고 1618~1648년 독일을 무대로 신교파와 가톨릭 세력간에 독일 30년 전쟁이 벌어졌다. 독일에서 대규모 국제적으로 번진 종교전쟁은 약 8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결국 신교와 구교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 30년 전쟁을 종결지으며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를 모두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다. 로마 가톨릭교부터 다양한 개신교까지 다양한 기독교의 역사가 이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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