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의 미국 이민의 시초였던 하와이를 기점으로 미국 본토에서도 한인 이민자 수가 늘어가면서 코리아타운이 형성된다. 캘리포니아의 리버사이드에 위치한 도시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으로 한인들이 몰려든 이유는 곡물 위주의 농업발달로 사탕수수 노동보다 덜 힘들었다. 또한 하와이보다 일은 쉽지만 일당이 두 배로 임금이 훨씬 높았다. 또한 19세기 말 미국내 최고의 부촌 중 하나가 바로 리버사이드였다. 당시 리버사이드는 미국 서부 최초 오렌지 농업지였고 그래서 다양한 인종들에게 취업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이때 최초로 생긴 코리아타운이 바로 파차파 캠프였다.
최초의 한인타운: 파차파 캠프
파차파 캠프를 세운 인물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그는 파차파 캠프에 한인 노동국을 설립하고 한인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일자리를 주선해주었다. 안창호 선생과 한인 노동자들은 오렌지 수확이 끝나면 복숭아 포도 농장으로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이렇게 일을 하게 되면 1년 내내 쉬지 않고 돈을 더 많이 벌수 있었다.
한인들이 쉬지 않고 일했던 이유는 번 돈의 일부를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창호 선생은 오렌지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다 라고 했다. 파차파 캠프는 단순한 일터와 거주지가 아닌 고된 노동이 끝나면 다같이 모여 결혼식, 생일잔치 등 개인적인 행사부터 토론, 예배 등 사회 활동까지 열었고 한인 회관, 한인 교회, 한국어 학교 등이 이곳에서 최초로 세워졌다.
안창호 선생은 질서를 위해 엄격한 규율을 만들었다.
- 밤 9시 소등
- 도박, 폭음 금지
- 내복을 입고 길거리 다니기 금지, 흰색 셔츠를 입도록 권장
- 청소 운동을 했다. 청결에 신경쓴 이유는 더러운 모습을 보이면 미국인들이 한국을 미개인 나라로 독립국가가 될 자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까봐였다.
LA 코리아타운 탄생
이처럼 파차파 캠프는 미주 한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70년 후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LA 코리아타운이 형성된다.
LA에 코리아타운이 발전한 이유
20세기 초부터 LA는 미국에서 가장 산업이 발전하고 일자리가 넘쳐다는 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발달로 새로운 자본이 몰렸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지리적 특정을 활용해 항공, 조선, 제조 전쟁 보급 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결과 LA인구가 약 6배로 증가하게 된다.
미국 이민법 개정
LA 의 산업이 발전하던 시기 한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65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이었다. 유색인종들의 이주를 제한하는 국적별 할당제를 폐지하고 가족들의 초정을 허가하는 법이었다. 미국은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에 비해 항상 노동력 문제를 겪고 있었고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이민법 규제를 풀었다가 다시 배척하는 등 상황에 따라 이민정책을 바꿔왔다. 그러다 1965년부터는 모든 나라의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아시아계, 흑인, 히스패닉 계열 등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LA는 세계 최대의 다인종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LA 다운타운에 위치한 코리아타운
LA 코리아 타운은 LA의 노른자 땅에 위치해 있다. 그 이유는 당시 급증한 유색인종과 LA 다운타운의 상권이 발달하면서 취업의 기회가 많은 이곳으로 모여들게 되고 이로 인해 백인들은 급증한 아시아계 때문에 부동산 가치가 하락하게 되니 교외로 떠났던 것이다. 모여드는 이민자들로 인해 급격하게 이지역은 슬럼화되기 시작해 땅값이 하락했다. 이때 한인들이 적은 투자비용으로 한인들이 상점들을 하나둘씩 사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인들이 식료품 마트나 주류 가게 식당 주유소등을 운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리아타운의 발전 과정
LA 한인타운 형성에 이바지한 인물 2명이 있다. 서독에서 광부일을 접고 LA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던 이희덕 씨는 차이나타운을 구경하다가 왜 한국인은 코리아타운이 없는가 생각하며 이 거리에 최초로 일본인이 운영하던 식료품가게를 인수하여 올림픽 식품이라는 마켓을 오픈한다. 이것이 이 거리 최초의 아시안 마켓이었다.
올림픽 마켓은 현지에서 생산한 한국인 채소와 고기 등 다양한 한국 식품을 판매했고 이후 영빈관이라는 식당을 열었다. 이곳은 나이트클럽이었는데 영빈관을 한국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직접 한국에 들어와 청기아 1만 개를 공수하고 단청 장인까지 초빙했다.
영빈관의 각종 행사를 하게 되면서 LA 타임즈나 각종 언론에 노출되면서 LA 한인 사회가 미국 시민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코리아 타운의 초대 회장인 김진형씨가 있는데 1972년 코리아타운을 널리알리고 상권을 키우기 위해 한글 간판 캠패인을 벌였다. 차이나타운의 중국어 간판을 보고 코리아타운에도 적용을 했고 심지어 미국인이 운영하는 상점까지 찾아가 한글 간판 설치를 설득했다. 그래서 2달 동안 코리아타운의 가게들 중 총 61곳이 한글 간판으로 교체 되었다. 그리고 김진형씨는 코리아타운을 정식 지명으로 인정해 줄 것을 LA 시의회에 끊임 없이 요청했다. 1980년 12월 8일 LA시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코리아타운이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코리아타운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 고속도로에 표지판을 설치하기 까지 했다.
김진형씨 요청으로 1981년 8월 22일 올림픽 네 거리에 코리아타운을 알리는 최초의 표지판이 세워졌다.
코리아타운 맛집
LA코리아 타운에 가장 먼저 세워진 맛집 북창동 순두부집이 있다. 이곳은 순두부만 파는 것이 아니라 삼겹살등 여러가지 메뉴가 있다. 지금 LA를 가도 관광코스처럼 들리는 곳이 되었다.
이렇게 순조롭게 발전하던 LA 코리아 타운에서 미주 한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전 미국을 큰 충격에 빠뜨린 LA 폭동이다. LA폭동은 흑인들이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에 분노해 일으킨 폭동으로 1992년 4월 29일에 시작해 6일 동안 약 60명 사망 2383명이 부상을 입었던 사건이다. 피해 금액만 약 1조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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