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픽 118회
하와이 이민 배경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이민 역사는 하와이에서 시작된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된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해 청.일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조선 강탈 정책이 노골화되고 있었다. 또한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자 의병이 일어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선교사 알렌의 제안
1901년 극심한 가품에 시달린 대한제국은 농민들이 유랑을 하게 된다. 이때 나라가 어려운 상황이니 고종의 주치의 선교사 알렌이 고종 황제에게 하와이로 백성들을 보내는 것을 제안하게 된다. 이민의 뜻은 풍족하는 곳으로 간다는 의미다.
당시 하와이에는 플랜테이션이라는 큰 농장 열대. 아열대 지역에서 대규모로 경작하는 농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이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프리카 노예를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 그러다 노예제가 금지되면서 아시아 이민자로 노동력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근대적 이민
1840년대 중국인을 시작으로 1860년 일본인이 이주하게 된다. 하와이 내 중국인과 일본인이 증가면서 하와이 원주민보다 인구가 많아지게 된다. 이에 하와이 당국은 위협을 느끼게 되고 새로운 노동자들로 채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한인들이었다. 이것이 근대적 이민의 시작 하와이 이민이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이민 사업 독점권을 가진 동서개발회사를 통해 노동력을 송출하기 시작하면서 국가 정책으로 하와이 이민이 시행됐던 것이다. 정부 발급 여권을 처음 사용한 근대적 이민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홍보를 많이 해도 이민을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1900년대 초는 하와이는 태평한 한가운데 생소한 섬이었다. 이에 이민자 모집을 위해 알렌 공사가 직접 나선 것이다.
최초의 하와이 이민
그렇게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하와이 이민 지원 121명이 현해환 호를 타고 출발하게 된다. 인천출신과 교회신도들이 많았다. 12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 사람들은 신체검사를 받고 여기서 19명이 탈락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102명이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랜기간 배를 타고 항해한 사람들중 질병을 얻은 16명이 다시 제외되면서 86명이 하와이에 입국허가를 받는다. 16명은 배를 다시 타고 돌아갔다는 기록도 없고 그 후에 치료를 받고 하와이에 재입국했다는 기록도 없다.
하와이 이민 1세대 삶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하와이는 허허벌판이었다. 일부 마을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개발이 되지 않았었다. 호놀룰루 항구에 내린 한인들은 해안선으로 설치 된 기차를 타고 해변의 농장들을 거쳐 와이아루아 농장에 도착한다. 당시 서양의 최고 향신료는 설탕이었다. 이때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관이 이민에 동행했었다. 그러나 통역관은 부족했기에 한인들은 주로 말이 필요없는 노동을 했다고 한다. 당시 한인들은 하루 10시간을 노동했다.
하와이 이민 노동자의 월급은 15~17 달러였다. 여기서 절반가량은 식비와 생활비로 공제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기로 방고를 목에 걸고 이름 대신 불린 번호였다.
하와이 한인들의 평가
이렇게 한인들은 하와이 생활에 적응해 갔다.
사진 신부란?
적응 과정 중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는데 1905년까지 65차례 이주한 하와이 이민 1세대 7400여 명 중 독신 남성 노동자가 다수였는데 이민 생활 안착을 위한 결혼이 힘들었다. 그래서 사진을 통해 신부를 구했는데 사진을 본 신부측에서 남성을 골라서 약 950명이 하와이로 시집을 왔다.
그러나 남자들은 자신의 나이를 속이기 위해 젊게 꾸민 자신의 사진을 보냈고 당시 사진신부의 나이는 10대였던 반면 남성들은 47살 심지어 75살까지 있었다. 물론 하와이에 도착 후 사기 결혼이라고 이혼을 한 부부로 있었으나 대부분은 비싼 뱃삸 때문에 하와이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 사진 신부들 덕분에 가정이 형성되고 정착을 하게 되면서 2세의 탄생과 함께 한인 공동체가 형성되고 생활 반경이 넓어지면서 한인타운도 생성이 되었다. 또한 사진 신부들은 자녀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 교육을 시키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들을 중심으로 여성이 주축이 된 부인회를 만들어 30여년 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가지 운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사진 신부가 모은 독립운동 자금은 20만 달러가 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잃게 되면서 하와이 이민자 모든 이들이 독립운동을 하기에 이른다.
대한인국민회 활동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통합해 1909년 재미 한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한다. 이 대한인국민회가 1912년 하와이에 건물을 구입해서 독립운동을 한다. 1910년 한일합병되면서 대한인국민회는 비자발급, 이민자 문제 처리등 영사관 역할을 자처했다. 이렇게 하와이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다. 해방 전까지 독립운동 자금 3백만달러를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한인 문화 전파
김치 보급
독립에 힘을 보탤 수 있었던 건 이민자들의 경제적 성장과 성공적 하와이 정착으로 점차 영향력을 넓혀 간 이민 1세대 덕분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하와이에 일본인 공백을 한국인이 메우게 되고 생활, 경제 영역의 확장으로 한국 문화를 하와이내로 전파를 했다. 그 중에 하나가 1920~30년대 이미 김치가 현지화에 맞춰 보편화되었다 .이 하와이 김치가 미국 본토까지 수출되었다.
고국방문
한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학교를 만들었고 한글과 한국 노래를 교육했다. 한인들이 다니던 하와이 밀스학교에서는 매년 연날리기 대회를 하기도 했다. 또한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식민지인데도 불구하고 1923년 하와이 야구단 등이 고국 방문을 하게 하면서 뿌리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
기부금 투척 (인하대학교 시작)
현재 인하대하교는 인천의 인, 하와이의 하가 합쳐져서 인하대학교가 되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초토화된 대한민국을 다시 건설하기 위해 공업기술이 필요했고 1952년 하와이 동포들이 모은 18만 달러를 기증해서 만든 학교가 인하대학교의 시작이다.
교육 사업
또한 1972년 설립된 하와이 대학교 내 한국학 연구소가 있는데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한국학 전문 연구기관이다. 이곳은 하와이 이민 역사의 보물창고이다.
현재 하와이 이민사회 영향력
현재 하와이 한인사회는 성장하여 하와이 시장도 배출, 아시아계 최초로 하와이 연방법원 판사도 배출하면서 지금의 미주 한인 사회의 기틀을 닦은 하와이 이민이 기여했다고 볼수 있다. 하와이 이민이 재외동포 사회의 뿌리가 된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재외동포는 약 730만으로 미국이 250만으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고 중국이 2번째이다.
멕시코 이민
이 시기 한인들이 쿠바, 멕시코등 다른 나라로도 이민을 많이 갔다. 특히 멕시코에서 한인들이 일했던 농장인 밧줄과 카펫의 원료가 되는 에네켄 농장이 있는데 에네켄 (Henequen)의 한국식 발음이 애니깽으로 불렀다.
그래서 이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들의 삶을 그린 <애니깽> 영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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