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현재까지 2000년 동안 유지된 직책으로 전 세계 약 13억 가톨릭 신자의 최고 지도자 교황이다. 현재는 교황이 여러나라에서 신성시 되고 있으나 우리가 아는 교황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줬던 시기가 있다.
최초의 교황 선출
바티칸 시국은 로마제국, 가톨릭 권력의 중심지였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는 탄압을 받았다. 박해를 받던 기독교는 힘을 결집할 필요가 있었고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를 초대교황으로 삼아서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알려진 바티칸 일대를 루마 주교가 대를 이어 교황이 되도록 합의했다. 이후 4세기 초 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했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다. 그후 유럽여러나라들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된다. 기독교를 믿고 따르는 모든 국가에서 신의 지상대리인 역할을 수행하고 기독교를 총괄 종교적인 지도자가 된 교황이었다.
그러나 신앙을 전파하던 교황의 모습은 약 9세기경부터 그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황제가 앞장서서 기독교를 정치적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귀족들도 재산을 기부하며 힘이 커지자 105대 교황 니콜라오 1세는 교황의 권위가 모든 교회와 국가 위에 있다고 선포한다.
교황의 권한
▷ 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당시 기독교 국가 왕들은 교황에게 대관식 치르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고 그래서 왕들은 교황 앞에 공손히 무릎꿇고 왕관을 받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이는 신의 대리인으로 받은 왕좌라는 상징성을 가져 왕좌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카노사의 굴욕
이런 교황의 권위에 굴복한 카노사의 굴욕이 있다. 아래 인물은 그레고리 7세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황제이다. 당시 유럽의 많은 국가들 황제에게는 지방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한이 있었다. 그런데 교황이 이 권한은 교황이 가져야 한다고 하니 황제가 이를 거부한 것이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한 것이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신을 대신해 황제를 심판한 것이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추운 겨울 가족을 데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잠시 교황이 머물러 있던 카노사로 향했다. 힘들게 교황을 찾아간 황제였으나 교황은 3일동안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황제는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맨발 차림으로 문을 열어 달라 애걸했고 3일 뒤 교황은 문으로 나왔고 이에 황제는 자신의 파문을 철회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교황의 발에 입까지 맞춘 후에야 교황은 황제의 파문을 철회했다.
▷ 교황은 세속의 왕처럼 땅을 실질적으로 소유할수 있었다. 재산 소유와 증식에 한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교황중의 일부는 재산 증식을 위해 가문을 이용했다. 교회의 재산이 자녀에게 상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직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1세기 부터 독신 의무가 강제 시행되었다. 이미 가정을 꾸린 성직자도 이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이름을 물려받지 못하기 때문에 사생아로 살아갔다.
이에 교황은 당시 교황령의 일부를 자신의 자식들에게 떼어주고 임기기 끝나면 돌려줘야하는데 이를 돌려주지 않았는 일이 허다했다. 게다가 교황은 기독교 국가들에서 수입을 엄청나게 얻고 있었다.
당시 교황과 기독교를 수호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해 유럽 각국가의 영주와 기사들이 십자군 전쟁이 참전하다가 전사하는 일이 빈번했고 그러면 그들의 재산을 교회에 양도하거나 그 땅의 수입을 교회가 이용하도록 해주었다. 심지어는 전쟁을 명목으로 특별 세금까지 걷도록 했다. 이 모든 돈이 로마 바티칸으로 흘러들어갔다.
▷ 마지막으로 중세 시대 교황의 권한은 군대를 동원할수 있는 것이었다. 귀족 가문에서 기사 부대를 제공받거나 자체적으로 기독교와 교황을 수호하기 위한 전사 수도회라는 조직된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15세기부터는 스위스 용병을 고용해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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