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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쑨원 -위안스카이 그리고 제1차 국공합작 120-1

by 365 ^^ 2023. 11. 15.

쑹자수는 중국 하이난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지독한 가난으로 미국에 있는 먼 친척에게 입양이되었다. 미국식 교육을 받던 쑹자수는 1885년 중국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돌아와 자리잡은 곳이 상하이였다. 

 

3남3녀의 다복한 가정

 

쑹자수는 출판사, 무역등의 사업이 성공하면서 손꼽히는 부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부로 자신의 자녀들을 유학을 보냈다. 여자도 예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쑹자수의 딸들은 중국 여성 최초로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첫째 아이링은 1904년에 가장 먼저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1907년 둘째 칭링, 셋째 메이링이 함께 미국에서 유학을 하게 되었다. 둘째 칭링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세 자매가 유학을 하던 시절 중국은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쑨원

당시 청나라는 서태후가 다스리던 시기였다. 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장악, 엄청난 사치를 즐겼고 관리들의 부패로 백성들이 삶은 점점 피폐해지던 시기였다. 이를 참지 못했던 사람들은 결국 낡고 부패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신해혁명이 1911년 1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우한에서 시작된 이 혁명은 22개의 성 가운데 17개의 성이 독립을 선언한다.

 

당시 혁명세력은 난징을 점령한 후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했고 임시혁명정부의 지도자로 중국의 국부 쑨원이 추대되었다. 쑨원은 1890년대부터 혁명조직을 만들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혁명 활동을 주도했다. 그가 지도자가 된 이유는 쑨원이 주장했던 삼민주의 혁명 이론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쑨원의 삼민주의

 

지금까지 중국은 2000년이 넘도록 혁명으로 황제가 다스려왔다. 혁명으로 황제가 무너졌고 삼민주의는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1912년 1월 1일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선포한다. 그것이 바로 중화민국이다. 그리고 군사력이 부족했던 중화민국이었기 때문에 쑨원은 청나라의 총리대신이자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위안스카이와 손을 잡기로 결정한다. 

 

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

쑨원은 청나라를 하나의 공화국으로 건설하는 조건으로 공화국 건설 후 대총통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한다. 위안스카이는 191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퇴위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쑨원도 약속대로 임시대총통의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임시대총통이 된 후 쑨원과의 약속을 내팽개친다. 난징을 수도로 정하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 1912년 5월 리위안홍을 대표로 공화당을 창설하고 자신만의 혁명 정부를 꾸려나갔다. 쑨원은 화가났지만 위안스카이를 제지할 힘이 없었다. 

 

이에 쑨원은 또다른 조력자 쑹자수를 찾아갔다. 쑹자수를 쑨원이 혁명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혁명 정신에 깊이 공감하고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친구였다. 1912년 베이징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화민국의 국회의원을 뽑는 최초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전체 870석 가운데 약 430석을 차지하며 최대 정당으로 등극한 국민당은 다수당으로 의회를 장악하게 되지만 국민당의 대표 쑹자오런은 1달만에 위안스카이에게 암살당하고 1913년 말~1914년 초 국민당을 없애고 국회까지 해산시켰다. 

 

 

그래서 위안스카이의 다음 타깃은 쑨원이었다. 이에 위협받는 쑨원은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자신의 가족은 남겨둔 채 쑹씨 가족들과 일본으로 향했다. 이때 쑹자수의 둘째 딸 칭링은 쑨원의 비서가 되어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혼을 한다. 이때 쑨원의 나이 48살 칭링은 21살로 두사람의 나이 차이가 27살이었다.이에 가족들은 반대가 극심했고 쑹자수는 쑨원을 찾아가 절교를 선언한다. 

 

 

영풍함 사건 

1916년 독재의 길로 들어서려던 위안스카이가 갑자기 사망한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이룬 군벌이 세력 다툼을 벌이며 내전이 발생했고 여러 지역으로 중국을 갈라놓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쑨원은 1921년 중국 광저우에 다시 정부를 세워 54세에 중화민국 대총통이 된다. 그리고 쑨원은 군벌로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북벌을 선언한다. 이에 1922년 6월 16일 광둥성의 한 군벌이 쑨원이 있는 광저우의 쑨원의 관저에 대폭격을 가한다. 쑨원은 영풍함으로 피신을 한다. 이를 영풍함 사건이라 부른다. 이때 쑨원을 도왔던 이가 장제스이다. 

 

 

제 1차 국공합작

장제스는 쑨원의 목숨을 구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얻게 된다. 쑨원은 군벌들에 맞서 중국을 재통일할 방법으로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는다. 1921년 7월 23일 중국 공산당은 창립한 후 소련 공산당의 후원으로 중국내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쑨원은 군벌 타도와 노동자, 농민 중심의 중국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쑨원이 1924년 1월 북벌(국민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중국 공산당과 힘을 합친 제1차 국공합작이다. 국민당은 공산당을 개인 자격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공산당이 이를 수용하면서 소련과도 강력은 동맹을 맺고 무기와 자금을 원조받게 된다. 

 

황포군관학교

 

그리고 중국 최초의 현대식 군사학교인 황포군관학교를 세운다. 이곳에서 수많은 군사 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로써 쑨원은 중국을 다스릴 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1925년 쑨원은 58세의 나이에 갑자기 간암으로 사망한다. 

 

쑨원 사망

 

쑨원이 죽은 후  공산당과 협력하는 좌파와 공산당과 협력을 파기하려는 우파세력이 국민당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북벌도 중단이 되었다. 이에 쑨원의 아내 칭링은 정치에 입문한다. 당시 마오쩌둥도 국민당의 위원으로 들어와 있었다. 

 

칭링은 쑨원의 대리인이 되어 참석한 회의/ 청년시기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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